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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 기고문]CEO가 언론을 이해하지 못할 때 보이는 증상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평소에도 그렇지만 특히 자사에 이슈나 위기가 발생했을 때 최고의사결정권자인 CEO는 언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불필요한 혼란이나 무리수 없이 순리에 따라 문제를 풀 기회를 빨리 잡을 수 있다. 정상기업으로 분류되는 일부 대기업과 중견기업에서는 공히 CEO의 언론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경향이 있다. 반면 중소기업과 스타트업 같은 경우에는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언론을 제대로 된 이해하고 있는 CEO가 매우 드물다.

이는 특정 기업군과 CEO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의 진화 기간과 사회적 책임과 노출 규모 등 여러 사회적 환경에 의해 대기업군 CEO들은 보다 빠른 발전을 한 것뿐이다. 이미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여러 번에 걸쳐 사회를 떠들썩 하게 만들었던 경험이 있다. 그 과정에서 얻은 많은 교훈들로 각 회사 CEO들은 훈련되었다. 그런 반복적 경험과 교훈, 훈련이 쌓여 지금과 같은 CEO 언론관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기업에서 오랫동안 임원으로 일하다 중견이나 중소기업 대표로 자리를 옮긴 CEO들은 해당 기업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언론 이해보다 훨씬 더 높은 언론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대로 스타트업 등에서 일하다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경영진의 경우에는 기존 대기업의 일반적인 언론관을 낯설어 하기도 한다. 오히려 보수적이라 보거나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까지 받고는 한다. 상호간에 차이와 다름이 있다는 의미다.

이번 주제로는 언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CEO들이 보이는 공통 증상들을 알아본다. 한가지 논의전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언론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의미는 ‘CEO가 기자들을 많이 알고 있고 그들과 매우 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그냥 CEO가 기자들과 막역한 사이라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이슈나 위기가 발생했을 때 하소연하거나 일부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지인 기자들을 활용할 수는 있다. 일부 친한 기자는 회사 편을 들어 우호적 기사를 내 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런 커넥션이 곧 언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언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CEO가 보이는 주요 증상들은 무엇일까? 회사에 부정 이슈나 위기가 발생했을 때 특히 그런 이해 수준이 그대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으므로 부정적 상황에서 보여지는 증상들을 꼽아 본다.

첫째, CEO께서 부정기사나 보도를 나가지 못하게 하라 하신다

기사를 빼라. 못 나가게 하라. 보도를 막아라. 방송 안되게 하라. 이런 지시를 하는 CEO는 언론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케이스마다 다르지만 집중적으로 해명을 하고, 전략적인 접근을 통해 초기 취재를 완화시키거나 기사나 보도 톤앤매너를 조정할 수 있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못 나가게 하라는 지시는 그런 경우에도 불가능하다. 초대형 기업들은 기사나 보도를 쑥쑥 빼는 것 같던데 왜 우리 홍보실은 빼지 못하는가 하고 묻는 CEO도 사실 언론을 잘 모르는 분이다. 초대형 기업도 기사나 보도를 그렇게 쉽게 쑥쑥 빼지는 못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사는 그런 초대형 기업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언론을 이해하는 CEO는 현재 어떤 언론사 어떤 기자가 무슨 주제로 취재를 하고 있는지를 먼저 심도 있게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부정 기사나 보도 대응에 있어 목표를 세운다. 어느 주제나 어느 앵글은 가능한 피했으면 한다는 논의로 대응을 시작한다. 최선을 다하지만 해당 기사나 보도를 싹 빼겠다는 생각이나 지시를 하지는 않는다. 언론을 잘 이해하는 CEO는 홍보실과 함께 주로 데미지 컨트롤을 위한 접근을 지시한다.

둘째, CEO 자신이 언론사 VIP에게 연락해보겠다고 하신다

평소에 A매체 회장이 내 친구야. B방송 사장이 선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CEO들이 주로 이슈나 위기 발생 시 언론사 윗분들에게 전화를 많이 한다. SOS 전화를 하는 셈이다. A매체 기자가 현재 자사에 대한 부정적 취재를 하고 있는데, CEO가 A매체 윗분들에게 전화를 한다고 해당 취재가 사라질 수 있을까? 전화를 받은 그 언론사 윗분들은 이후 취재하는 그 기자를 불러 취재를 중단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즘 같은 언론사 분위기에서 그런 취재 중단 지시가 기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CEO라면 언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단순 하소연을 하고 어떤 도움이나 해명을 시도할 수는 있다. 하지만, CEO의 그런 전화들이 많아질 수록 해당 기사나 보도 대응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은 점점 높아진다. 기사나 보도가 나가기 전 여기저기 언론사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고, 압력도 아닌 압력을 행사하려 하면서 노이즈만 대대적으로 일으킨 기업들이 실제로도 많다. 그후 그들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을까? 글쎄다.

언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CEO라면 심사숙고해서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딜 주제를 가지고 핵심 인사를 선택적으로 접촉하려 노력한다. 지인이라고 해도 가능한 말을 아끼고 걸려온 전화에도 주로 들으려 한다. 여러 유력인사들의 조언을 듣고 겹치는 핵심 인맥을 찾으려 한다. 노이즈 보다는 조용하게 타겟에게 접근하려 한다는 점이 다르다.

셋째, CEO가 여기 저기에서 이야기를 듣고 언론대응을 지시하신다

일단 먼저 정확하게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포인트가 있다. 특정 이슈나 위기가 발생하고 난 이후 기사나 보도를 보고 연락해 오는 지인들은 해당 주제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언론에서 다룬 피상적 내용들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심도 있는 대응이나 전략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그들이 원래부터 다양한 이슈나 위기관리 경험을 가진 전문가가 아닐 가능성도 높다. 정무적 감각이나 예전 일부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 할 수는 있지만, 그 조언의 수준이 CEO에게 새로운 경우는 드물다.

해당 이슈나 위기의 배경이나 세부 정보를 잘 알고 있지 않은 비전문가들이 CEO에게 전하는 조언은 최대한 CEO가 개인적으로 필터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하나 하나를 매번 위기대응팀에게 전달하고 이것도 시도해 보라 저것도 해 보라 하는 지시를 하면 상황을 관리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CEO는 그것이 무엇이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겠지만, 이슈나 위기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이 우선순위를 따져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 저것이라는 개념이 들어서서는 안된다.

언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CEO라면 최초 정한 이슈나 위기관리 목적에 기반하여 조언을 분별할 것이다. 그것을 실행하면 현재의 위기관리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될 것인가? 그것을 하지 않으면 반대로 위기관리 목적 달성으로부터 심각하게 멀어지게 될 것인가? 그것을 꼭 지금 실행해야 할 것인가? 아니라면 언제 실행해도 괜찮을 것인가? 등등에 대한 고민을 할 것이다.

넷째, CEO가 앞장서 돌아다니신다

알고 있는 지인 기자들을 죄다 만나서 하소연을 하는 경우다. 심지어 현재 취재중인 기자나 PD를 직접 만나려 시도하기도 한다. 그 기자나 PD와 친한 지인을 찾아 마치 비즈니스 미팅 같이 알음알음 기자와 PD에게 접근한다. 심지어 그런 개인적 어프로치를 회사 홍보실이 모르고 있는 경우도 있다. 홍보실이 일부 알고 있어 위험성을 이야기해도 CEO가 귀기울여 듣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CEO들 상당수가 취재 중인 기자나 PD에게 ‘일용할 양식’을 준다. 기자의 질문에 길고 긴 답변을 해 완성도 높은 기사를 선물하고, PD의 질문에 답변하는 CEO의 모습이 방송을 그대로 탄다. CEO가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했으니, 기자나 PD도 비즈니스적으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언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CEO는 절대 함부로 개인이 나서지 않는다. 회사라는 조직에서 홍보실이 존재하는 이유를 기억한다. 경험 많고 훈련된 홍보실을 내세워 언론과 공식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한다. 기자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언론사를 대표하는 공인으로 바라본다. 회사와 회사가 그러하듯 공식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나 하나 제대로 하려 노력한다.

다섯째, CEO가 예산을 활용하라 하신다

기자에게 돈을 주라 지시하는 CEO는 한 십년전까지는 일부 존재했던 것으로 안다. 취재를 막으려 예산을 동원하는 경우는 아직도 존재한다. 언론사 광고국을 통해 정보에 접근하려 하기도 한다. 언론사 데스크에게 광고로 딜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소규모 매체들의 경우에는 그런 옛적 관행이 존재하는 곳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모든 언론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CEO라면 그는 언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언론을 이해하고 있는 CEO라면 취재 과정에서 갑자기 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는다. 기자나 데스크에게나 돈으로 딜을 하자는 제안은 하지 않는다. 다른 라인을 통해서도 공개적으로 시도하지 않는다. 전문성을 가진 홍보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순리대로 문제를 풀려 노력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홍보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CEO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여섯째, CEO가 처음부터 로펌들을 불러 언론 대응을 지시하신다

대형 로펌은 사실 대형 언론사에 대한 법적 대응을 맡는 것을 매우 껄끄러워한다. 이미 해당 로펌에서는 대형 언론사 한두 곳을 대리하고 있기도 하다. 대대적으로 시끄러운 대언론 소송을 맡는 것이 로펌 차원에서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큰 수입이 되는 소송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잘 모르는CEO는 초기부터 로펌들을 불러 대대적인 언론사 상대 소송을 지시하고, 취재하는 데스크와 기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법적 조치를 강구하라 지시한다.

언론 대응은 홍보실의 역할이다. 아무리 뛰고 나는 로펌도 자사 홍보실만큼 언론 대응을 잘 하기는 어렵다. 언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CEO는 홍보실의 조언을 먼저 듣고, 홍보실의 전략적 대응과 발 맞추어 로펌을 활용하려 할 것이다. 언론 대상 소송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소송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송이나 그로 인한 판결을 최종 목표로 두지 않는다. 언론을 잘 아는 CEO는 그런 법적 제스츄어를 통해 언론과 딜을 성사시키려 한다. 로펌을 단순 송무 대리인으로 활용하기 보다, 협상과 딜을 만들어내는 중간자로 활용하려 한다. 회사와 홍보실, 로펌 그리고 언론이 상호간 윈윈하는 지점을 함께 찾는 것이다.

