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 기고문]
사과의 원칙에 맞서는 변명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기업이나 셀럽들이 큰 문제와 마주했을 때 가장 흔히 선택하는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바로 ‘사과’다. 상당히 많은 문제들이 사려 깊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이 ‘사과’는 곧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자체 또는 전부로 까지 오해되기도 한다.
물론 적절한 ‘사과’없이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모든 위기 상황에서 ‘사과’가 필수적인가 하는 것에는 논의가 필요하다. 무조건이라는 개념은 전략적이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과의 원칙에 대해서도 ‘무조건’이라는 기준이 있다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 무조건적 원칙을 따를 때 생기는 추가적 문제에 대해서도 좀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업이나 조직의 사과라는 것이 종교적 고해성사나 개인간 사과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기 때문에, 사과의 원칙에 대한 보다 조심스러운 이해와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에도 여러 기업과 셀럽이 연이어 사과문을 공개하고 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그들 대부분이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사과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일부 개인 셀럽의 경우 자필 사과문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 주요 트렌드가 되겠다. 반면, 기업들의 경우 예전 같은 일간지 지면을 통한 사과광고의 빈도는 대폭 줄었다. 최근 들어서는 대대적으로 기자회견을 자청해 경영진이 고개를 숙이는 사과 퍼포먼스도 점차 줄어가는 느낌이다. 사과가 이제는 일반화되었고, 하나의 통과의례와 같이 변해 버렸다고 볼 수 있겠다.
이번 글에서는 기존의 대표적 사과의 원칙에 대한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실무자들의 변명 또는 반론을 모아 정리해 본다. 무조건적 사과의 원칙 도그마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직접 피해자에게 구체적으로 사과하라?
맞다. 피해자에게 직접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과하라는 말은 적절하다. 두리뭉술하게 사과하는 척을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운전사를 폭행한 회장님이 문제를 제기한 운전사를 찾아가지 않고, 먼저 기자회견을 열어 전혀 상관없는 기자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황당한 케이스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문제를 제기한 원점(source)은 가해자를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일단 만나서 마음을 풀자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가해자의 순진한 생각이다. 문제를 제기한 원점은 일종의 원한과 복수심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원한과 복수심이 없었으면 아예 문제를 제기하거나 폭로하지 않는다. 대신 그전에 상대를 찾아가 직접 사과를 요구하고, 용서하려 노력한다. 그런 일련의 노력들이 실패했거나, 하기 싫었기 때문에 원점은 원한과 복수심을 가지게 된다.
그런 감정 수준의 원점에게 가해자가 직접 찾아가 사과를 한다는 것은 이상적이긴 하지만, 가능한 경우는 적다. (원한이나 복수 감정이 아주 약한 원점의 경우에만 일부 가능)
일단 만나기 힘든 원점을 대상으로 구체적으로 사과하는 것도 어떻게 현실적이 될 수 있을까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나주지 않고 가해자를 피하는 원점에게 대체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인 사과를 전달할 수 있을까? 가해자로 폭로 된 모 기업 오너 자제의 경우 피해자를 찾아가 빈집 문에 쪽지 메모를 꽂아 놓기도 했다 하던데, 그런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운 좋게도(?) 원점이 만나주겠다, 사과를 들어 보겠다 하는 경우라면 ‘피해자에게 구체적으로 사과하라’는 원칙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원점이 그 모든 것을 꺼리는 경우에 가해자는 어떤 차선책을 실행해야 할까? 바로 대외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옵션 뿐이다.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에게 해당 문제에 대한 자사나 자신의 입장과 사과 메시지를 공개하는 실행이 그 때문이다.
여기에서 어려움은 또 있다. 원점이 아닌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에게 사과 할 때 얼마나 문제관련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고민이다. 자신과 원점 밖에 모르는 아주 민감한 내용까지 충실하게 담아야 하는가 하는 가에는 여러 반론이 있다. 지나치게 구체적일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왜 문제 당사자가 아닌 공중이나 이해관계자에게까지 그런 구체적 내용을 설명해 가며 스스로 논란을 키워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사실 답이 부족하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한 후 사과하라?
일단 큰 문제를 제기한 원점이 만족할 만한 가해자의 공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희귀하다. 심지어 가해자가 종교적 회개와 스스로를 향한 형벌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피해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은 없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구나 그 원점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가해자가 제대로 공감할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 원점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고통은 절대로 정확하게 표현하거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섣부른 가해자의 공감은 원점의 더욱 더 큰 분노만 자아낸다. 이해되지 않는 고통에 대한 어설프면서 구체적인 가해자의 공감 커뮤니케이션은 곧 폭력이다.
