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위기관리 교과서 중 개론서라면 항상 빠지지 않는 부분이 ‘위기의 정의와 유형’이다. 위기가 발생되는 형태를 저자마다의 시각으로 분류해서 정의하고 구별해 놓고 있다. 그 교과서를 읽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위기라고 하는 것이구나 하며 위기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된다. 일부 기업 내 위기관리 실무자들은 그런 위기 유형들을 모아 자사의 사업분야와 현황에 따라 재분류 해 위기관리 매뉴얼에 정리해 놓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간 기업들의 위기관리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바에 따르면, 교과서 내용과 같이 정형화되어 있는 위기유형은 사실 현장에서의 판단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떤 기업은 그런 기존의 위기유형 분류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상황을 위기로 정의한다. 어떤 기업은 분명히 위기유형에 정해진 형태의 상황을 맞았음에도 그것을 위기라 정의조차 하지 않는다.
왜 같은 유형의 부정 상황으로 보이는데, 어떤 기업은 그것을 위기라 하고, 또 다른 어떤 기업은 그것을 위기로 여기지 않을까? 왜 기업은 각자 생각과 판단대로 위기를 자유롭게 정의하는 것일까?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어떨 때는 위기로, 다시 어떨 때는 위기로 판단하지 않는 것일까? 왜 기업마다 위기의 정의는 다를까? 그 이유를 알아보자.
첫째, 사업분야에 따라 위기가 다르다
상식적인 이야기다. 라면을 만드는 기업과 선박을 만드는 기업은 전혀 다른 유형의 위기를 경험한다. 매출 10조원 기업의 위기와 매출 100억원 기업의 위기는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규제기관에 의해 사업 인허가가 좌우되는 기업과 자유롭게 사업할 수 있는 기업은 서로 다른 위기 기반을 가지고 있다. 글로벌 사업을 하는 기업과 지방에서 지역 사업을 하는 기업은 각자 생각하는 위기가 다르다.
둘째, 내부 철학과 원칙에 따라 위기가 다르다
같은 부정 상황을 놓고도 어떤 기업은 그것을 부정성이 낮은 수준이라 평가하고, 적극적 위기관리를 하지 않는다. 오래된 업계 관행이라 하거나, 기업의 오래된 전통이라며 그 상황을 위기로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다른 어떤 기업은 앞의 기업이 놀랄 정도로 깐깐하게 부정성을 판단해 같은 상황을 위기로 다양하게 정의한다. 이 기업은 업계관행은 물론, 당연해 보이는 업무 프로세스도 컴플라이언스라는 잣대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재검토하고, 관련된 발생 상황들을 모두 위기라 정의하고 대응한다.
셋째, 사업 전략과 방향성에 따라 위기가 다르다
어떤 기업은 무리해서 더 크게 성장하거나 시장을 넓히겠다는 계획이 없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왠만한 여론의 비판이나 소송, 환경 및 지역단체들의 항의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우리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전혀 두렵지 않다’는 식으로 위기를 바라본다. 다른 어떤 기업은 사업을 다양하게 확장해 국내와 글로벌 시장으로 계속 진입시킨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자회사들을 지속 상장하려고도 노력한다. 이 기업은 앞의 기업보다 고객과 시장 그리고 정부 규제기관 등의 눈치를 많이 본다. 자칫 조그마한 논란이나 비판이 사업 확장과 시장진입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한다. 이런 기업은 다양한 위기 유형을 정리해 대비하는 위기관리 활동에도 열심을 다한다.
넷째, 기업을 둘러싼 핵심 이해관계자들에 따라 위기는 다르다
일단 B2B(기업 대상 사업) 기업과 B2C(개인 소비자 대상 사업) 기업은 각자 핵심 이해관계자들의 특성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B2B는 굵직하고, 규제관련, 경쟁관련 부정 상황들이 많다면, B2C는 고객과 관련된 다양하고 자잘한 부정 상황들이 흔하다. 고객의 경우에도 국내 고객이 중심인 기업의 위기가 다르고, 해외 고객이 중심인 기업의 위기가 다르다. 한국에서는 별 위기라 볼 수 없는 상황이 해외 특정 국가 고객들에게는 큰 위기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다섯째, 의사결정자들의 스타일에 따라 위기는 다르다
젊고 진취적인 스타트업 대표의 위기관리 시각과, 상대적으로 연령이 높고 보수적인 대기업 대표의 위기관리 시각은 전혀 다르다. 그 각자 특징에 따라 위기에 대한 정의가 다르고, 위기관리와 관련된 의사결정 모습도 전혀 다르다. 단순하게 감정적 부침이 잦은 스타일의 경영자가 보는 위기와 안정적인 감정상태에서 담담하게 의사결정 하는 스타일의 경영자의 위기가 다르다. (사실, 현장에서는 VIP가 그 상황을 위기라 정의하셔야 비로소 위기가 된다. VIP가 위기라 정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기가 아닌 것이 된다.)