일곱째, CEO가 자사 홍보실을 못 믿겠다 하신다

이슈나 위기가 발생했을 때, 특히 그와 관련한 부정 기사나 보도의 취재가 진행 중일 때, 가장 힘들고 가장 대응에 심혈을 기울이는 부서가 바로 홍보실이다. 그런데 CEO는 왜 그들이 제대로 대응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생각할까? 왜 그들이 대응에 있어 무력하다고 판단할까? 언론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CEE들은 그럴 때 일수록 홍보실에게 회사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를 묻는데, 왜 언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CEO는 홍보실이 무력하다고만 생각할까? 그간에는 무엇이 다를까?

그런 다름 때문에 기업 CEO를 비롯 이슈나 위기 발생 시 의사결정을 내리는 그룹은 평소 언론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이전과 현재 언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계속 새롭게 업데이트 해 이해해 나가야 한다. 부정기사나 보도에 대응했던 기업들의 사례를 분석해 보면서 어떤 것이 유효했고, 어떤 것이 무리수였는지를 판별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사가 그 상황에 처했을 때 제대로 된 이해를 바탕으로 언론 대응에 성공할 수 있다.

CEO인 자신이 언론사 부장들을 모두 알고 있으니 언론을 나만큼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과 같이 기자들과 친한 것과 부정 이슈나 위기 발생 시 대응해야 할 언론을 잘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CEO와 기자가 친한 것을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본다면, 부정 이슈나 위기 시 취재 상황에서는 개인의 관계는 사라지고, 회사와 회사의 관계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자. 자꾸 그 속에 개인의 관점을 투영하거나 개인간 관계에 주로 의존하는 비정상적 어프로치를 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자.

무엇은 해야 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먼저 이해해 보자. 그렇게 하기 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평소에는 문제없던 것이 이런 상황에서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조언에도 공감해야 한다. 회사에서 가장 공적 대응 경험이 많은 홍보실을 무한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을 통해 제대로 언론을 이해하고 있는 CEO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회사가 성공적으로 이슈와 위기를 관리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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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 기고문]평시 언론관계 역량이 위기관리 성패 가른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기업 임원과 실무진들을 대상으로 위기관리 워크샵을 할 때 종종 ‘숙제를 잘 해 놓으라’는 이야기를 한다. 어린 학생 시절 경험했을 수도 있는 기분을 다시 떠올려 보자. 숙제검사를 잘 하지 않기로 유명한 선생님이 하루는 수업을 시작하자 마자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제 내준 숙제해 온 사람은 숙제를 책상위에 펼쳐 놓도록 해. 숙제 안 한 사람들은 일어서서 앞으로 나오고.”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자.

물론 숙제를 정상적으로 해 온 학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숙제를 펼쳐 놓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반면 숙제를 해 오지 않은 학생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벌을 받기 위해 앞으로 나가야 한다. 그 가슴 두근거림과 두려움은 실제 경험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기업에게 그 기분 나쁜 숙제검사는 곧 부정 이슈의 발생이나 위기의 발화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세계적 투자자인 워렌 버핏이 이야기했다. “누구나 즐겁게 수영을 하지만, 그 풀장에 물이 빠져나가면 누가 수영복을 입고 있지 않았는지가 드러난다” 평소에는 다 비슷해 보여도, 시장이 악화되었을 때에는 어떤 기업의 펀더멘털이 좋은 지가 그대로 드러난다는 비유다. 이슈나 위기관리에서도 그렇다. 평소에는 대부분 기업이 이미지 좋고, 평판도 훌륭해 보이 지만, 그 회사에 부정적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는 그 기업의 실제 이미지와 평판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상기업인지 그 여부가 드러난다.

기업의 언론관계 역량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해당 역량에 대한 착시 현상이 존재한다. 요즘같이 유가(buying)를 기반으로 보도자료나 기사를 뿌려 댈 수 있는 환경에서는 더욱 더 언론관계 역량의 품질을 식별하기 어렵다. 예산이 풍부하면 그에 따라 일정 수준 이상의 기사와 버즈가 생성되니, 그 결과를 놓고 언론관계를 잘한다 홍보를 열심히 한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대한 부정 이슈나 위기가 발발 되면 해당 기업의 언론관계 역량은 그대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평소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누가 맡겨진 숙제를 잘 해 왔는지를 그대로 검사 받는 상황이 돼 버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홍보담당이나 부서는 물론 대표이사와 여러 임원들까지 인지부조화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회사는 지금까지 언론관계나 홍보를 잘 해 왔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지?’ 하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흘러나온다.

특히 이런 현상은 정상 홍보 역량과 조직을 갖춘 대기업들에서 보다, 그에 미치지 못하는 중견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최근 성장하고 있는 스타트업 기업들에게서 훨씬 더 흔하게 목격된다. 부정 이슈나 위기 발생 시 언론관계 역량에 문제가 있는 기업에게는 어떤 구체적 해프닝들이 발생될까? 정리해 본다.

미디어리스트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가장 대표적 언론관계 역량의 문제가 미디어리스트와 관련되어 있다. 기업 언론관계의 수준을 평가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홍보실로부터 최신 버전의 미디어리스트를 받아 점검해 보면 된다. 자사를 담당하는 기자들의 리스트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대부분 언론관계 업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기업들의 미디어리스트는 기준이 모호하거나, 예전 담당기자의 정보가 들어있거나, 새롭게 변화는 상황과 정보를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갑작스럽게 상황이 발생하여 자사 해명문이나 사과문을 기자들에게 배포해야 하는데, 그 리스트가 충분하거나 유효하지 못한 상황에 처하는 기업들이 있다. 미디어리스트 내 한 언론사에는 데스크급 기자의 정보가 전부이고, 어떤 언론사는 이미 퇴사해 버린 기자들의 정보만 가득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보자. 미디어리스트는 전혀 쓸모 없는 쓰레기인 셈이다.

아는 기자는 많은데, 친한 기자가 없다

이 또한 전형적으로 이슈나 위기관리 시 기업이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다. 미디어리스트에 담당기자 정보가 200-300명 되지만, 그 중 누구 하나에게 딱히 전화 걸어 정보를 확인하기 쉬운 기자가 없는 상황이 이런 경우다. 예전에 친했던 기자는 이미 다른 부서로 발령 되어 직접적으로 해당 이슈와는 상관이 없다. 그래도 아주 모르는 기자보다는 낫겠지 하면서 그 옛 기자에게 전화해 간접적인 확인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전형적으로 언론관계 업무와 관련해 제 숙제를 그때 그때 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이슈관리를 위해 한 경제지 내부 분위기를 알고 싶다고 그 경제지의 자매지 기자에게 전화를 건다든가. 한 종편의 취재 내용을 확인하고 싶어, 같은 오너의 일간지 기자를 만나 본다든가. 흔히 광고국을 통해 상황을 알아보는 것도 그런 류다. 직접적 언론 네트워크 대신 간접적으로 또는 두세 다리를 건너서 상황을 파악하는 활동이 많은데, 이 모든 것이 언론관계 역량이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보 취득의 범위나 정확성이 떨어진다

당연한 결과다. 앞서 미디어리스트와 친한 기자의 부재 원인과 바로 연결되는 결과다. 부정적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작업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인데, 이 첫 단추부터 제대로 끼워지지 않는다. 상황 정보를 취합해 본 경험이 있는 실무자들은 공감하겠지만, 정보를 조각 조각으로 입수해서는 정확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쉽지 않다. 충분해 보이는 깊이 있는 정보를 얻었다 해도 그에 대해 크로스 체킹 해 보기 전에는 정확성을 부여할 수 없다. 자꾸 새롭게 충돌하거나 가려져 있는 다른 정보들이 나타나고, 주장과 예측이 진짜 정보들과 버무려져 혼란스럽기만 하게 된다.

언론관계 숙제를 제대로 해 놓지 못한 기업은 기자들을 통한 정보 취득과 분석 작업은 일단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입수되는 정보 양이나 질이 형편없을 뿐 아니라, 정확성도 상당히 떨어지는 수준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정보를 제공한다는 소스 기자들이 아주 예전 기자였던 분이거나, 현장에서 떨어져 있는 단순 시니어 기자이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분이면 상황은 더욱 더 재앙적으로 변한다.

다른 출입처 기자 리스트가 없다

일반적으로 기업에게 부정적 상황이라면 담당기자 리스트와 커넥션은 물론, 그에 더해 법조, 국회, 특정 규제기관 출입기자단 리스트가 어느 정도 구비되어 있어야 대응 업무가 가능 해 진다. 미디어리스트가 곧 언론관계나 커넥션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경험 있는 홍보임원이나 팀장이 있는 기업에서는 이전 담당기자들이 출입처가 변경되어 여러 주요 기자단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커넥션을 찾을 수 있다. 리스트만 있으면 즉각적인 커넥션 활용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따라서 기업에게 부정적 상황이 발생되면, 홍보실은 관련된 기관이나 조직의 담당기자 리스트를 구하려 애쓴다. 각종 방식으로 우회하여 미디어리스트를 입수하고, 그 중 커넥션 있는 기자들을 찾아 내 정리하며 접근 방식을 고민한다. 이는 그나마 언론관계 역량이 일정 수준 이상 갖춰진 기업이다. 그 외 기업은 혹시나 운이 좋게 해당 기관의 미디어리스트를 구했다 해도 별 소용이 없다.

해명문이나 사과문을 제대로 작성하지 못한다

보도자료는 평소 잘 써서 여기 저기 기사화했는데, 실제 발생된 문제에 대한 해명이나 사과문 작성에는 자꾸 주저하게 되는 경우다. 다른 기업은 실제 해명문이나 사과문을 어떻게 작성했는지 샘플을 급히 구해 보기도 한다. 어떤 형식으로 글을 써야 할지, 어떤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상호간 왈가왈부만 이어진다.

일부 조언하는 내외부 분들로부터 자꾸 자신의 생각을 포함하라며 지시가 내려온다. 수정과 수정이 계속된다. 문서 하나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의 검토와 훈수가 이어지다 보면, 해명문이나 사과문이 장장 수 천자 수준의 길이가 되기도 한다. 형식 또한 많은 사공이 인풋을 한 결과 언론대상 해명문이나 사과문의 형식을 일찌감치 벗어나 버린다. 정치 성명문 같기도 하고, 법적 소장 같기도 한 괴상한 문서가 생성된다. 평소 제대로 된 언론관계 역량을 기반으로 정상적인 대 언론 커뮤니케이션이 지속되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해프닝이 내부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그후 결국 그 문서를 모르는 기자들에게 이메일 발송한 뒤 배포 완료를 선언한다.