흔히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면 공감이 떠오른다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기업이나 조직 그리고 일부 셀럽은 그럴 수 있는 주체들이 아니다. 다양한 여러 변수들과 주변 조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역지사지는 개인적 마음으로는 가능하지만, 조직 차원에서 실체적 커뮤니케이션으로 나타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사과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비판 받는 기업이나 조직의 경영진들이 모두 비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가해자는 대부분 피해자의 고통을 공감할 수 없다. 이전에도 없었고, 문제가 불거진 이후에는 더욱 더 공감이 어렵다. 그 대신 문제 제기를 통해 자사 또는 자신에게 피해를 준 원점을 도리어 가해자라 생각하며, 자신의 고통에 스스로 공감하기 시작할 뿐이다. 제대로 된 공감의 형성이 이렇게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도 어림짐작 한 공감을 절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일반적인 공감 수사로 자사 또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것이 나을까? 어떤 것이 최악일까 예상하여 최악을 피하는 것이 위기관리인데, 어떤 옵션이 최악을 피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기업이나 조직 그리고 유명 셀럽의 경우 ‘공감’은 적절한 배상 또는 합의방식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리적이나 정서적 공감은 완전하게 불가능하더라도, 크고 적극적인 배상액이나 합의방식을 제시한다면 일정 수준 이상 공감으로 주변에게 이해 받게 된다. 이 때도 피해자가 이해하는가는 또 다른 주제다.
조건 없이 사과하라?
개인적으로 사과할 때 이렇게 조건을 달아 사과하는 것은 일종의 비아냥에 가까워 피해야 할 금기인 것이 맞다. 개인적으로 사과를 받아주려 하던 피해자도 빈정 상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그러나 원점이 만나주지 않을 때나, 연락할 방법이 없거나,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만나주신다면 용서를 빌겠습니다” 하면 안 될까?
더구나 지금 사과가 여러 상황으로 여의치 않아 일단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에게 자사 또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사과 형식이라면 더욱 더 이런 의지의 표현은 필요하지 않을까? 충분히 상대를 만나 조건 없이 사과할 수 있는데,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사과의 입장을 표현하는 경우가 문제이지, 그런 조건을 토로하는 경우 자체가 문제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말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표현 쓰지 마라?
그러면 어떤 표현을 써야 하나. 사과드리면서 용서를 구한다는 표현을 빼고 어떤 사과가 가능한가. 일부에서는 용서해야 할지 말지는 피해자가 판단할 일이니 자꾸 용서를 구한다 하는 것은 2차 피해를 의미한다 하는데, 그런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는 전체적 사과의 맥락과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수사학적으로 표현 단위 하나 하나를 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고, 용서를 받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게다가 상당수의 원점은 용서를 해 줄 의지가 희박한데, 용서를 빌지도 못한다면 그 진짜 용서는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종교적인 회개와 용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처벌이 현재 기업이나 조직 상황에서 가능할 것인가? 자신이 사용한 제품에 이물질이 나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피해자가 회사에 용서를 받기 위해 제시한 조건이 과도하다면 이를 필히 시행해 진짜 용서를 구해야 할까? 이물질에 책임지고 대표이사가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모든 일간지 전면에 사과 광고를 싣고, 매출의 1프로를 자신이 정한 기관에 기부하라는 요구를 들어주면서 진짜 용서를 얻어내야 할까? 조건 없이 용서를 구하려면 말이다.
대중은 가해자에게도 사과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최근 들어 발견한 아주 새로운 사과의 원칙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주장은 만약 대중이 가해자에게 사과를 강요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가해자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상황은 가해자에게 기본적으로 위기상황이 아니다. 대중이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을 때나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항상 문제의 주체나 가해자에게 사과를 강요하게 되어있다. 이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는 이를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좀더 나은 사과를 꾀한다. 대중의 압력 처럼 강력하고 위협적인 위기관리 동력이 없다.
위와 같은 주장은 일견 대중의 압력에 밀려 기업이나 조직 그리고 셀럽들이 대충대충 사과를 하는 상황을 지적했다고 본다. 하지만, 현실적 대중이나 정상적 위기관리 주체에게는 해당하는 원칙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의 사과 압력은 더 강해져야 하고, 보다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나 조직 그리고 셀럽 스스로 제대로 된 위기관리를 하게 된다.
여러 사과의 원칙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현실적이라 생각하고 공감 큰 사과의 원칙은 이것이다. “제대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은 크게 사과해야 할 일을 만들지 않는다.” 여러 전문가들은 사과의 원칙을 ‘제대로 사과할 줄 모르는 기업, 조직, 사람’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나마 좀 더 나은 사과를 하도록 하는 조언이다.
하지만, ‘제대로 사과할 줄 하는 기업, 조직, 사람’에게는 그 원칙이 전략적 조언이 아닌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주어진 상황과 여러 주변 조건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석하고 고안해 낸 사과가 훌륭한 사과다. 원점이 마음을 바꾸고, 용서해 주고, 결론적으로 다같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류의 동화에 기반한 사과가 과연 현실에 존재하는가는 각자 판단할 일이다. 사과는 원칙 보다는 전략의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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