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불란은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위기관리에 성공하기 바라는 CEO라면 ‘일사불란’ 한 대응을 미리 상상 또는 기대하지 말자. 아무리 준비하고 연습해도 일사불란함이란 요원하다. 개인 스스로도 갈팡질팡하는데 어떻게 큰 조직이 하나로 움직일 수 있을까? 이런 막연한 기대 대신 위기대응에 문제를 일으킬 구멍을 찾는데 먼저 힘쓰자. 그게 더 현실적이다.
일사불란(一絲不亂)이라는 말이 있다. 한자 뜻 그대로 한 오라기의 실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질서나 체계가 잘 잡혀 있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는 의미다. 기업 CEO들은 위기 시 누구나 일사불란한 대응을 조직원들에게 기대한다. 하지만, 이 일사불란이라는 표현은 상상이나 기대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기 대응에 있어 기업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들은 무얼까? 왜 모두가 일사불란 함이 큰 가치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실행하지 못할까?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의 오류 때문이다. 평소에도 서로 대화 하고 협의 하고 미팅 내용을 공유하는데 있어 많은 누락과 오해들이 존재한다. 시각을 다투고 조직원들의 개인적 관여가 높은 위기 상황에서는 이런 평소 커뮤니케이션 오류들이 수십에서 수 백배 더 증가한다. 정확하게 하나의 생각을 공유하지 못하니 하나의 위기대응은 불가능해지게 마련이다.
둘째 문제는 일사불란하게 대응 하려 해도 기존 대응 체계가 그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위기관리 매뉴얼에는 “A와 같은 위기 발생 시에는 기획부서가 대응 주체가 되어 대응 지원그룹인 홍보, 법무, IR, 총무등과 협업하여 초기 대응을 실시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위기관리 매뉴얼상에는 ‘협업하여’라 되어 있을 뿐 누가 누구를 리드하라는 지시는 생략되어 있다. 기획부서장이라고 매뉴얼상에서 명기한 지원 그룹 부서장들을 통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지원부서장들을 빼고, 또는 그들의 승인을 득해 하위 팀장그룹들과 협업하게 되도 문제는 생긴다. 협력 수위와 협력 승인 기간들이 서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각 지원 부서 팀장들이 각자 부서장에게 기획부서장으로부터의 협조요청사항들을
전달 브리핑 하다 보면 시기적으로 일사불란 한 의사결정이나 대응 퍼포먼스는 이내 사라지게 된다.
셋째 문제는 일사불란함이 조직 내 개인들에게는 극도로 부자연스러움이며 제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일사불란함이란 지시사항에 대한 규격화된 실행을 의미한다. 물리적 대응 방식과 대응주체 그리고 대응 시간대에 정확한 제한을 두고 지정된 결과를 예상 그대로 도출해 내야 하는 부담을 내포한다. 당연히 일사불란함에 대한 강조가 실무자 개인들로서는 거부감이 들게 마련이다. “왜 IR팀에서는 오전 12시 이전에 문제를 해결했는데, 홍보팀에서는 지시 사항을 오후 3시가 되도록 실행하지 못하고 있나? 이렇게 해서 일사불란 함이라고 할 수 있겠나?”하는 핀잔을 듣게 되는 걸 실무자들은 내내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렇듯 CEO에게는 일사불란함에 대한 막연한 추구보다 차라리 평소 위기대응에 있어 어떤 빈 구멍이 있을까를 발견해 하나 하나 그 구멍을 메워 나가는 체계적인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하겠다. 매뉴얼상에 있는 문제를 발견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개선 활동들에 시간을 투자해도 좋다. 실행 부서 별로 실제 대응 역량들을 세부 점검해 부족한 부분들을 강화 지원해주는 프로젝트도 좋다.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 위기 시 외부에서 우리 회사를 지원해 줄 이해관계자 그룹들을 고민하고 그들을 위해 투자해 보는 활동도 좋겠다. 평소 내부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과 정확성을 강화하는 노력도 좋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기업 위기관리 체계의 가장 공통적 문제점이다. 이에 대한 오너십 부여와 강조도 좋다.
물론 기업 CEO로서 일사불란함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는 없겠지만, 위와 같은 소소한 준비와 체계 개선 및 투자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큰 흐름으로 조직을 움직이는 기초 체력이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뒤를 바꾸어 생각해 일사불란함을 해치는 체계적인 부분들을 먼저 개선해 장애물들과 험로들을 미리 개척해 놓는 것이 이롭다는 이야기다. ‘악마는 디테일 속에 숨어 있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s)’는 이야기를 한다. 진정한 일사불란함을 위해서는 그 일사불란함을 훼손하는 디테일들을 찾아 하나 하나 개선 해 나가는 준비와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막연한 기대만큼 위기 시 큰 상처를 주는 것이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