의사결정권자들이 언론 체계나 습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홍보실 사람들에게 당연하고 일상적인 언론 관련 내용들에 대해 대표이사나 임원들이 생소 해 한다. 평소 언론관계 역량이 안정된 기업에서는 대표이사나 주요 임원들도 언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와 경험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 못한 기업에서는 언론이 매우 새롭다. 홍보실에서 ‘그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해도 임원들이 그 조언을 듣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홍보실이 너무 언론 시각에서만 이야기한다 거나, 언론편을 들고 그들의 눈치를 너무 살핀다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의사결정자들이 언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꾸 대응 의사결정을 하다 보니 무리수가 이어진다. 홍보실은 그 사이에서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하부 업무만 반복한다. 언론을 비롯한 외부 이해관계자들을 관리해야 하는데, 내부 의사결정자들의 심기를 관리하고 있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평소 경영진의 언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경험은 언론관계 역량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대표이사나 주요 임원들이 언론을 몰라서는 이슈나 위기관리는 커녕 사업도 어렵다.

의사결정권자들이 홍보실을 신뢰하지 않는다

아이러니다. 평소에는 대표이사나 임원들이 자사 홍보실에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발생되니 금세 신뢰를 거두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의사결정자들은 기본적으로 변덕스럽다. 각 기능들의 실체와 수준을 신속하게 평가하고, 대안을 찾는데 익숙하다. 평소 언론관계 역량은 위기 시처럼 직접 평가받지 못하게 마련이다. 반면 상황이 발생하고 하루 정도면 의사결정자들은 홍보실의 실제 역량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

문제는 단순히 의사결정자들이 홍보실에 대한 신뢰만 거두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더 큰 난맥상이 목격된다. 전문성 없고, 허락되지 않은 임원들의 개인적 언론 접근이 이어진다. 현장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공식 메시지가 아닌 내용들이 전파된다. 상당히 위험한 언론 매체들의 동원 시도도 이어지고, 전혀 다른 위기를 양산해 낸다. 통제불가능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 돼 버린다. 일단 홍보실이 약간 부족하더라도 경영진이 기존 홍보실을 제외하거나 무력화시켜서는 제대로 된 결과를 내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홍보담당자나 홍보임원이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어떤 홍보담당자라도 평소 언론관계 역량을 제대로 가꾸어 왔고, 맡겨진 숙제를 잘 해 왔다면 이슈나 위기 발생 시 무력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역량과 커넥션을 잘 발휘해서 회사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이끌어 내려 현장을 뛰며 밤을 새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경우 홍보담당자는 극도의 불안과 패배감 그리고 조직적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이슈나 위기가 발생되면 해야 할 업무는 더 줄어드는 경험을 한 홍보담당자는 그런 상황에 처한 경우다. 일부 대응 업무만 맡겨진다 거나, 위기관리팀을 소집 운영하거나 보조하는 총무의 역할로 홍보담당자의 역할이 바뀌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단 이슈나 위기 발생 시 홍보담당자가 무력감을 느낀다면, 그 기업의 언론관계 역량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었다는 의미다.

자사에게 부정적인 상황이 발생되어 진짜 거대한 이슈관리나 위기관리를 경험해 본 경영진이나 홍보담당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경험이 오랜 홍보팀장이나 임원들의 경우에는 물론 기억에 남는 자신의 위기관리 케이스를 몇 개 꼽을 것이다. 그 외에는 자잘하거나 부정적인 해프닝에 대한 홍보실 차원의 다양한 대응 경험이 대부분이다.

우선 주목해야 하는 건 그 자잘하고 부정적인 해프닝 수준의 일상적 이슈관리에 관한 것이다. 그 때 그때 해당 해프닝에 대응하면서 자신과 자기 부서가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역량이 부족하다 느꼈는지 기억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무엇을 해야 그런 어려움과 부족함을 해소시킬 수 있을지를 경영진과 함께 여럿이 고민해 보면 좋다.

그런 일상적인 깨달음과 기억들 그리고 고민들이 실행으로 이어져야 언론관계 역량이 성장한다. 정상기업으로서 필요한 정상적 언론관계 역량을 갖추게 된다. 지금은 상황이 평온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아 이만하면 충분하다 느낄 수 있겠지만, 문제를 찾아내는 노력은 언제나 부족하다. 언제 이 풀장의 많은 물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우리의 수영복이 드러날지 노심초사해 보는 것은 결과적으로 유익한 일이다. 막연히 불안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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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42021 Tagged with 0 Responses

[The PR 기고문]소리치는 소수 vs. 침묵하는 다수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예전 이슈관리나 위기관리 원칙에서는 어떠한 부정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관련 공중이나 이해관계자들을 잘 살펴 기업의 대응 방향과 전략을 정리하라 조언한다. 여기에서 공중 및 이해관계자들을 잘 살피라는 의미는 발생 상황에 대한 그들의 의견, 감정, 태도, 느낌 등 여론을 다방면으로 리스닝 해 보고 분석하여 기업 대응 기조를 정하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예전 기업들은 실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상황을 둘러싸고 있는 공중과 이해관계자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기업들은 언론의 기사와 논설을 주로 읽고 그것을 여론으로 이해했다. 일부 여론지도층의 개인 의견을 들어 그것을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의 마음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이후 점차 공중 및 이해관계자의 형태와 생각이 다양해지고, 이슈 및 위기 유형과 지속성이 변화무쌍 해 지면서 이슈와 위기 시 공중 및 이해관계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 내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는 소셜미디어라는 신세계가 열렸다.

그때부터는 기업이 직접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수 많은 소셜미디어 채널 각각에서의 의견들을 다각적으로 듣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전반적인 여론의 흐름을 기업 스스로 완벽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소셜미디어 공중의 의견을 듣고 분석해 이슈나 위기 대응의 기조를 정하는 것이 익숙해 지면서 여론을 파악하는 것이 이전보다 쉬워진 것 같았다. 그러나, 새로운 의문이 생겨 났다. 침묵하는 다수가 어느 곳에서 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소셜미디어 상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는 소수보다 훨씬 더 많은 다수는 침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수가 다수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제 다시 기업의 고민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과연 현 상황에서 소셜미디어상에서 소리치는 일부 공중의 의견을 사회 전체의 여론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다시 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일부 진영의 의견을 대변하는 전통 언론을 사회 전체의 여론으로 간주해도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어차피 기존 언론이나 소셜미디어나 각각 자기 진영이나 도그마에 빠져 있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소리치는 소수의 의견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침묵하는 다수의 의견을 찾아 따를 것인가? 침묵하는 다수를 찾아낼 수는 있을 것인가? 그들이 침묵하고 있는 데 어떻게 그들의 의견을 알아 내 이해할 수 있을까? 같은 고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실제 현장에서 위와 같은 고민으로 기업 내에서 자주 회자되는 화두들을 정리해 보자.

소리치는 소수는 그저 소수일 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 더욱 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소리치는 소수라고 부를 때 일부는 ‘소수(minority)’에 방점을 찍는다. 반대로 일부는 ‘소리치는’에 방점을 찍는다. 이슈나 위기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부정 상황에서는 소리치는 자들이 생겨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대부분 상황과 관련된 분노를 이야기하고, 실망감을 표현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며, 비웃음을 보낸다. 상호간에 자신의 감정을 공유하면서 자신과 유사한 감정을 가진 공중들과 커뮤니케이션 하며 성장한다.

바로 그들이 소리치는 소수다. 침묵하는 다수가 존재하는 지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소리치는 소수가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관찰 가능하다. 실재하는 공중인 것이다. 그들의 소리가 커져 다른 주변 이해관계자들이 듣게 되면, 상황은 이전과 또 달라진다. 이때부터는 심각성이 더해진다. 추가적으로 다른 이해관계자들이 상황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기업이 해당 상황을 관리하기 위해 마주해야 하는 이해관계자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 들에 의한 압력과 공격 그리고 그로 인한 장기간의 부담이 기업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가져온다. 위기가 돼 버리는 것이다.

소리치는 소수는 대저택 마당에 풀어 놓은 큰 개들과 같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자신을 왓치독(watch dog)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제를 보고 그들이 짖기 시작하고, 그 소리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집 주인(다른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은 현관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와보게 된다.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기업에게는 이 순간이 가장 두렵고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문제를 보았음에도 소리치지 않는 개들(침묵하는 다수)은 이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셈이다. 소수가 시끄럽게 소리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 최근 이슈 및 위기관리의 목표가 되고 있다. 소리치던 소수가 점차 목소리를 줄여 나가게 하는 것, 소리치는 소수가 점차 사라지게 이끄는 대응 방식을 전략적으로 고민해야 하게 되었다.

그러다고 해도 극소수의 극단적 의견까지 수용해야 하나?

그렇다. 그 극소수로 보이는 극단적 의견이 일단 기업에게 보여지고, 피부에 와 닿는 수준이라면 그들의 의견은 이미 무시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자사에 대하여 젠더 극단의 일부 그룹이 상당한 수준의 분노와 적대행동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실제 사회 및 시장 접촉면(point of connection)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면, 이 상황을 무시로 해결할 수는 없게 된다.

아주 극소수의 매우 극단적 의견이라 폄하만 해서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실제로 아주 극소수의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의견이나 주장이라면 아예 여론의 정글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잠깐 시끄러울 수는 있어도, 이내 스스로 사라져 버리게 될 뿐이다. 그들의 소리를 접하는 대다수가 그들의 존재와 의견을 먼저 무시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여론의 정글에서 살아남아 지속되는 극소수의 극단적 의견이라면, 기업은 큰 심각성을 느끼며 대응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예상되는 더 큰 데미지를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소리치는 공중에 대해 숫자, 이성 또는 합리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 보았 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기업이 피해를 입는 결말이 정해져 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의 의견이 어떻게 살아남아 성장하는지를 잘 살펴보고 그에 각각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더 예후가 좋다.

