수정 | 삭제 |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새벽같이 일어났다. 다른날들 보다 더 일찍 회사에 출근했다. 오전에 예정된 대책 회의를 위해서 준비를 했다. PR팀에서는 어떤 대응을 제안할 수 있을까?
사장님이 주재하는 회의에 본사에서는 컨퍼런스콜로 들어와 있었다. 사장님은 경쟁사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소식을 간략하게 브리핑했다. CFO께서는 경쟁사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수금액에 대해 정확한 액수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3조원대는 넘는다는 이야기 뿐. 일부 중역들은 “미쳤군…미쳤어…”라고 중얼거렸다.
사장님은 각 부문에서의 타격예상치를 산정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대한 대응을 강구하자고 했다. 본사에서는 이를 위해 플랜B팀을 빠른시간내에 만들어 실제 활동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본사 변호사들은 이번 경쟁사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에 대해 ‘독과점법’ 저촉 사실을 강조했다. 그들의 경험에 의하면 일단 공정거래위원회측에서 이러한 대형 독과점 합병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사실 80-90년대 D그룹이 O맥주를 가지고 전체 맥주시장 점유율 70%에 올랐을 때, 경쟁사는 지금의 H사 아니라 J소주사였다. J소주사는 당시 소주만을 가지고 서울에서 거의 90%이상의 시장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던 공룡이었기 때문이다. D사는 우리 맥주가 이렇게 잘 팔리는 데 소주만 있으면 이 주류시장을 다 장악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반대로 J소주사는 우리의 시장장악력을 맥주에도 펼치고 싶었던거다.
그래서 90년대 초반 J소주사는 JC맥주사를 설립 새로운 맥주를 본격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D사는 강원도 지역의 소주사인 K사를 전격 인수해서 G소주를 출시했다. 재미있는 것은 모기업의 시장장악력에 힘입어 J사의 맥주와 D사의 소주는 출시 직후부터 가파른 시장점유율 장악을 기록했다. 만약 신생 단일 기업이 각각 소주와 맥주를 출시 했었다면 전혀 가능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던거다.
이런 성장의 뒷면에는 끼워팔기(Bundling Sales)가 유효했다. D사의 맥주와 J사의 소주는 Must Stock Product라고 불린다. 도매상들이 이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장사를 하기 힘들고 이 두개의 제품으로부터 경영 이윤이 대부분 생산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당연 D사와 J사는 자신의 도매상 장악력을 십분 활용하게 되었고, 맥주 10박스에 소주 2-3박스식으로 끼워팔기가 당연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메이저와 마이너의 번들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본사에서 보는 시각은 이번 경쟁사의 J사 인수를 ‘메이저와 메이저의 번들링’으로 예상했다. H사의 맥주는 전국 60%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고, J소주사는 전국 소주시장의 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또한 재미난것은 H맥주사는 영남지역에서 80-90%의 시장점유율을 올리고 있는데 반해 J소주사는 그 지방에서 마이너중의 마이너였다. 반대로 H맥주사가 고전을 하는 서울 및 수도권 지역에서는 J소주사는 90%이상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볼때는 메이저와 메이저가 합병하는 것이고, 지역적으로는 메이저와 마이너가 환상적으로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예측이었다. 이는 엄격하게 볼때 공정거래법에 저촉되어 공정한 경쟁을 제한하는 상황이 도래되는 것이다.
일단 PR팀에서는 이렇게 보고했다. “가능한한 최대로 경쟁사의 J사인수에 대한 반공정거래 여론 분위기 및 시각을 조성하겠습니다.”
여러 중역들이 뇌까렸다. “여론에 공정위가 움직일까? 흠…”
내가 이야기했다. “제가 공무원들과 일을 해 본 경험에 의하면, 공무원들은 여론을 가장 신경쓰여 합니다. 자신들의 결정이 아주 조용하고 클린한 환경에서 이루어지길 바라는 거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경쟁사의 반시장적 합병을 수수방관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이는 직무유기라고 봅니다. 제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양사의 합병 반대여론을 조성해보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컨퍼런스콜로 회의에 참석하던 본사 아시아 퍼시픽 사장이 말했다. “Our goal is Blocking. You Must Block!”
블로킹…블로킹이다. 우리에겐 현실적인 옵션이 세가지가 있었던거다. 공정위의 완전 인수 승인, 공정위의 조건부 인수 승인, 그리고 공정위의 불승인. 이 세가지였다. 그러나 본사의 명령은 불승인으로 이끌라는 것이었다. 블로킹…
회의가 끝나고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최고의 팀이 필요하다. 나 혼자서는 이번 일을 모두 해낼수 없어…예산도 필요하고…’ 온통 걱정뿐이었다.
상무님과 사장님이 내려와서 나에게 말했다. “얼마가 들던 최고의 팀을 꾸며라. 경쟁사가 최고의 팀을 가지지 못하게 어떻하든 팀을 구성해라. 최고로.”
오케이. 예산도 본사에서 일부지원을 통해 충분하게 확보해준다고 약속을 받았다. 가자…
내 일생의 마지막 대형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기로 맹세했다….
![](https://i0.wp.com/pds5.egloos.com/pds/200703/06/97/d0046497_1003142.jpg?resize=375%2C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