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위기관리 매뉴얼이란 무엇인가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이 글은 스트래티지샐러드 「위기관리 용어 사전」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 보기

살아 있는 위기관리 매뉴얼은 조직 구성원이 그 내용을 알고 있고, 정기적으로 고쳐지고 있으며, 훈련·시뮬레이션을 통해 실제로 검증되고 있는 매뉴얼을 말합니다. 문서의 두께나 완성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매뉴얼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매뉴얼이 작동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보유와 활용은 다릅니다

위기관리 매뉴얼은 없어도 문제고 있어도 문제인 계륵 같은 존재입니다. 없는 상태에서 위기가 터지면 매뉴얼도 없이 대응했다는 비판이 따라옵니다. 있는 상태에서 위기가 터지면 매뉴얼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거나 매뉴얼이 낡아서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따라옵니다.

여기서 보유라는 말에 주목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보유가 곧 활용이나 참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홍보실을 포함해 유관 부서를 통틀어 매뉴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사람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위기관리 매뉴얼의 유효 기간은 제작 후 딱 여섯 달뿐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위기가 터진 뒤에야 매뉴얼을 펼치기 시작하는 것은, 비행기가 추락하는 중에 기장이 매뉴얼을 처음 여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언제나 누가입니다

준비의 중심은 무엇이 아닙니다. 누가와 어떻게입니다. 매뉴얼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은 늘 누가입니다.

위기관리를 준비하자고 하면 곧바로 팀을 짜자, 매뉴얼을 만들자, 훈련·시뮬레이션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부 무엇에 대한 논의입니다. 그러다 예산 앞에서 막힙니다. 순서를 바꾸어야 합니다. 누가 판단하고 누가 실행하는지가 정해지면 무엇은 그 뒤에 자연히 따라옵니다.

결국 위기관리는 매뉴얼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합니다. 위기관리에 실패한 사례를 들여다보면 매뉴얼 자체보다 그것을 관리하고 개선하는 사람이 더 근본적인 문제였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현실성은 문장이 아니라 자원에서 나옵니다

매뉴얼이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현실성이 무엇인지는 잘 정의되지 않습니다.

매뉴얼이 반영해야 할 현실성은 실행에 쓸 수 있는 유무형 자산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산, 인력, 장비, 설비, 협력 체계입니다. 고층 건물 화재에 고가 사다리와 헬리콥터를 쓰라고 적어 두었는데 그것을 가진 조직이 없다면, 그 매뉴얼은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매뉴얼에 위기 시 특정 공간을 확보하고 설비를 갖춘다고 적고 그 책임을 총무팀으로 지정했다고 해 보십시오. 소집 명령 뒤 한두 시간 안에 모든 설비를 갖추라는 구절을 읽은 총무팀장의 첫 반응은 정해져 있습니다. 예산은, 누가, 어떻게입니다. 이 질문에 답이 없으면 그 조항은 문장으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반면 위기 국면의 판단이 현실적인가 아닌가는 상황에 따라 갈리는 문제입니다. 그것까지 매뉴얼에 적어 넣으려 하면 분량만 늘고 실효는 없습니다.

업데이트는 문서 작업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업데이트되지 않은 매뉴얼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무자 입장에서 업데이트는 고역입니다. 직제 개편은 수시로 일어나고 담당자는 계속 바뀝니다. 새로 온 사람은 매뉴얼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리 책임이 있는 임원도 점차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이 악순환이 반복되면 매뉴얼은 생명력을 잃습니다. 몇 달 뒤에 다시 들춰 보면 고서적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알려지지 않은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매뉴얼의 내용을 구성원에게 알리고, 이해시키고, 피드백을 받아 고치는 일이 쌓일 때 매뉴얼은 조직 안에서 생명력을 얻습니다. 매뉴얼을 살리는 방법은 결국 끊임없는 내부 커뮤니케이션뿐입니다.

훈련·시뮬레이션이 매뉴얼을 고칩니다

훈련·시뮬레이션은 두 개의 사업이 아니라 하나의 묶음입니다. 실무에서 따로 떨어져 굴러가는 법이 없습니다.