침묵하는 다수는 그럼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어디에나 침묵하는 자들은 존재한다. 특히 이슈나 위기가 발생했을 때에는 그 상황에 따라 침묵하는 자들의 수가 줄기도 하고 늘기도 한다.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이슈나 위기 발생 시 해당 상황에 대해 침묵하는 자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침묵하는 자가 소수가 되어 버리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모든 이슈나 위기 초기에는 침묵하는 자들의 수는 다수로 존재한다. 그것을 전제로 해서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이해해야 한다. 기업의 전략적 대응이 성공했다면, 침묵하는 자들은 다수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반대로 기업의 대응이 실패한 것이라면. 침묵하는 자들은 급격히 줄어들고, 소리치는 자들로 변화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소리치는 다수의 상황, 곧, 사회적 공분의 사태로 해당 이슈나 위기는 악화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침묵하는 다수를 찾아 해 메거나, 분석해 보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소리치는 소수에 먼저 집중하는 것이 좀더 현실적이고 효율적이다. 상황 발생 또는 대응 이후 소리치는 소수가 점차 다수화 되는 상황이 목격된다면 이는 아주 심각한 상황이 되어 간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막연하게 모집단의 규모를 잘 알지 못하니 소리치는 소수가 두 세 배 증가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다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별 의미가 없다. 이슈나 위기관리는 수학이나 과학이 아니다. 소리치는 소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면 어떤 이유나 원인이 있다는 의미다. 침묵하던 다수가 따라서 소리를 치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것을 이해하고 집중 관리해 나가는 것이 이슈관리고 위기관리다.

소수가 아무리 시끄럽게 해도 이해관계자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런 상황으로 분석되는 경우라면, 현재 소리치는 소수는 실제 여론의 정글에서 정상적으로 살아남은 소수가 아닐 것이다. 제대로 여론의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은 폐쇄된 의견들의 집합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폐쇄형 커뮤니티나 카페, 메신저그룹내에서 고여 있는 의견들이 그런 것이다. 그들의 소리침이 여론의 정글로 직접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일부 흘러나와도 오래 생존할 수 없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겨우 여론의 정글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그 소수의 소리침이 적정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에도 유사한 분석이 가능하다. 주변 공중이나 이해관계자들과 감정의 일치를 형성하지 못하는 주제라는 의미다. 이런 경우에는 그 소리치는 소수를 모니터링만 할 뿐, 대응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내 누그러질 것으로 보인다면, 지켜만 보는 것 자체가 이슈관리와 위기관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한 방법이다. 성장하고 확산되지 않는 소수의 소리침은 바라봄이 최선의 대응이다.

침묵하는 다수는 소리치는 소수의 의견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의미 아닐까?

그렇지 않다. 만약 침묵하는 다수가 소리치는 소수의 의견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면, 일단 소리치는 소수는 여론의 정글에서 살아남아 성장할 수 없다. 소리치는 소수의 잘못된 의견을 반박하고 반대하는 다른 소수가 침묵하는 다수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기존 소수와 새롭게 그들을 비판하는 소수의 시끄러운 싸움이 시작된다. 여론의 정글에서 치열한 싸움이 발생되었다는 것은 이미 기업에게는 이전보다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기업측에서는 그런 소수 간의 싸움이 이슈관리나 위기관리에 도움이 된다 해석해야 한다.

그런 싸움이 없이 소리치는 소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공중이 다수로만 그대로 남아 있을 확률은 대단히 희박하다. 새로운 소수가 태어나지 않은 채 침묵하는 다수만 계속 존재한다면, 그 다수는 소리치는 소수의 의견에 주목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거나,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상황이라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다른 말로 그들은 부동층이다. 이런 부동층의 침묵하는 다수를 소리치는 소수 쪽으로 이동시키지 않는 노력을 해야 이슈관리나 위기관리는 성공한다. 침묵하는 다수라고 해서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라 막연한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이전과 많은 것이 바뀌었다. 여론이라는 것 자체도 이전의 여론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여론은 기본적으로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는 특성만 변하지 않았다. 여론은 살아있는 생물이다. 언제든 어떻게 든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나뉘며 널을 뛸 수 있다.

까다로운 여론을 들여다보며, 만져지지 않는 여론을 관리해야 하는 기업은 그래서 어려움을 느낀다. 무엇이 여론인지에 대한 고민도 깊다. 어떻게 여론을 찾고 이해해야 하는 가에도 이론들이 많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여론의 정글 속에서 이슈나 위기를 관리하려는 기업들은 더욱 더 여론을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정의하는 것에 익숙 해 질 필요가 있다.

그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소리치는 소수, 즉 가시적으로 도출되어 있는 의견들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여론의 정글에서 메아리를 울리고 있는지를 지속해서 모니터링해야 한다. 그것들이 어느 정도로 강도를 더해만 가는지에 대해서도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

그와 함께 소리치는 소수의 활동성, 확산성, 공격성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지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최근의 기업 이슈관리와 위기관리의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정원에서 엄청나게 짖어 대는 두세 마리의 개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많은 개들이 아직 잠자고 있다고 짖어 대는 개들의 위력을 폄하해서도 안 된다. 언제 잠자던 개들이 일어나 따라 짖으며 달려들게 될지를 예측하며 항상 경계해야 한다. 짖고 있는 소수의 개들을 신속하게 관리하는 대응도 필요하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옛말을 믿고 소리치는 소수에는 무조건 대응하지 않는 기업은 이상의 조언과는 관계없는 기업이다. 그냥 갈 길을 가면 된다. 결과가 어떻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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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 기고문]정답 대신 해답을 찾자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자,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나요? 큰 이슈가 발생했거나 위기상황에 처한 기업에서 컨설턴트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다. 무언가 문제 해결을 위한 열쇠를 찾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복잡한 상황을 툭툭 끊어내고 잘라내서 가지런히 정렬할 수 있는 마법 가위를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 많은 것이 그렇지만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시대다. 어제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다. 옆 회사의 정답이 우리 회사에게는 최악의 선택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되었지만, 우리는 안 되는 거다. 정답이 영원히 정답일 수 없게 만드는 무한한 변수들이 혼동 속에서 상호 충돌하기 때문에, 이슈관리나 위기관리에 있어 정답은 존재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시각이다.

예를 들어 빨리 사과하라는 원칙이 정답 같아 보이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신속하게 한 사과로 인해 추가적인 곤란을 겪는 많은 사례들이 나타났다. 다른 변수들이 사과의 신속함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대표가 직접 나가서 위기관리 하라 하는 것도 정답 같아 보인다. 하지만, 때때로 대표가 나가서는 안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표가 무리하게 나서면 전선을 더욱 극대화해 버리는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늘어난다.

뭐든 정답 같아 보이면 일단 의심하고 다시한번 다각적인 고려를 해 봐야 안전하다. 매뉴얼이나 이론서가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효용가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 커만 간다. 그렇다고 매뉴얼이나 이론서 없이 이슈나 위기관리를 해 보려 하니 더욱 더 난감하다. 의사결정이 바로 정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참고해야 할 텐데 마땅한 것이 없다. 자신이 내린 의사결정이 정답일지 아닌 지에 대해 확신이 없고, 식은땀만 난다.

일단 정답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보자. 정답은 없고, 다양한 해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새로 가져 보자. 정해진 답이 정답이다. 그렇게 정해진 것은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해답을 찾아 유연하게 사고하고, 폭 넓게 범위를 활용해 보자. 좀더 나은 이슈관리와 위기관리가 가능 해 질 것이다.

기업이 고통받는 젠더이슈, 정답이 있나?

기업들이 최근 들어 젠더간 갈등 이슈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기업 내부에서는 사실 이번 자사 이슈 발생 이전에는 젠더 이슈에 대해 별로 알지 못했다며 한숨을 쉰다. 일부에서는 만약 자신들이 그런 극단적인 젠더 갈등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자사 직원들이 그런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의미 아니겠냐 한다. 그런 직원들이 없기 때문에 아무 의식 없이 디자인이나 카피를 사용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다 좋다. 정상 기업이 일부러 그런 논란을 일으켰을 리 없다. 일부 실무자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일부러 게임을 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사후 담당자들이 받을 스트레스와 각종 인사적 불이익을 미리 감내하면서까지 게임을 할 직원은 그리 많지 않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했다는 것이다. 공중은 기업이나 직원을 의심한다. 그런 여론으로 중요한 사업적 이해관계자들이 불이익이나 피해를 받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해당 기업은 그 상황을 심각한 이슈나 위기로 정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를 해결할 수 있는 정답은 무엇인가? 유일한 정답은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위해도 높은 해프닝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해법은 문제의 해프닝의 지속기간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가 되는 내용이나 소스를 없애야 한다. 그리고 사과를 하고 개선이나 재발방지 약속을 하는 것이 해법이다. 아니, 해법들 중에 하나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 해법에는 이해 안 되는 것이 많다. 우리가 진짜 특정 사상을 가지고 그런 컨텐츠를 만든 것이 아닌데, 왜 우리가 유죄를 인정해야 하는가? 컨텐츠를 내려 버리는 것은 문제를 인정하는 행동 아닌가? 전체가 아닌 아주 일부 집단에 의해 지적 받고 있는 컨텐츠를 내리고 사과하는 것이 과연 전략적인가? 다양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반론들이 따라붙을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을 뿌리로 해서 급격하게 자라난 해프닝에 합리성이나 이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서는 정답은 커녕 해답도 찾기 힘들어 질 뿐이다. 아예 답이 없다는 허망한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앞으로 기업과 관련 한 온라인발 해프닝은 점점 더 다양해 지고 심각해 질 것이다. 온라인 여론의 특성에 대한 기업의 이해 노력도 계속 증가할 것이다. 향후 어떤 정답 비슷한 것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빨리 해프닝의 지속기간을 최소화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한 해답 같아 보인다. 맞서 싸워 더 나아질 성격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해법이 있다면 회사마다 그 해법을 따르면 된다.

글로벌 사업에서의 한중일 삼국간 갈등, 정답이 있나?

얼마전까지 우리나라 기업들 중 일본 시장에서 사업을 하거나, 국내에서 일본 관련 사업을 하는 기업들이 장기간의 고통을 경험했다. 국가적으로 반일정서가 심각해서, 사업 자체가 위기를 겪었다. 일부는 한국내 사업을 철수하기도 했고, 반대로 일본에서 철수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한국에서 사업하는 일본기업에서 많은 자문 요청이 있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답을 간절하게 찾았다. 그러나 정답은 없었다. 정답에 가장 가까운 답이라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있자’ 정도가 결론이었다. 그 답 같지 않은 답을 보면서 그 회사 임원들은 한숨을 쉰다. 어떻게 그것이 정답이나 해답이 될 수 있습니까 하며 울상이 된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 이외에는 상황에 맞는 해답이 없는데 말이다. 조용히 견디자. 아무것도 하지 말자. 눈에 띄지 말자. 이런 것들이 어쩔 수 없는 해답이었다.

