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더피알=정용민|위기관리 컨설턴트에게 “모든 기업에 위기관리와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이 반드시 필요한가”라고 물으면, 대답은 대개 정해져 있다. “그렇다. 예외는 없다.” 그러나 현장은 이 대답과는 약간 다르다. 지방 기업과 중소기업의 대표들은 이 말을 들으면 고개를 돌린다. 그들에게 위기관리란 대기업의 사정이고, 전국적 명성을 가진 회사의 숙제일 뿐이다. 그들은 위기관리를 몰라서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해 관심을 두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위기관리는 잃을 것이 많은 대기업만의 것일까.
대기업은 소방서, 중소기업은 소화기 한 대
위기관리를 두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나란히 놓아 보면 그 격차가 선명하다. 대기업에는 위기가 오기 전부터 상비군이 있다. 전담 홍보실과 법무팀, 대외협력 조직이 상시로 돌아가고, 수백 페이지짜리 위기관리 매뉴얼과 상황별 대응 시나리오가 서랍에 준비되어 있다. 정기적으로 모의 훈련과 미디어 트레이닝을 돌리고, 외부의 로펌과 PR 회사, 모니터링 업체와도 평소에 계약을 맺어 둔다. 위기가 터지면 즉시 가동되는 하나의 시스템이 이미 서 있다.
중소기업의 사정은 다르다. 대표 한 사람이 홍보실이자 법무팀이고, 총무이자 대외협력 담당이다. 문서로 정리된 매뉴얼은 없고, 대부분의 판단이 대표의 머릿속과 즉흥에 기댄다. 위기를 걸러 줄 견제 장치도, 대신 말해 줄 창구도 없다. 외부 전문가는 위기가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검색창에 이름을 쳐 넣기 시작한다.
차이는 조직과 문서에만 있지 않다. 의사결정의 구조가 다르다. 대기업의 위기 대응은 여러 사람의 검토와 견제를 거치며 다듬어지지만, 중소기업에서는 대표 한 사람의 판단이 그대로 회사의 대응이 된다. 잘못된 결정을 걸러 줄 장치가 없으니, 대표의 감정 섞인 한마디나 즉흥적 지시가 곧바로 밖으로 나가 버린다.
노출의 성격도 다르다. 대기업은 늘 대중과 언론의 감시 아래 있지만, 그만큼 위기에 반응하는 근육도 단련되어 있다. 반면 평소 조명 밖에 있던 중소기업은 어느 날 갑자기 카메라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 빛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이 격차만 보면 ‘중소기업에 대기업식 위기관리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 맞다. 대기업이 24시간 대기하는 소방서를 갖췄다면, 중소기업에 똑같은 소방서를 지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그렇다면 소방서를 지을 수 없는 회사는, 위기관리를 아예 접어도 되는 것일까?
규모에 비례하는 것은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결론부터 말하면, 위기관리가 대기업만의 것이라는 그 생각은 절반은 맞다.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그 중에서도 언론과 대중을 향한 커뮤니케이션의 투자 규모는 그 기업이 가진 명성 자산의 크기에 비례한다. 전국적 또는 글로벌 접점을 가진 대기업과 공개된 이미지가 거의 없는 지방 중소기업이 똑같은 수준의 상시 조직과 예산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잃을 명성이 클수록 그것을 지키는 데 더 많은 자원을 쓰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배분이다.
위기는 대체로 그 회사의 몸집에 맞춰 온다. 사업의 범위와 영향력을 넘어서는 위기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작은 회사에는 작은 위기가, 큰 회사에는 큰 위기가 온다. 이 구조 위에서 보면 규모에 맞춘 대비가 상식이고, 대기업식 위기관리 체계를 모든 기업에 강요하는 것은 분명한 과잉이다. 다만 규모에 비례하는 것은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이지 ‘위기관리’ 그 자체는 아니다. 안전과 법규, 현금흐름과 핵심 인물의 리스크를 미리 관리하는 일은 회사 규모와 무관하게 거의 모든 기업에 해당한다.
한꺼번에 다 잃을 확률에 주목
최악의 위기는 그 회사의 규모와 범위, 영향력을 훌쩍 뛰어넘는 형태로 폭발한다. 몇 년 전, 한 지방 산업단지의 배터리 공장에서 큰불이 나 다수의 근로자가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그때까지 그 회사의 이름을 아는 국민은 거의 없었지만, 사고는 순식간에 전국의 헤드라인을 뒤덮었다. 최근에도 직원의 사망 사고 뒤 대표가 사과에 나섰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오가던 정황이 드러나 전국적 지탄을 받은 지역 기업이 있었다. 이런 위기는 ‘위기는 몸집에 맞춰 온다’는 상식을 단숨에 배신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우리는 그럴 리 없다’는 마음이다. 규모를 초과하는 위기의 확률은 낮지만 결코 제로는 아니다. 대기업은 몸집을 넘어서는 위기를 맞아도 자본과 신뢰, 시간이라는 여력으로 버텨 낸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그런 위기 단 한 번에 사업 자체가 통째로 사라진다. 잃을 것의 절대 크기는 작아도, 그 한 번의 손실률은 100%가 되기 쉽다. ‘잃을 것이 적다’가 아니라 ‘한 번 맞으면 남은 전부를 잃는다’가 실상이다.
명성 없는 회사에도, 생존 위한 ‘관계 자본’은 소중
‘우리는 이미지도 명성도 없으니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대중적 명성이 없을 뿐, 지방 중소기업도 반드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매출을 좌우하는 소수의 핵심 거래처, 오래 쌓아 온 지역사회의 평판, 인허가와 감독 관청과의 관계, 은행 여신, 그리고 직원과 그 가족의 생계다. 이를 ‘관계 자본’이라 부른다. 위기는 바로 이 소수의 집중된 관계 안에서 터진다. 명성 자산이 없다고 잃을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은 자산의 종류를 잘못 읽는 것이다.
