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이 글은 스트래티지샐러드 「위기관리 용어 사전」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 보기
위기관리의 전제란 기업이 선의의 행위자로 행동하고 있고, 경영진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충실의무를, 직원이 성실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조건을 말합니다. 위기관리의 원칙과 프로세스, 그리고 컨설턴트가 내놓는 조언과 전략은 모두 이 조건 위에서 설계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조건은 법령이 정한 의무를 지켰다는 뜻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해 왔다는 뜻입니다.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 사안에 위기관리의 원칙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 그것은 관리가 아니라 은폐가 됩니다.
선의는 착함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의는 도덕적 선함이 아닙니다. 두 가지 조건으로 정의되는 기능적인 상태입니다.
첫째는 해악을 기획하지 않는 것입니다. 위기를 의도적으로 설계하거나,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 선택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둘째는 문제를 인지한 시점부터 즉시 바로잡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선의는 이 둘이 결합할 때만 성립합니다. 의도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선의가 아닙니다.
이 정의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위기의 발생 여부는 그 회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기준이 되는 것은 위기 앞에서 선의의 행위자로 움직였는가입니다.
전제는 세 층위로 나뉩니다
선의는 회사 전체의 지위이지만, 회사라는 법인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경영진의 결정과 직원의 실행을 통해서만 움직입니다. 그래서 전제도 하나의 덩어리로 확인할 수 없고, 세 층위에서 나누어 확인해야 합니다.
세 주체는 각각 다른 의무를 지고 있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 각각 다른 항목에서 확인됩니다.
| 주체 | 전제 | 위기가 발생했을 때 확인되는 것 |
|---|---|---|
| 기업 | 선의의 행위자로 행동함 | 해악을 기획하지 않았는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준과 절차를 갖추어 두었는가 위험 신호가 위로 올라오는 경로를 만들고 불이익 없이 쓰이게 했는가 직원을 방패로 세우지 않고 보호했는가 |
| 경영진 |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충실의무 | 평시의 의사결정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충실하게 처리되었는가 사적인 말과 행동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았는가 감지되거나 보고된 위기 요소를 적시에 처리했는가 결정의 정보와 대안과 이유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가 |
| 직원 | 성실의무 | 맡겨진 분야와 영역의 업무를 기준대로 처리했는가 현장에서 알게 된 사실을 제때 회사에 전달했는가 |
여기에서 말하는 회사의 이익에는 평판이 포함됩니다. 재무적으로는 이득이 되는 결정이 회사의 이름을 깎는다면, 그것은 회사의 이익을 위한 결정이 아닙니다. 경영진 개인의 말과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적인 자리에서의 발언이나 처신이라도 회사의 자산을 깎는 순간 사적인 일로 남지 않습니다.
세 층은 서로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경영진이 아무리 신중해도 현장의 사실이 올라오지 않으면 그 신중함은 틀린 사실 위에서 작동하고, 직원이 아무리 성실해도 회사가 기준과 절차를 갖추어 두지 않았다면 개인의 성실로 메울 수 있는 범위를 넘습니다.
특히 위기의 상당수는 특별한 사건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조금씩 밀리고 생략된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회사가 직원을 방패로 세우거나 책임을 아래로 내려보내는 순간, 그 직원은 우리 편이 아니라 회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해관계자가 되고 동시에 가장 유력한 제보자가 됩니다.
법이 정한 선은 바닥이지 천장이 아닙니다
위의 세 가지 전제는 각각 법에 대응하는 최소한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업에는 준법통제기준을 마련하라는 상법 조항이 있고, 경영진에게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충실의무가 있으며, 직원에게는 신의성실 원칙에서 도출되는 성실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켰다는 사실만으로 전제가 갖추어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위기의 성패를 가르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법원이 아니라 공중이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사안이 위기가 되는 경우는 흔합니다. 절차를 다 지켰고 위법도 없었는데 여론이 돌아서는 상황입니다. 이때 위법 사항이 없다는 해명을 앞세우면 위기는 대개 더 커집니다. 공중이 묻고 있는 것은 적법했느냐가 아니라 마땅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함의 범위는 회사마다 다르고 사안마다 다릅니다. 그 회사가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신뢰의 크기, 사업이 다루는 위험의 성격, 이해관계자가 대신 감수하고 있는 위험의 크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법령은 그 가운데 사회가 최소한으로 합의해 문서로 옮겨 놓은 부분일 뿐입니다. 법적 방어선을 위기관리의 목표선으로 삼으면, 지키기는 하겠지만 그 자리에서 신뢰가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전제를 지키는 일이 곧 위기관리입니다
전제가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이 터졌다면, 그것은 위기 사안이 아니라 스스로 불러들인 경영의 실패입니다. 경영의 실패에는 위기관리의 원칙과 도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 전제가 지켜지고 있는 회사에서는 위기가 잘 발생하지 않습니다. 위기관리의 본령이 발생 가능한 위기를 미리 예상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해 두는 것이므로, 전제를 지키는 일 자체가 이미 위기관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준비는 위기가 닥친 뒤에 급히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운이 따르지 않아 위기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과가 갈리는 것은 그때입니다. 전제를 지켜 온 회사에는 설명할 것이 남아 있고, 지키지 않은 회사에는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기 상황에서 회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평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해 왔다는 사실을 정확하고 충분하게 입증하는 커뮤니케이션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하는 실행입니다. 실행 없는 입증은 변명이 되고, 입증 없는 실행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두 가지가 함께 성공할 때 위기관리가 완성됩니다.
근거로 삼은 표준과 자료
상법 제382조 제2항 · 제382조의3 · 제542조의13
민법 제2조 · 제681조
이사의 충실의무 조항은 2025년 개정으로 그 대상이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되었습니다. 본문에 인용한 조항은 전제의 최소선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며, 위기관리가 요구하는 수준은 그보다 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