둘은 검증하는 대상이 다릅니다. 훈련은 사람의 역량을 봅니다. 대변인이 질문 앞에서 어떻게 답하는지, 실무자가 초기 정보를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확인합니다. 시뮬레이션은 체계의 작동을 봅니다. 보고가 제시간에 올라가는지, 소집이 실제로 되는지, 결정이 어디서 막히는지를 확인합니다.

한쪽만 하면 반쪽이 됩니다. 훈련만 하면 사람은 늘었는데 그 사람이 설 자리가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뮬레이션만 하면 체계는 그려졌는데 그 자리에 설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둘은 처음부터 하나의 팩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매뉴얼의 결함은 책상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대응 단계 구분이 애매하다거나 지휘 체계가 겹친다는 문제는 위기 국면에 처음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평시 훈련·시뮬레이션에서 드러나고 고쳐져야 합니다.

위기 국면에 치명적 결함이 드러났다면, 그것은 매뉴얼을 잘못 썼기 때문이 아니라 훈련·시뮬레이션을 통해 고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뉴얼과 훈련·시뮬레이션은 별개가 아닙니다. 훈련·시뮬레이션은 매뉴얼을 검증하는 절차이고, 매뉴얼은 그 대본이 아니라 훈련·시뮬레이션이 고쳐 나가는 대상입니다. 이 순환이 돌지 않는 조직에서 매뉴얼은 캐비닛 안의 문서로 남습니다.

죽은 매뉴얼과 살아 있는 매뉴얼

구분죽은 매뉴얼살아 있는 매뉴얼
인지존재를 아는 사람이 소수관련자 모두가 자기 역할을 알고 있음
기준무엇을 할지가 먼저 적혀 있음누가 판단하고 누가 실행할지가 먼저 정해져 있음
현실성가진 적 없는 자원을 전제함예산·인력·장비·협력 체계로 뒷받침됨
갱신인사이동과 직제 개편이 반영되지 않음정기 점검 주기와 담당이 정해져 있음
검증위기 때 처음 펼쳐짐훈련·시뮬레이션에서 결함이 드러나고 고쳐짐
소통만든 부서만 알고 있음알리고 이해시키고 피드백을 받음
표. 죽은 매뉴얼과 살아 있는 매뉴얼 — 스트래티지샐러드

우리 매뉴얼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법

첫째, 위기관리 책임자와 실무자에게 매뉴얼에서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문서를 찾아봐야 답할 수 있다면 그 매뉴얼은 아직 살아 있지 않습니다.

둘째, 마지막 개정일을 확인하십시오. 그 이후에 있었던 인사이동과 직제 개편이 반영되어 있는지 함께 보십시오.

셋째, 지난 일 년간 매뉴얼을 놓고 훈련·시뮬레이션을 한 적이 있는지, 그 결과로 매뉴얼이 실제로 고쳐졌는지 확인하십시오. 훈련·시뮬레이션은 했는데 매뉴얼이 그대로라면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넷째, 매뉴얼이 지정한 책임 부서에 필요한 예산과 자원이 실제로 배정되어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이 네 가지에 답하지 못하는 매뉴얼은 보유하고 있을 뿐 작동하지는 않는 문서입니다.

더 읽어 보실 자료

위기관리 매뉴얼이란 무엇인가: 매뉴얼의 정의와 구성입니다.
위기관리 시뮬레이션이란 무엇인가: 매뉴얼을 검증하는 훈련·시뮬레이션입니다.
미디어 트레이닝이란 무엇인가: 훈련·시뮬레이션에서 사람의 역량을 다루는 쪽입니다.
위기관리 컨설턴트가 답하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컨설턴트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컨설턴트
2009년 국내 최초의 기업 위기관리 컨설팅사 스트래티지샐러드를 창업했습니다. 약 30년간 국내외 300여 개 기업과 조직의 위기, 이슈관리를 자문해 왔으며 위기관리 분야 저서 다섯 권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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