여섯째, 기존 위기관리 시스템 수준에 따라 위기는 다르다
평소 위기관리를 생각해 보지 않고, 관심이나 투자가 전혀 없던 기업에게는 돌발적 혼돈 상황이 발생되면 이는 곧장 패닉에 빠질 수도 있는 위기가 되 버린다. 흔한 예로, 언론은 그냥 광고를 싣는 곳이라 생각해 담당 기자관리를 등한시했던 기업은, 자사와 관련된 사소한 부정기사에도 큰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그 상황을 위기라 정의하기도 한다. 반면, 위기관리 시스템을 상당수준 갖추고 숙제를 꾸준히 잘 해 왔던 기업은 다른 위기관을 가진다. 앞의 기업이 고통스러워 한 부정 기사 정도는 위기로 정의하지 않는다. 다양한 대응을 실행해 상황을 관리해 버리기 때문이다.
일곱째, 현재 내부 상황과 조건에 따라 위기는 다르다
리콜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해도, 예를 들어 5년전과 현재의 위기관리는 다를 수 있다. 당시에는 해당 기업이 그 상황을 중대한 고객관련 위기로 정의했고, 선제적이고 파격적인 리콜을 실행했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수년간 계속 사업이 불안했고, 매출은 절반 이하로 폭락했다. 불행하게도 현재 다시 동일 상황이 발생했지만, 경영진은5년전과 같은 수준의 리콜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에 따라 상황을 달리 정의하고, 부분 A/S를 실시하거나, 문제 사실을 숨기며 적극적으로 위기관리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관련 상황은 같지만, 대응 가능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덟째, 위기를 반복한 기업인지에 따라 위기는 다르다
특정 위기를 자사의 역사상 처음 경험하는 기업이 내리는 위기에 대한 정의와, 특정 위기를 자주 발생시켰던 기업이 내리는 위기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게 다르다. 매번 개선이나 재발방지를 약속했음에도 동일 또는 유사한 부정 상황이 계속 발생되는 기업에게 있어 각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앞의 기업은 교과서 대로 자사의 실수에 대해 사과하고 해당 상황을 큰 위기로는 정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반복적으로 유사한 실수를 거듭한 기업은 그렇게 편하게 위기를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홉째, 사회적 트렌드에 따라서도 위기는 달라진다
사내 직원간 괴롭힘이 발생돼 논란이 되었을 때 기업이 선제적 사과로도 이내 위기관리가 가능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직장내 괴롭힘이 법적 사회적으로 중대범죄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여러 케이스에서 극단적 비판과 처벌이 이어지고 있다. 이때 자사에서도 터져버린 직장내 괴롭힘 논란은 앞의 운이 좋았던 기업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사과 커뮤니케이션으로 관리되었던 상황이, 대표이사가 물러나고, 사업적으로도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돼 버리는 중대 위기로까지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부정상황도 트렌드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위기로 정의된다.
마지막, 정확한 이유 없이도 위기는 종종 달라진다
이 부분이 실무자들에게는 가장 어렵고 힘든 위기관리 환경이 될 것이다. 지난번에 이 같은 부정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사내에서 바로 중대 위기로 정의하고 적극 대응과 배상을 해 성공적 위기관리로까지 인정받았던 경우가 있었다 치자. 유사한 부정상황이 발생되어 지난 번 같이 중대 위기로 정의하고 대응하려 하니, 사내적으로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위기대응을 해야 하는 실무자들은 왜 그때와 지금이 다른 지 잘 이해가 가질 않게 된다.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굳이 구체적 이유나 문제를 제기하기도 불편하게 되어 버렸다. 현장에서는 이렇게 별 이유 없이 종종 위기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기도 한다. 희귀한 경우가 절대 아니다.
위기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임원이나 실무자들은 절대로 위기에 대한 정의가 미리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위기의 유형도 그에 따라 마찬가지라 생각해야 한다. 그때 그때 다르고, 이 회사와 저 회사가 다르다. 이 경영진과 저 경영진이 다르고. 사업적 계획도 조건도 다르고. 이해관계자와 기업의 철학과 원칙도 다르기 때문이다. 전례와 트렌드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심지어 아무 이유 없이도 위기라는 정의는 때때로 달라진다.
이런 불확실성과 예측불가능성이 어찌 보면 위기의 특징이다. 위기란 그런 것이다. 이를 정확하게 먼저 인정해야 제대로 된 위기관리 시스템을 시작할 수 있다. 그래야 모든 것이 계속 변화하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최대한 확실성과 예측가능성을 고민해 자사 시스템에 적용시켜 보자 하는 절실한 동기가 생겨나게 된다. 우수한 위기관리 시스템을 가진 기업들은 이렇게 정확한 현상 인정과 그에 기반한 절실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위기가 정형화되어 있고, 자사의 위기에 대한 정의가 언제나 일관되어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하지만, 그런 상상에서 벗어나야 진짜 실행가능한 시스템이 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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