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부터 정부 일각에서는 위기관리매뉴얼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이 위기관리의 핵심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어디에서 그 아이디어를 차용해 왔는지 모르지만, 매뉴얼 상에 위기시 배포해야 할 보도자료 샘플, 담화문 샘플, 사과광고 및 해명광고 샘플 등등의 여러 문서 템플릿을 첨부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 사실 나도 그런 프로젝트를 리드하면서 그런 첨부물들을 찍어 냈었다.
컨설턴트들이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소용이 없어요‘해도 ‘해주세요. 그냥‘하면 해야 하는 이 업의 특성상 실제로 활용 가능성이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순순히 따랐던 거다.
위기관리시 위와 같은 해프닝이 발생하는 가능성은 그래서 아주 다분하다. 그렇다고 위기관리가 허술하게 이루어 진다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위기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커뮤니케이션 메시지가 상황과 분리되어 있다는 국민들의 느낌은 문제일 수 있다.
위기관리 시스템에서 이런 해프닝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부관계자들이 위기관리를 ‘프로세스 중심의 상황관리‘ 관점에서 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주로 ‘상황관리‘적인 관점에서 위기관리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위기관리는 ‘(프로세스 중심의) 상황관리’ 관점과 ‘(상황중심적인) 커뮤니케이션 관리’ 관점의 균형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
사실 상황을 대하는 프로세스는 별반 다름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것도 이런 상황의 변화를 예측하고 올바른 대응을 하기 위함이지만, 예상되는 상황을 관리하는 프로세스 하나 하나는 상당히 정형적이다. 구제역 발생 이후 정부관계자들이 상황을 관리할 수 있는 프로세스와 가이드라인은 언제나 정형적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민방위 차원에서 진행되는 대응활동들 또한 정형적인 것이 당연하다. 신종플루도 마찬가지고, 선박이나 항공기에서 비상시 탈출 프로세스도 마찬가지다. 학교나 직장에서의 화재대비 훈련도 그런 의미에서 항상 정형적이다. 우리가 수십 년 이상 들어온 것과 같이 ‘생화학 탄이 주변에 떨어 졌을 때, 바람을 역행하면서 달려 가까운 산등성이로 올라가 대피하라‘는 (실행 불가능 해 보이는) 가이드라인도 날마다 바뀔 수는 없다.
문제는 그런 ‘상황관리‘에 대한 정보들이 ‘커뮤니케이션 메시지‘로 그대로 ‘복사’되는 경우다. 실제 발생한 상황 하나 하나에 대한 깊이 있는 커뮤니케이션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상황은 관리하지만, 이 상황을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감정과 여론은 관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황관리를 위기관리 그 자체로 알고 있는 것은 위기관리를 절름발이로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다.
상황관리에 대한 정보를 그대로 커뮤니케이션 툴에 ‘복사’해 집어 넣는 것. 상당히 간편한 위기관리 매뉴얼 제작 기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 상황이 발생하면 당황스럽고, 성의 없고, 개개 상황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은 고민 없는 메시지들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 문제다.
원칙을 따르는 것은 형식을 따르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위기시 진정 무엇이 우리에게 중요한지를 깊이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