최근 한 기업에서는 중국 시장에서의 문제로 큰 고민에 빠졌다. 중국의 동북아 역사 수정 갈등의 중심에 자사가 끼어 버린 것이다. 글로벌 출시한 제품 디자인과 브랜드 컨셉에서 한류를 강조했는데, 중국 시장 반응이 심각했다. 그 디자인과 컨셉은 최초 중국의 것인데 왜 한국적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중국 소비자들의 비판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회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중국 소비자 시각에 맞추어 해당 제품을 접고, 브랜드를 포기하며 사과하면 한국 소비자들에게는 그런 이슈관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반대로 중국 소비자들에게 무슨 소리냐 이건 한국적인 것이라며 강력 대응한다면 중국에서의 사업은 어떻게 될까? 앞의 젠더 이슈와 같이 한쪽의 편을 들면, 한쪽이 문제를 지적하고, 반대로 해도 동일한 골치 아픈 진영 갈등 속에서 회사는 어떤 결정도 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정답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심지어 해답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이게 현실이다.

말과 행동이 다른 ESG 관련 이슈, 정답이 있나?

최근 유행하는 ESG 경영 트렌드와 관련된 이슈에도 정답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ESG는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뜻한다. 그럼 예전에는 기업들에게 환경이나 사회 그리고 지배구조에 대한 생각이나 체계가 없었을까? 이미 존재하던 개념이었다. 최근 들어 그 세가지 개념이 하나로 묶여 경영 트렌드로 재강조되고, 정부나 시민단체나 기업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아 가고 있는 과정일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어떤 기업은 아직도 환경관련 문제를 터뜨리고 있다. 예전에는 그리 관심 끌지 못했던 단순 환경 사고로 해당 기업은 ESG경영에 반하는 겉과 속 다른 기업으로 비판 받게 되었다. 환경 사고가 나는 그 순간에도 대표이사는 ESG 경영에 대한 강의를 하거나, 글을 올리고 있었다면 더욱 복잡한 상황이다.

최근 온라인에서는 앞장서서 ESG경영을 외치는 신문사들이 발행하는 종이 신문에 주목한다. 그 상당부분이 그대로 버려지거나 해외에 포장지로 수출되는 상황을 비꼰다. 진정한 ESG를 위한다면 신문사들이 먼저 종이신문 발행을 중단하라는 비아냥이 이어진다. 웃지 못할 이런 이슈에 대해서는 신문사들의 이슈관리 정답은 무엇일까? 해법은? 무시가 가능한 해법으로는 보인다.

어떤 기업은 ESG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약속하고도, 사회적 논란을 연이어 일으킨다. 어떤 기업은 오너 중심의 심각한 지배구조를 유지한 채 ESG경영을 브랜드로만 내걸고 있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지적에는 무시나 침묵으로 대응한다. 해답을 그렇게 정한 모양이다. 정답은 찾는 것을 포기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현실적이다.

현란한 MZ 세대 직원들 관련 이슈, 정답이 있나?

소위 MZ세대라고 불리는 새로운 인류군의 직원들은 어떤가? 굳이 어떤 회사라고 꼽지 않아도 작고 큰 다양한 MZ 세대 관련 이슈들은 발생되어 이어지고 있다. 블라인드와 브이로그, 각종 소셜미디어 등과 연계된 여러 해프닝이 기업 이슈의 한 카테고리를 이룬지 오래다.

큰 세대차를 드러내고 있는 경영진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도 그렇고, 공개적으로 대표의 허심탄회 한 대화 노력을 평가하는 직원들까지 한둘이 아니다. 공개적으로 성과급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여 사내는 물론 언론에까지 노이즈를 만들어 낸다.

부정적인 이슈로 회사가 어려울 때에도 MZ 세대 직원들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일부 이해관계자들과 대립하거나 충돌하기도 한다. 법적 문제를 넘어 사회적 문제, 윤리적 문제 등과 버무려진 MZ 세대 이슈는 세부 유형을 나누기조차 어렵다.

그렇다면 기업측에서는 그런 새로운 환경인 MZ세대 관련 이슈에 대해 어떤 정답을 가질 수 있을까? 정해진 답을 가지고 오색찬란 한 MZ세대의 생각과 움직임을 관리해 나갈 수 있을까? 진짜 그런 정답이 있어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는 한 것인가?

기업 이슈관리와 위기관리에 있어서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기업은 처해진 상황에서 가능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 뿐이다. 해법은 그럼 어떻게 찾아가야 할까? 우선 적절한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당 이슈관리나 위기관리에 있어 지향하는 목적이나 목표를 정해야 한다. 우리가 현 상황에서 관리 활동을 통해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어떤 상황을 목표로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정확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젠더간 갈등과 관련된 부적절해 보이는 이미지로 컨텐츠를 만들어 논란이 되었다면, 그 상황에서 해당 기업은 어떤 이슈관리 목적과 목표를 세울 수 있을까? 어떤 기업은 ‘해당 논란의 조기 진화로 회사 매출 및 거래처 피해 방어’를 목적과 목표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신속하게 해당 컨텐츠를 내리거나 수거해 버리고, 부주의했음을 신속히 사과해서 논란을 조기 종식시키는 노력을 하는 관리방식도 그중 하나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다.

목적과 목표를 세웠다면 그에 정렬되어 있는 가용한 모든 대응방식을 찾아 검토하는 것이 그 다음 단계다. 해당 컨텐츠를 삭제하고 말 것인가? 해당 컨텐츠를 새로운 플랜 B컨텐츠로 대체할 것인가? 재발방지 프로그램에 어떤 계획을 넣을 것인가? 누구 명의로 사과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어떤 표현과 설명을 해야 이슈관리 목적과 목표에 가장 정렬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을 언제 해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한 검토와 고민 그리고 결정이 필요하다.

개선이나 재발방지책에는 어떤 옵션들이 있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그 다음 단계의 것이다. 일단 이전에는 재수가 없어서 관련 논란에 휩싸여 고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번 그리고 세 번 비슷한 논란에 휩싸이게 되면 공중들 시각에서는 그것이 회사의 의지나 숨겨진 의도라 간주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정답이 없다면, 가능한 다양하고 여러 차원의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그때 그때 적용해서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 개선해야 한다. 그 뿐이다.

추후 그 동안 회사는 어떤 실질적 개선과 재발방지 노력을 했는가 하는 질문을 들었을 때, 즉각적으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정답 없는 이슈나 위기라고 해서 해답을 찾고, 실제로 해답을 적용하는 활동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 든 최악으로 상황이 번지는 것을 막고, 적절한 지점에서 상황과 커뮤니케이션을 관리해 내는 것이 잘된 이슈 및 위기관리다. 그 과정에는 해법들이 존재한다. 정답 대신 해법을 찾아보자. 좀더 유연하고 적극적으로 여러 고민을 해보자. 그리고 다양하게 실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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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 기고문] 어처구니없는 위기관리는 왜 사라지지 않을까?

[The PR 기고문]

어처구니없는 위기관리는 왜 사라지지 않을까?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가만히 보면 기가 차고, 웃음이 계속 나오는 위기관리가 있다. 더 정확하게는 그런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이 있고, 어처구니없는 메시지들이 난무하는 경우가 있다. 해당 위기관리 주체는 열심히 고민하고 나름 열성을 다해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짜고 메시지를 전달했을 텐데, 그걸 접하는 상당수는 당황스러워 하며 이내 실소를 터뜨리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잦다.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학벌에, 상당한 경영 훈련까지 받았다는 쟁쟁한 기업의 최고경영진이, 스스로 심각한 자세를 가지고 열심히 대응하려 만든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메시지가 왜 그런 결과로 이어질까? 그 아래 포진한 경험 많고, 현실감각이 뛰어난 임원과 관리자들은 대체 왜 그런 커뮤니케이션 메시지에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창구에서 열심히 해당 메시지를 전달하는 홍보실무자들은 실제로도 그 메시지가 괜찮고, 분명히 위기관리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까?

소기업이라면 대표를 포함한 몇몇이 고민해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때문에, 가끔은 그런 이상한 결과가 발생될 수도 있다 치자. 하지만, 중소기업을 넘어 대기업이라 불리는 거대한 인재 조직은 왜 그런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그런 메시지를 아무 의심 없이 발표할 수 있을까? 그에 관한 이유를 살펴보자. 왜 그럴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첫째, 사회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기업이 생각보다 많다

의사결정권자 개인의 사회적 감수성도 그렇지만, 조직이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감수성이 부족한 기업이 아직도 많다. 최근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이슈가 되고 실제 위기로도 이어지는 사회적 논란들을 살펴보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간다. 젠더 이슈만 해도 그렇다. 아직도 기업에서는 그냥 골치 아프고 시끄러운 이슈로만 접근하는 곳들이 있다. 사회적 공정이슈도 그렇다. 기업 스스로 지금까지의 관행에 갑작스럽게 왜 공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가 하고 묻는 기업들이 많다. 환경 이슈도 그렇고, 노동 이슈에도 그런 태도가 아직 존재한다. 새로운 세대라 불리는 MZ세대와 관련된 이슈는 어떤가? 단순하게 요즘 애들은…이라 막연하게만 생각하는 기업이 상당수다.

언론이나 규제기관 또는 시민단체들, 심지어 직원들과 노조, 거래처에서까지 사회적 감수성을 키워 달라 계속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기업의 사회적 감수성은 지지부진 상태인 경우가 상당하다. 전문가들은 세대가 바뀌고, 시간이 흘러 완전한 인식의 전환까지 연결되지 않는다면 이런 기업의 사회적 감수성 부족 현상은 계속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사회적 감수성이 부족한 기업은 위기관리 시 전쟁터에서 갑옷을 입지 않고 싸우는 벌거숭이 병사와 같은 꼴로 이해할 수 있다. 매 순간이 위험하기도 하고, 꼴도 흉하다.

