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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중순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14개의 컨소시엄 (원래는 20개의 컨소시엄이 의향서를 냈다)이 약 한달이 넘는 기간동안 J기업에 대한 실사(Due Dilligence)를 했다. 이 과정은 J기업을 얼마에 살것인지를 각 컨소시엄이 결정하기 위한 수순이다.
J기업은 시장에 내 놓인 매물로 완전 노예시장에 나와있는 노예의 형상이다. “이 남자 노예는 키가 180이고, 이빨이 튼튼하고, 힘도 셉니다. 대신 음식을 많이 먹지는 않고 잠도 없어요. 자식도 많이 낳아서 주인을 부자로 만들 겁니다. 살펴보세요” 이런식…인 셈.
우리 회사의 중역들과 팀장들도 컨소시엄 멤버로서 J기업의 실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당시 이를 통해 같은 업종의 거대기업인 J사의 속내를 다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라서 매우 소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영업사원들을 포함한 직원들은 우리가 J사를 인수한다면? 하는 부푼 꿈이 있었다. 일부 영업사원들은 도매상들에게 우리가 인수할 것이라고 은근히 뻐기고 다니기도 했다. 실제로 영업실적이 좋아지기도 했었다…
3월 중순…최종 인수 제안서 제출을 2주가량 앞둔 어느날. 본사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DH컨소시엄에서 빠지기로 했다” 아니…컨소시엄에서 빠지기만 하면 다인가?
플랜상에 Plan B가 실제로 실행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공식적으로 DH컨소시엄에 참여했다는 발표는 하지 않았기때문에, 이젠 참여 안할꺼라는 발표도 할수는 없다.
기자들이 물어오지 않기를 바랄 뿐. 본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기자들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알려줄래? 본사의 반응 “우리는 지금까지 J인수전에 참여하겠다고 밝힌적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 코멘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참 마음 편한사람들.
예비실사까지 참여해서 J사에 들락달락 거린 양반들이 코멘트하고 싶지 않다니…아니 무슨 우리 기자들을 바보로 아나? 너무 이성적인 것도 병이다.
나는 어떻게 우리가 인수전에서 빠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기자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PR담당자는 확실한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는 마치 변호사가 의뢰인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러가지 본사의 정치적이고 고단수 경영적인 결정이었다. 알고보니. 그냥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좋다.
역시나…발빠른 기자들이 전화를 걸어온다. “야 당신네 컨소시엄에서 빠졌다면서?” “왜 빠진거야?” “DH랑 트러블이 있었던거야?” “다른 컨소시엄이랑 손잡는거 아니야?”
나의 답변. “컨소시엄 참여 여부에 대한 결정이 지금 내려 진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저희는 참여 않기로 결정한거죠” “본사의 경영상의 결정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DH사와는 현재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번 인수전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컨소시엄에 대한 검토는 없습니다.”
DH쪽의 반응도 냉담하다. 그쪽의 PR대행사측은 이제 자기네가 알아서 하겠다는 입장이다. 금세 아군에서 남으로 변해간다. 당연한거지. 알아서 하시지요.
이제 우리는 그냥 방관자의 입장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조용히 인수전을 지켜볼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DH 컨소시엄은 메이져 컨소시엄에서 격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경쟁사인 H사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가 되지 않기만을 기도해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H 컨소시엄은 마이너로 치부당하고 있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D기업과 우리가 인수전에 참여하니까 위협을 느껴서 어쩔수 없이 H사도 인수전에 발을 담근 것이라는 평이 우세했다. 현금도 없고 그런 큰 기업을 인수하기에는 역부족인 회사라는 평도 일반적이었다.
이젠 당분간 컨퍼런스콜도 없다. 기자들을 만나서 이야기 할 것도 없다. 당분간…
3월말일 최종 인수제안서들이 접수되는 날이다. 이날 오전부터 기자들과 관련 PR담당자들은 모든 촉각을 곤두세웠다. 기자들이 아직도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DH사는 얼마정도 쓴것 같어? D사는? 어디 C나 L에 대해 들은바는 없어?”
나는 맘편하게 답변했다. “솔직히 약간 오바하는 회사가 나오기전에는 한 3조 미만에서 가격대가 형성되지 않겠어요? 문제는 오바하는 회사가 누가 될까하는 거지요. 그런 회사가 나오면 이 판은 깨지는거지…”
오후가 되니 모든 컨소시엄의 인수 제안서들이 마감되었다. 채권단은 이 인수제안서들을 검토하여 4월 1일경에 우선협상 대상자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자들과 PR인들은 그 싯점을 기다릴 수 없다. 계속 360도 정보력을 발휘해서 각 컨소시엄의 정보를 빼내고 공유하고 있었다.
오후 6시경. 모 신문사 부장 및 출입기자와 술자리를 갖기로 되어 있어 우리 회사 상무와 나는 일찍 회사에서 나와 여의도로 향하고 있었다. 나에게 D그룹 홍보실에서 전화가 왔다. “방금 정보가 들어왔는데, H가 가져갈꺼 같다. 준비해라.” “네….”
여의도로 향하는 차 속에서 상무와 나는 아무말도 없었다.
본사에서 밤늦게 전화가 왔다. 기자들과 술을 거나하게 나눈 상태. (당시 그 기자들은 H사의 선정 사실을 몰랐다) “Plan B를 다시 시작하자. 내일 아침 긴급회의를 열자”
새벽…택시를 타고 취해 집에 돌아오면서…눈물이 났다. 앞으로 펼쳐질 힘든 시기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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