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관리 백팔수(百八手): 20편] 매뉴얼은 최소화하라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20년간 여러 기업에서 자사를 위한 위기관리 매뉴얼을 만들어 보유하는 노력들이 이어져 오고 있다. 초기 정부부처와 공공기관이 중심이 되어 재난 및 사고, 논란과 같은 국가 행정 차원의 위기관리 매뉴얼이 개발된 것과 흐름을 같이 한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미 자사만의 위기관리 매뉴얼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 수준과 유용성에 있어서는 누구도 자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부는 상당히 많은 인력이 오랜 기간 동안 큰 예산을 투입해 매뉴얼을 제작했음에도 만족스러워 하지 않는다.
다른 일부는 경쟁사나 유사 기업의 매뉴얼을 자사의 것으로 변용 해서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위기 시 해당 매뉴얼이 작동할 수 있을까에 대해 궁금해 한다. 그 외 기업들은 구성원들이 위기관리 매뉴얼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위기관리 매뉴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럴까? 전반적으로 위기와 위기관리 그리고 위기관리 매뉴얼에 대한 조직내 관심이 다른 업무들에 비해 적다는 것이 대표적인 이유다. 그러나 위기를 반복적으로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위기관리 매뉴얼에 대한 만족도나 관심이 계속 떨어져 있다면 분명 문제다. 무엇보다도 그런 기업들은 전사적으로 위기관리 매뉴얼에 대한 인식이 잘 못되어 있다.
위기관리 차원에서 위기관리 매뉴얼은 그저 ‘시작’ 일 뿐 ‘끝’이 아니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상당수 기업들은 자사가 위기관리 매뉴얼을 보유하고 있으면 위기관리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완성되었다고 까지 착각한다.
이런 생각은 마치 집 책장에 비행기 조종 매뉴얼이 꽂혀 있으니 우리 식구는 누구나 지금이라도 비행기를 조종해 하늘을 날 수 있다 생각하는 것과 같다. 매뉴얼은 향후 지속적인 훈련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매뉴얼을 곧 ‘시작’이라고 한다.
다른 종류의 오해는 위기관리 매뉴얼은 두꺼울수록 훌륭하다는 생각이다. 모든 위기관리 업무직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담아 놓은 수 천장 두께의 매뉴얼만 꼼꼼히 읽으면 위기가 관리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그 두꺼운 성경을 완독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중에서 또 성경 문구를 첫 장 첫 절부터 마지막장 마지막 절까지 암기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매뉴얼은 담당자들이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암기 할 수 있는 두께를 넘어서는 안된다. 매뉴얼을 오랜 시간 공부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일부에선 위기 시 위기관리 매뉴얼을 한 장 한 장 들쳐 보면서 따라하면 위기를 관리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가전제품 작동 매뉴얼을 상상하는 듯하다. 참으로 한가한 생각이다.
일단 위기가 발생했을 때 위기관리위원회 구성원들이 위기관리 매뉴얼을 놓고 페이지를 찾는다면 이미 대응 역량에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위기관리 매뉴얼은 이미 그들 전부의 머릿속에 들어가 흘러가야 한다. 평시 훈련이 이를 위함이다.
위기관리 매뉴얼은 쉽게 상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매뉴얼은 지속 업데이트 되어야 한다. 이를 토대로 반복 훈련되고 검증되야 한다. 각자 머릿속에서 움직여지는 분량과 수준이 정상이다.
일본의 모 대형 백화점의 기본 위기관리 매뉴얼은 총 세 페이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우리 백화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기유형과 이에 대응할 비상연락망(위기관리팀) 그리고 기본적인 대응 프로세스로 구성되어 있다. 일면 극단적이지만 교훈은 있다.
반면 우리나라 기업이나 정부기관의 위기관리 매뉴얼은 일단 그 규모로 다른 나라 매뉴얼들을 압도한다. 구성이나 서술에 있어서도 불필요하게 과도한 서술이 많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위기관리 매뉴얼을 전사적 매뉴얼 버전과 각 부서별 실행 매뉴얼 버전으로 나누어 부서별로 업데이트 하게 만든 체계는 극히 드물다.
전사적 위기관리 매뉴얼의 경우 물론 기업의 유형과 니즈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최대 50페이지를 넘길 이유가 없다. 50페이지가 넘어가는 전사적 위기관리 매뉴얼에는 꼭 중복과 반복이 있다. 이는 매뉴얼을 개발하는 임직원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일 뿐, 실제적으로는 별반 유용함이 없다.
물론 전사적 위기관리 매뉴얼의 부속 챕터로 각 부서별 기본 대응 업무 매뉴얼은 자세하고 두꺼워도 괜찮다. 부서별로 직원들을 세세하게 훈련하기 위함이라 그렇다. 이 또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되고, 부서내 훈련을 통해 검증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첨부 챕터로 각종 서식과 준비 문구, 문서, 리스트, 정보 패키지들이 잘 정리되는 것은 좋다. 그간 자사에게 발생했던 위기사례들을 상황과 위기관리 기록을 기반으로 백서형식으로 지속 첨부해 반면교사를 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분량이나 수준에 대한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대표이사, 임원들, 팀장들이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어떤 매뉴얼 포맷도 상관없다. 전사적으로 이해되고 살아있는 얇은 매뉴얼이 아무도 들쳐 보지 않는 먼지 쓴 두꺼운 매뉴얼보다 낫다.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가지기 위해 만든 매뉴얼이 두껍기만 하다는 건 없는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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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용민은 국내 최초로 설립된 위기관리 전문 컨설팅사 스트래티지샐러드의 대표 컨설턴트다. 200여 이상의 국내 대기업 및 유명 중견기업 클라이언트들에게 지난 20년간 위기관리 컨설팅과 코칭, 자문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기업 위기관리 전문서적 [소셜미디어시대의 위기관리], [기업위기, 시스템으로 이겨라], [1%, 원퍼센트], [기업의 입]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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