둘째, 내부 시각으로만 사회적 이슈와 위기를 다루려 한다

자기 업계의 50년된 관행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 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만 봐도 그렇다. 외부 컨설턴트가 왜 이런 잘못된 관행을 이어가고 있는가 물으면, 이미 수십년간 해당 관행에 기반해 경쟁 해 왔기 때문에, 자사만 먼저 관행을 끊어 버리게 되면 경쟁에서 도태되니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일단 해당 관행이 문제가 되면 업계 모든 기업이 다치게 될 테니, 그때까지 유지하며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 이야기한다.

내부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당연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어느 대기업 퇴직 임원에게 ‘부조리가 상식화 되어야 그 회사 생활을 잘 할 수 있었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 부조리까지도 상식이 되는 기업 내부였다는 의미다. 이런 환경에서 내부 시각은 외부의 사회적 시각과 일부 갈등 또는 충돌하거나 심지어 그에 반할 수까지 있으므로 상당히 위험한 위기 요소가 된다. 내부의 시각으로만 외부 이슈나 위기를 다루는 것은 마치 눈을 감고 자신의 감에만 기반해 주먹과 발을 휘두르는 격투기 선수 같아 보인다. 운이 좋으면 상대에 타격을 입힐 수 있겠지만, 상대방은 눈을 뜨고 있으니 큰일이다.

셋째, 주변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부족하다.

해명문이나 입장문 심지어 보도자료 하나도 그렇다. 사회적 민감성이 없는 조직 의사결정자들이 내부적 시각으로만 읽어 문제가 없다 판단한다. 누군가 제3자적 입장에서 중립적으로 해당 메시지를 보아주더라도 어려운 커뮤니케이션을 그냥 쉽게 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그 공식 메시지를 접하는 언론과 온라인 공중들은 이내 배꼽을 잡는다. 어떻게 이런 메시지가 가능할까 하며 신이 나서 기사화를 하고, 포스팅이 이어진다.

메시지가 이상하니, 메시지를 내보낸 기업도 이상해 보인다. 그 기업의 오너나 임원들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유사한 사례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먼저 내부나 주변의 조언이나 검토 없이 쉽게 메시지를 내 놓는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상당한 비판과 비난, 비아냥이 이어지고, 온라인에서 희화가 되기 시작하면 해당 기업은 다시 그에 대한 사과와 해명을 내 놓는다. 그래도 문제가 사라자지 않으면 또 다시 사과를 발표한다. 그러면서도 사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자사의 최초 메시지를 오독하고 오해한 언론과 온라인 공중이 문제라는 확신이 존재한다. 일단 태풍이 부니 땅 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그나마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조아린다.

주변에서 담담하게 자사의 준비된 메시지를 읽어주고, 그에 대해 만에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의 해석과 감정을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을 찾아보자. 순서가 복잡해 보이고, 시간이 없어 급한 메시징이 필요하다고 해도, 바늘 허리에 실 매어 못 쓴다는 말을 기억하며 잠시라도 문제없을지를 여기 저기 물어보자. 그게 위기관리다.

넷째, 반대로 이상한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을 때도 있다

소위 우리가 비선이라 부르는 그룹들이 그렇다. 딱히 비선이라 불리지 않더라도, 최고의사결정권자의 지인이나 지인의 지인이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 일단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현 상황에서 어떤 조언을 의사결정자에게 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내 실무그룹이 없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이상하거나 이질적인 실행 방식이나 메시지가 내려온다면 바로 그것은 비선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 비선이 전직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던 분인지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이슈관리나 위기관리에서 가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주체는 해당 기업뿐이다. 그 기업 내에서도 부서별 위치 별 상황에 대한 정보량과 이해도가 달라지는데, 어떻게 비선 라인이 외부에서 전화 한통 받고 해결책을 제대로 제시할 수 있을까? 관심법이나 신기를 가지지 않고 서는 절대 불가능한 것 아닌가. 그래서인지 실제로 유명 무당이나 점쟁이가 기업의 비선인 경우도 있기는 하다.

다섯째, 위기관리 시스템을 갖추지 못해 항상 쫓기듯 커뮤니케이션 한다

이는 좀더 실무적인 주제다. 위기관리 시스템의 효용성을 몇가지로 추리자면, 첫째, 발생될 이슈나 위기의 조기 발견이 가능해진다. 둘째, 빠른 상황판단과 의사결정이 가능해진다. 셋째, 안정적인 이슈나 위기관리가 가능하게 된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여기에서 핵심을 다시 추리면 사전적 대응, 신속한 대응, 그리고 안정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사후대응 중심이거나, 때를 놓치고 늑장 대응하거나, 좌충우돌, 우왕좌왕, 들쑥날쑥, 허둥지둥 하는 위기관리 실행을 하는 기업은 위기관리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볼 수 있다.

일단 심각한 상황에서 이상한 메시지가 기업으로부터 나왔다면, 이는 정상적인 기업의 심사숙고의 결과물은 아닌 셈이다. 어떻게 이런 메시지가 정상적으로 탄생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일종의 조산(早産)인 가능성이 많다. 일단 시간이 너무 흐르니 이런 메시지라도 내고 보자는 내부적 조급함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기업이 얼마나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이슈나 위기관리의 성패는 상당부분 좌우된다. 기업이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가 하염없이 메시지를 다듬고 살펴서 때를 놓치곤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업은 제대로 된 메시지를 도출하는 과정이나 합의에 이르는 속도가 다른 기업보다 훨씬 빠르다. 그래서 그런 기업이 좀더 이슈나 위기관리를 잘 할 있다 하는 것이다.

여섯째, 커뮤니케이션 창구가 급해 애드립을 한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메시지를…이렇게 받아들여지는 일부 메시지는 해당 기업의 공식 메시지가 아닐 가능성도 높다. 언론이나 온라인 또는 관련 외부 조직에게 메시징을 한 그 기업 창구의 애드립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자신은 그냥 자신의 판단대로 언론에 이야기한 것인데, 그게 기업의 공식 메시지화 된 것뿐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변명은 매번 때가 늦은 것이다. 발칵 뒤집힌 회사 내부의 분위기를 접하게 되면 아마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일부에서는 그렇게 창구 담당자나 임원이 세상을 떠들썩 하게 만드는 애드립을 쳐서 사회적 공분에까지 이르게 된 시점에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 말이 실제 뭐가 잘 못되었는지 모르는 경우다. 솔직히 맞는 말을 했는데, 이해를 잘 못한다 하기도 한다. 못할 말을 한 건 아니지 않느냐 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위와 같은 내부 이야기가 나오면 그 상황은 상당히 어려운 처지다. 모든 애드립은 기본적으로 위험하다. 애드립에 익숙한 창구는 기본적으로 위험한 사람들이다. 애드립에 관대한 기업은 위기 요소가 풍부한 기업이다. 애드립의 정의는 준비되지 않은 모든 말이다. 준비를 거쳐 기업 내 공유와 확인이 더해져야 비로소 기업의 공식 메시지 자격이 있다.

마지막, 기업의 진정성이 그대로 메시지에 묻어나는 경우다.

회사가 사과를 해도 요즘엔 사내 직원들 블라인드에서는 다른 말이 나오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다. 심지어 회사의 공식 입장에 반하는 메시지를 공유한 직원을 적발하려 하는 곳도 생겼다. 기업은 공적 기관으로 사회적 책임에 기반해 공식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사내 임직원들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것이 진정성인가 할 때 많은 사람들은 블라인드에서 솔직한(?) 내부 분위기를 전달하는 그 포스팅이 좀더 진정성에 가깝다 볼 것이다. 그런 경우 기업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셈이 돼 버린다.

그 새로운 의미의 진정성(속마음)이 드러나다 보니 기업은 난감 해 진다. 그 속마음을 눈치챈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이 쓰나미 같은 비난을 쏟아 내니 더욱 더 죽을 맛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속마음이 아니라고, 일부 문제 있는 직원의 개인적 마음일 뿐이라고 아무리 외쳐 보아도 효과가 없다. 기업의 실체는 그 기업을 구성하는 직원들을 통해 구현된다. 직원들 개개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해당 위기상황을 바라보고 있는지 합치되지 않는다면, 위기관리에 성공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그렇게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위기관리는 바로 더 큰 위기로 이어진다.

성공적 위기관리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처구니없는 위기관리는 하지 않도록 노력해 보자. 어처구니없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리 힘든 노력까지는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감수성을 가지고 업데이트 해 나가려고 먼저 노력해 보자. 그게 그리 어려운 과학이나 큰 투자를 해야 하는 주제도 아니지 않나?

그 후 위기일수록 내부 시각은 종종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외부 시각을 좀 더 많이 들어보려 시도해보자. 어렵지 않다. 메시지를 만들었다면, 그것에 만에 하나 어떤 문제가 있을지를 주변에 물어보고 의견을 받아 보자.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이상한 조언을 하는 사람들은 멀리해 보자. 대신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조언을 하는 사람들과 친해져 보자.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위기관리 시스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효과를 노려보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애드립을 극히 경계하면서 메시지에 상당한 가치를 두는 습관을 가져보자. 신뢰와 명성이 생길 것이다. 마지막으로 직원들의 진정성과 기업의 그것을 합치시키려 지속 노력해 보자. 겉과 속이 같은 훌륭한 기업이 될 것이다.

이런 자그마한 노력들이 모자라면 언제든 어처구니없는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이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다. 그냥 한번의 실수나 잘못이라고 넘어가기만 해서 해결될 것은 아니다. 일은 해결되어도,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그 문제는 다시 돌아와 회사를 더욱 더 어처구니없게 만들 것이다. 그것을 두려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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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 기고문] 기업과 연예인의 위기관리는 어떻게 다를까?

[The PR 기고문]

기업과 연예인의 위기관리는 어떻게 다를까?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기본적으로 이슈관리와 위기관리는 다르다. 기업의 이슈관리와 연예인의 이슈관리도 다르고, 각각의 위기관리 또한 그 성격과 방식은 많이 다르다. 단순 설명하면 이슈관리 때에는 이슈관리 주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위기관리 보다 상대적으로 다양하다. 잘만 관리하면 소위 말하는 기회를 창출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이슈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곧 위기가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위기관리는 그와 반대다. 위기관리 주체에게 가용한 선택지의 다양성이 적다. 해야 하는 것들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의미다. 뼈와 살을 도려내는 아픔과 책임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잘해도 본전이다. 본전 건지기라도 할 수 있다면 상당히 운이 좋은 경우다. 위기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회사나 자신이 망한다. 또는 망하는 계기가 조성된다. 위기관리를 잘하면 기회가 온다는 이야기는 실제 위기관리에 적용가능한 것은 아니다. 위기가 발생되면 경쟁사에게 오히려 기회가 주어질 뿐이다.

