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문제는 뒤늦은 깨달음(각성)과
연계된 것이다. 커런이 제공하는 역사는 정보적인 것으로, 이것은 (필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 잘 못 인식하고 간과한 학자들의
연구업적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러나 필자의 주장은 이것이 (커런이
그렇게 비판하는) ‘신수정주의’영향이 수용자 연구 영역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변형시키고, 따라서 누가 그리고 무엇이 이 역사에 중요한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변형시켰다고 하기 전에, 커런과 같은 역사가로 하여금 이제 이러한 ‘신수정주의’ 연구가 뒤늦은 깨달음(각성)으로
예견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연구들을 두드러지게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역사로
되돌아가 재해독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변형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대중문화와 문화연구, p.513]
오늘 하루 종일 이런 류의 문장 수백 개를 읽고 있다. 무슨 한국말이 이렇게 어려울까? 지난번에도 썼지만 이 책을 번역하신 교수님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다.
“교수님은 이해를 하십니까?”
이런 류의 문장을 해석, 재해석 하면서 나는 소중한 potential
professional fee들을 날려 버리고 있다. 이 책이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재화와
능력을 낭비하게 하는 인생의 적 아닌가?
일부 한국 지성들의 어색함을 보는 듯 해서 더 찝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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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sponses to 찝찝한 문장들에 다시 파묻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