게다가 ‘무명(無名)이라 안전하다’는 전제 자체도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리뷰 앱과 지역 커뮤니티, 짧은 영상 한 편의 시대에는 평생 대중 이미지를 관리해 본 적 없는 지방 소상공인을 하루아침에 전국적 공개 위기에 노출시킨다. 오히려 평시 쌓아 둔 신뢰가 없는 기업일수록, 단 한 번의 확산 앞에서 더 쉽게 무너진다.
정작 필요 없는 것은 ‘우리는 예외’라는 무관심
이미 지방과 중소기업 대표들이 위기관리에 무관심하다는 현실은, 그들에게 위기관리가 필요 없다는 근거처럼 보인다. ‘대기업식 거대한 체계는 필요 없다’는 판단까지는 옳다. 그러나 거기서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로 건너뛰는 순간, 옳은 전제가 틀린 결론으로 뒤집힌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 없는 것은 위기관리라는 준비가 아니라, ‘우리는 예외’라는 무관심이다. 과도한 위기관리가 필요 없는 기업은 있을 수 있어도, 무관심해도 되는 기업은 없다. 무관심은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아니라 ‘준비하지 않기로 내린 결정’이다. 그리고 그 결정의 대가는, 아무 관심이 없는 기업에게 가장 가혹하게 돌아온다.
중소기업에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대비와 태도
답은 ‘필요하냐 아니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무엇을, 누구를 향해, 얼마나’라는 비례의 문제다. 중소기업에 필요한 것은 대기업식 미디어 워룸도, 두꺼운 매뉴얼도 아니다. 큰돈과 인력을 들이지 않고도 갖출 수 있는 네 가지면 충분하다.
첫째, 최소한의 예방이다. 여기서 예방이란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하고 있는 업무 위에 ‘위기의 눈’ 하나를 얹는 일이다. 현장 안전 점검에서 반복된 지적 사항을 더는 미루지 않는 것, 인허가와 신고, 환경과 노무처럼 ‘설마 문제 되겠어’ 하고 넘겨 온 기본 규정을 다시 확인하는 것, 그리고 자금 흐름에 최소한의 여력을 남겨 두는 것이다. 위기는 종종 사고 그 자체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자금 경색으로 회사를 무너뜨린다.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핵심 인물 리스크다. 오너 한 사람, 혹은 대체 불가능한 기술자 한 사람에게 회사가 과도하게 기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사고나 구설, 갑작스러운 이탈이 그대로 회사의 위기가 된다. 그 의존을 조금씩 분산해 두는 것도 훌륭한 예방이다.
둘째, 소수 핵심 이해관계자와의 평시 관계다. 종이 한 장을 꺼내, 우리 회사의 생사를 실제로 쥐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적어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대개 그 수는 다섯을 넘지 않는다. 매출의 큰 몫을 차지하는 한두 거래처, 오래 관계를 맺어 온 지역사회와 감독 관청, 자금을 대는 주거래 은행, 그리고 회사를 함께 굴리는 직원들이다. 이 좁은 명단이 곧 위기 시 우리를 살리거나 무너뜨릴 사람들이다.
평시에 이들과 신뢰를 쌓아 둔 회사는, 위기가 닥쳐도 ‘설명할 창구’와 ‘한 번 더 기다려 줄 여지’를 얻는다. 반대로 평소 소원했던 관계는 위기의 순간 가장 먼저 등을 돌린다.
셋째, 최악의 시나리오 한두 개를 미리 그려 보는 일이다. 거창한 예측이 아니다. 우리 업종에서 다른 회사가 실제로 겪었던 사고를 가져와, ‘그 일이 우리에게 똑같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를 한 번 대입해 보는 것이다. 학생이 기출문제를 풀어 보듯, 남의 위기는 우리의 가장 좋은 예상 문제다. 그렇게 두어 개의 상황을 정해 두었다면, 그때 누가 회사를 대표해 말할지, 무엇을 가장 먼저 할지, 반대로 무엇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지를 종이 한 장에 적어 두면 된다.
말하는 창구를 하나로 모으고, 사실을 먼저 확인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을 가장 앞에 두는 것. 이 몇 줄의 약속이 실제 위기의 첫 순간을 좌우한다.
넷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겐 그런 일이 없다’는 마음을 버리는 일이다. 이것은 돈도 조직도 필요 없는, 가장 값싸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준비다. 확률이 낮다는 것과 아예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이 태도 하나가 앞의 세 가지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스위치가 된다. 그 마음이 닫혀 있으면 어떤 예방도, 어떤 관계도, 어떤 시나리오도 시작되지 않는다.
무관심은 전략이 아니다
모든 기업이 대기업처럼 위기관리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외는 없다’는 만능 필수론은 과장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필요 없다’는 무관심 역시 똑같이 위험한 과장이다. 진짜 답은 두 극단 사이에 있다. 규모에 맞는 최소한의 대비, 그리고 ‘그럴 리 없다’는 마음의 폐기다. 그것은 소방서를 지으라는 요구가 아니라, 소화기 한 대를 곁에 두라는 부탁이다. 위기관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거대한 시스템의 부재가 아니라, 준비하지 않기로 한 그 무관심이다. 지방의 아주 작은 회사라도, 그 한 가지만큼은 예외일 수 없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THE PR에 연재한 [PR TALK] 칼럼입니다. 원문: THE 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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