최근 방송을 비롯한 다양한 미디어에서 셀럽의 위치에 있는 연예인들이 개인적 이슈를 맞아 고군분투하고 있다. 몇 년 전 미투 논란에 이어, 최근에는 학폭(학교 폭력)이 주된 프레임이다. 가끔 연예인 또는 유명인에 관련한 이슈관리 서비스 의뢰가 들어오는데, 기업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 배경 상, 유명인 개인의 이슈관리 요청은 가급적 응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의 이슈관리 및 위기관리는 연예인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또 어떤 점들이 유사할까? 왜 기업의 대응 방식을 연예인이 따라하면 안 될까? 반대로 왜 기업은 연예인의 대응 방식을 따라하면 위험할까? 그들 간의 차이와 유사점들을 정리해 본다.

맷집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기업은 명성(reputation)을 방어하기 위해 이슈 및 위기관리를 한다. 이슈나 위기로 인한 사업적 피해를 최소화하고, 비지니스 연속성을 지켜 나가기 위함은 기본이다. 반면, 연예인은 이미지(image)를 방어하기 위해 이슈 및 위기관리를 한다. 물론 연예인으로서 기존 활동을 얼마나 유지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하는 것은 기업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슈나 위기 시 기업의 명성은 ‘금이 가거나’ 또는 ‘(일부)손상 받는’데 비해, 연예인의 이미지는 ‘깨지거나’ 또는 ‘사라진다.’

기업의 명성은 성과 같아서 일부가 무너지고, 부식이나 침식이 되는 고통을 겪어도 완전하게 무너져 내려 가루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연예인의 이미지는 거울과 같아서 한번의 충격에도 산산조각이 나곤 한다. 유사한 이슈나 위기 상황에서 기업과 연예인간에 맷집의 차이는 이 때문이다.

대응 속도가 다르다

이슈나 위기가 발생한 시점을 기준으로 기업이나 연예인은 공히 신속하게 대응하려 한다. 그러나 기업의 의사결정 프로세스는 연예인 개인이나 소규모 그룹의 의사결정 프로세스보다 훨씬 길고 소모적이다. 당연히 기업의 물리적 대응 시점이 연예인의 대응 시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늦다.

하지만, 기업은 대부분 ‘대응’에 초점을 맞추어 의사결정 하는 반면, 연예인은 ‘반응’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대응과 반응은 다르다. 대응은 다양한 상황분석과 로드맵을 숙고한 채 상당한 변수를 통제하려는 실행 방식이다. 반응은 자극에 대한 반사적 실행이다. 당연히 숙고의 과정과 변수 통제의 개념이 적다. 공히 속도는 중요하지만, 항상 빠르기만 한 것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커뮤니케이션 채널의 다양성이 다르다

기업이나 연예인은 공히 상시 다양한 미디어 채널을 통해 공중이나 이해관계자들(연예인의 경우에는 팬)과 커뮤니케이션 한다. 자사 또는 자신을 담당하는 기자그룹도 존재한다. 기업은 이슈나 위기관리를 할 때 기존의 다양한 미디어 채널들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단순 사과 보도자료로만 그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반면, 연예인은 이슈나 위기관리를 할 때 가능한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단순화한다. 자신에게 익숙하고,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채널을 선택한다. 연예인들이 이슈나 위기관리 방식으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자필 사과 편지를 올린다 거나, 몇 줄 메모를 게시하는 방식이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외 동일 건으로 언론을 활용해 재 커뮤니케이션 하거나, 여러 미디어 채널을 통해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지는 않는다. 이는 각자 전략적 선택의 결과이지만, 상당한 다름이다.

레토릭이 다르다

기업의 경우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이슈 및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레토릭을 구사할 수 있다. 사과, 해명, 반박, 무시와 같이 레토릭 전략을 대별할 수 있지만, 그 각각에도 다양한 세부 레토릭이 존재한다. 이는 기업 이슈와 위기의 특성 상 상황과 변수들이 다르고, 대상들이 다양하고, 변수가 연예인 개인보다는 다양하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레토릭이 구조화 다양화된 것이다.

그러나, 연예인의 경우 공통적 레토릭은 단순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많은 것이 사과다. 일부 해명이나 반박도 존재하지만 주를 이루는 연예인의 레토릭은 사과다. 한방에 깨져 버릴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이미지를 재빨리 방어해야 하다 보니, 사과는 거의 필수가 되었다. 사과의 형식 또한 기업의 사과와는 수위와 진정성이 달리 표현된다. 최근 케이스를 보면 연예인들의 사과문은 길고 길다. 사과문이 길면 길수록 진정성을 담보한다고 믿는 경우도 있다. 기업과 다른 점이다.

피해 상대의 범위가 다르다

어떤 이슈나 위기의 경우이든 그로 인해 피해나 아픔을 호소하는 이해관계자들은 생겨난다. 기업의 이슈나 위기의 경우에는 그러한 이해관계자들의 범위와 다양성은 거대하다. 제품하자의 경우만 해도 직접 피해를 호소하는 소비자의 수는 상당하다. 사건이나 사고의 경우에도 이해관계자의 범위는 연예인의 그것에 비해 크다.

연예인의 이슈나 위기는 기본적으로 연예인 개인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피해나 아픔을 호소하는 이해관계자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다. 물론 관심 없던 공중이나, 너무 관심이 많은 팬들까지를 포함한다면 그 규모는 커질 수 있지만, 직접 이해관계를 형성하는 대상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사람들의 폭발적 관심이 곧 전부 이해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 상대인 이해관계자 규모나 다양성이 적다는 의미는 그들에 대한 원점관리가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다는 의미와 통한다. 연예인들이 상대를 찾아가 사과하고, 만나 해명하고, 개인적 관리를 시도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기업은 그런 원점관리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의사결정 그룹의 성격이 다르다

기업은 이슈나 위기 발생 시 집단적 의사결정을 시도한다. 개인기에 의존하려 하지 않는다. 팀, 위원회, 카운슬과 같은 의사결정 그룹이 대응에 대한 의사결정을 주도한다. 다양한 전문성을 지닌 구성원들이 더 나은 대응 전략과 방식을 모색한다. 외부 조력 그룹과의 협업도 흔한 일이다.

그에 비해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개인이 의사결정을 한다. 일부 기획사 담당 직원들에게 지원을 받거나, 변호사 조력을 받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해당 연예인의 판단과 생각이 주다. 즉, 연예인이 이슈나 위기의 발화점이며, 대응 전략과 방식의 결정 주체이며, 이슈나 위기관리의 실행자다. 기업은 집단적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반면, 연예인은 개인기를 발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다르다.

이슈의 복잡성이 다르다

당연히 기업 이슈가 개인인 연예인 이슈 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성격을 띤다. 단순 의사결정에도 매우 다양한 전제와 변수들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 기업 이슈다. 일단 이해관계자 범위와 규모가 상당하기 때문에, 의사결정 하나 하나에도 그에 대한 영향을 다각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외부 경쟁이나 투자, 규제 등의 변수는 물론이다.

연예인의 경우 발생된 이슈의 성격은 대부분 단순하다. 법적 책임이 있는 이슈, 사회적 지탄을 받을 만한 이슈, 사소한 해프닝 등으로 대별 가능하다. 일단 어떤 이슈가 발생하던, 연예인으로서 지속 활동 가능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응은 기본이다. 이슈가 단순하기 때문에, 대응에 대한 의사결정도 일견 단순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 대부분 정답이 있는 이슈라는 의미다. 기업 이슈는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대응 옵션이 다르다

사과 주체의 옵션만 해도 그렇다. 기업에서는 일부 상황에 따라 담당팀의 사과로도 대응 가능한 경우가 있다. 담당 임원도 가능하다. 대표나 오너가 사과해야 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대응에 있어 단계가 존재한다. 상황의 중대성에 비추어 옵션을 달리 할 수도 있다.

연예인의 경우에는 혼자 뿐이다. 일부 기획사에서 대리 사과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일단 사과의 주체는 해당 연예인이다. 문제는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 경우다. 연예인이 다시 사과를 반복하고, 그것도 모자라 기자회견을 해서 큰 불을 꺼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대응 단계와 옵션이 상당히 단순하다. 연예인이 스스로 결자해지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방지, 완화 가능성이 다르다

기업은 구성원이 매우 많고 다양하다. 그들에 의해 발생되는 위기의 유형이나 빈도도 많다. 사전 방지나 완화 같은 경우에도 스스로 통제하려 애쓰지만, 완전하게 통제 가능한 부분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최근 기업관련 부정 이슈 발생 시 회사에서는 공식적으로 사과하는데, 직원들이 참여한 블라인드에서는 회사와는 다른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기업 내에서 퉁제 가능한 부분이 사라지며, 통제 불가능성은 극대화되고 있다.

반면 연예인의 경우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제하기만 하면 이슈나 위기의 발생을 방지 또는 완화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소속 연예인의 음주운전이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운전을 하지 못하게 하는 연예기획사도 있다. 사적인 자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까봐, 소속 연예인들의 유흥시설 출입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다. 연예인 스스로 준법하고, 스스로 주변을 사리면 상당한 이슈나 위기는 방지되고 완화될 수 있다. 깨지기 쉽지만, 이미지를 유지하기도 어찌 보면 쉽다.

관리 주체의 연속성이 다르다

기업의 위기관리팀은 계속 바뀐다.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임원들도 몇 년마다 바뀐다. 대표도 마찬가지다. 자사 위기관리 역량이 축적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몇 년 전 경험했던 자사 위기를 실제 깊이 알고 있는 임직원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슈나 위기가 매번 새로울 수 있다. 지난 케이스로부터 얻은 인사이트가 사라져 그 다음 케이스에서는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연예인의 경우는 다르다. 자신이 경험한 이슈나 위기에 대한 스스로의 깨달음이 지속된다. 장기간 동안 다양한 이슈를 경험해 본 연예인은 백전노장의 모습을 띤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억이 있다. 문제는 그런 자만심이 더 심각한 이슈나 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문제를 반복해서 만드는 연예인들이 그런 류다.

예산이 다르다

위기관리는 예산으로 한다는 말이 있다. 기업의 이슈나 위기관리에 할당되는 예산은 연예인의 그것보다는 상대적으로 크다. 다양한 미디어 채널을 통해 광범위한 어프로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예산은 일정 수준이 되어야 한다. 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이나 시민의식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예산은 필수다.

연예인은 사실 개인이다. 아무리 스타라고 해도 자신과 관련된 이슈나 위기관리를 위해 쏟아 부을 수 있는 예산은 한정적이다. 가장 큰 위기관리 예산은 아마 로펌 비용일 것이다. 대형 로펌을 고용하는 스타들도 있는 반면,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아는 변호사들을 활용한다. 기획사가 위기관리를 지휘해도 내부 인력들을 활용하여 대응하는 것이 고작이다. 예산의 다름은 이슈 및 위기관리 품질의 차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 외 기업과 연예인의 이슈 및 위기관리에 있어 유사점도 몇 가지 된다. 일단 기업이나 연예인 공히 이슈나 위기가 발생했을 때 외부로부터의 훈수가 많다는 것은 유사하다. 일종의 비선라인이 존재하여 대응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비슷한다. 구체적 상황정보가 내부에 공유되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기업이나 개인 공히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숨김이나 선택적 공유가 대응 방식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기업 VIP 이슈관리는 스타급 연예인 이슈관리와 성향이 비슷하다. 초기 대응방식에 성패가 갈린다는 것도 비슷하다. 책임자가 물러나면 일단 해결된다는 점도 그렇다.

기업과 연예인의 이슈 및 위기관리 방식을 비교하며 차이점과 유사점을 나열한 이유는 실무적 혼동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기업은 절대 연예인의 이슈 및 위기관리 방식을 따라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연예인도 기업의 이슈 및 위기관리 방식을 모방하다 보면 위험해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니 주의해야 한다. 기업은 기업대로, 연예인은 연예인대로,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종교인은 종교인 대로 자신에게 맞는 이슈 및 위기관리 방식이 있다. 그간에 기준 없는 혼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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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2021 0 Responses

[The PR 기고문] 사과의 원칙에 맞서는 변명들

[The PR 기고문]

사과의 원칙에 맞서는 변명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기업이나 셀럽들이 큰 문제와 마주했을 때 가장 흔히 선택하는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바로 ‘사과’다. 상당히 많은 문제들이 사려 깊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이 ‘사과’는 곧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자체 또는 전부로 까지 오해되기도 한다.

물론 적절한 ‘사과’없이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모든 위기 상황에서 ‘사과’가 필수적인가 하는 것에는 논의가 필요하다. 무조건이라는 개념은 전략적이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과의 원칙에 대해서도 ‘무조건’이라는 기준이 있다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 무조건적 원칙을 따를 때 생기는 추가적 문제에 대해서도 좀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업이나 조직의 사과라는 것이 종교적 고해성사나 개인간 사과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기 때문에, 사과의 원칙에 대한 보다 조심스러운 이해와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에도 여러 기업과 셀럽이 연이어 사과문을 공개하고 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그들 대부분이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사과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일부 개인 셀럽의 경우 자필 사과문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 주요 트렌드가 되겠다. 반면, 기업들의 경우 예전 같은 일간지 지면을 통한 사과광고의 빈도는 대폭 줄었다. 최근 들어서는 대대적으로 기자회견을 자청해 경영진이 고개를 숙이는 사과 퍼포먼스도 점차 줄어가는 느낌이다. 사과가 이제는 일반화되었고, 하나의 통과의례와 같이 변해 버렸다고 볼 수 있겠다.

이번 글에서는 기존의 대표적 사과의 원칙에 대한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실무자들의 변명 또는 반론을 모아 정리해 본다. 무조건적 사과의 원칙 도그마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직접 피해자에게 구체적으로 사과하라?

맞다. 피해자에게 직접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과하라는 말은 적절하다. 두리뭉술하게 사과하는 척을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운전사를 폭행한 회장님이 문제를 제기한 운전사를 찾아가지 않고, 먼저 기자회견을 열어 전혀 상관없는 기자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황당한 케이스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문제를 제기한 원점(source)은 가해자를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일단 만나서 마음을 풀자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가해자의 순진한 생각이다. 문제를 제기한 원점은 일종의 원한과 복수심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원한과 복수심이 없었으면 아예 문제를 제기하거나 폭로하지 않는다. 대신 그전에 상대를 찾아가 직접 사과를 요구하고, 용서하려 노력한다. 그런 일련의 노력들이 실패했거나, 하기 싫었기 때문에 원점은 원한과 복수심을 가지게 된다.

그런 감정 수준의 원점에게 가해자가 직접 찾아가 사과를 한다는 것은 이상적이긴 하지만, 가능한 경우는 적다. (원한이나 복수 감정이 아주 약한 원점의 경우에만 일부 가능)

일단 만나기 힘든 원점을 대상으로 구체적으로 사과하는 것도 어떻게 현실적이 될 수 있을까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나주지 않고 가해자를 피하는 원점에게 대체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인 사과를 전달할 수 있을까? 가해자로 폭로 된 모 기업 오너 자제의 경우 피해자를 찾아가 빈집 문에 쪽지 메모를 꽂아 놓기도 했다 하던데, 그런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운 좋게도(?) 원점이 만나주겠다, 사과를 들어 보겠다 하는 경우라면 ‘피해자에게 구체적으로 사과하라’는 원칙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원점이 그 모든 것을 꺼리는 경우에 가해자는 어떤 차선책을 실행해야 할까? 바로 대외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옵션 뿐이다.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에게 해당 문제에 대한 자사나 자신의 입장과 사과 메시지를 공개하는 실행이 그 때문이다.

여기에서 어려움은 또 있다. 원점이 아닌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에게 사과 할 때 얼마나 문제관련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고민이다. 자신과 원점 밖에 모르는 아주 민감한 내용까지 충실하게 담아야 하는가 하는 가에는 여러 반론이 있다. 지나치게 구체적일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왜 문제 당사자가 아닌 공중이나 이해관계자에게까지 그런 구체적 내용을 설명해 가며 스스로 논란을 키워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사실 답이 부족하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한 후 사과하라?

일단 큰 문제를 제기한 원점이 만족할 만한 가해자의 공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희귀하다. 심지어 가해자가 종교적 회개와 스스로를 향한 형벌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피해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은 없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구나 그 원점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가해자가 제대로 공감할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 원점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고통은 절대로 정확하게 표현하거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섣부른 가해자의 공감은 원점의 더욱 더 큰 분노만 자아낸다. 이해되지 않는 고통에 대한 어설프면서 구체적인 가해자의 공감 커뮤니케이션은 곧 폭력이다.

흔히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면 공감이 떠오른다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기업이나 조직 그리고 일부 셀럽은 그럴 수 있는 주체들이 아니다. 다양한 여러 변수들과 주변 조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역지사지는 개인적 마음으로는 가능하지만, 조직 차원에서 실체적 커뮤니케이션으로 나타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사과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비판 받는 기업이나 조직의 경영진들이 모두 비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가해자는 대부분 피해자의 고통을 공감할 수 없다. 이전에도 없었고, 문제가 불거진 이후에는 더욱 더 공감이 어렵다. 그 대신 문제 제기를 통해 자사 또는 자신에게 피해를 준 원점을 도리어 가해자라 생각하며, 자신의 고통에 스스로 공감하기 시작할 뿐이다. 제대로 된 공감의 형성이 이렇게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도 어림짐작 한 공감을 절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일반적인 공감 수사로 자사 또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것이 나을까? 어떤 것이 최악일까 예상하여 최악을 피하는 것이 위기관리인데, 어떤 옵션이 최악을 피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기업이나 조직 그리고 유명 셀럽의 경우 ‘공감’은 적절한 배상 또는 합의방식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리적이나 정서적 공감은 완전하게 불가능하더라도, 크고 적극적인 배상액이나 합의방식을 제시한다면 일정 수준 이상 공감으로 주변에게 이해 받게 된다. 이 때도 피해자가 이해하는가는 또 다른 주제다.

조건 없이 사과하라?

개인적으로 사과할 때 이렇게 조건을 달아 사과하는 것은 일종의 비아냥에 가까워 피해야 할 금기인 것이 맞다. 개인적으로 사과를 받아주려 하던 피해자도 빈정 상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그러나 원점이 만나주지 않을 때나, 연락할 방법이 없거나,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만나주신다면 용서를 빌겠습니다” 하면 안 될까?

더구나 지금 사과가 여러 상황으로 여의치 않아 일단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에게 자사 또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사과 형식이라면 더욱 더 이런 의지의 표현은 필요하지 않을까? 충분히 상대를 만나 조건 없이 사과할 수 있는데,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사과의 입장을 표현하는 경우가 문제이지, 그런 조건을 토로하는 경우 자체가 문제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말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표현 쓰지 마라?

그러면 어떤 표현을 써야 하나. 사과드리면서 용서를 구한다는 표현을 빼고 어떤 사과가 가능한가. 일부에서는 용서해야 할지 말지는 피해자가 판단할 일이니 자꾸 용서를 구한다 하는 것은 2차 피해를 의미한다 하는데, 그런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는 전체적 사과의 맥락과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수사학적으로 표현 단위 하나 하나를 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고, 용서를 받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게다가 상당수의 원점은 용서를 해 줄 의지가 희박한데, 용서를 빌지도 못한다면 그 진짜 용서는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종교적인 회개와 용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처벌이 현재 기업이나 조직 상황에서 가능할 것인가? 자신이 사용한 제품에 이물질이 나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피해자가 회사에 용서를 받기 위해 제시한 조건이 과도하다면 이를 필히 시행해 진짜 용서를 구해야 할까? 이물질에 책임지고 대표이사가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모든 일간지 전면에 사과 광고를 싣고, 매출의 1프로를 자신이 정한 기관에 기부하라는 요구를 들어주면서 진짜 용서를 얻어내야 할까? 조건 없이 용서를 구하려면 말이다.

대중은 가해자에게도 사과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최근 들어 발견한 아주 새로운 사과의 원칙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주장은 만약 대중이 가해자에게 사과를 강요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가해자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상황은 가해자에게 기본적으로 위기상황이 아니다. 대중이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을 때나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항상 문제의 주체나 가해자에게 사과를 강요하게 되어있다. 이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는 이를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좀더 나은 사과를 꾀한다. 대중의 압력 처럼 강력하고 위협적인 위기관리 동력이 없다.

위와 같은 주장은 일견 대중의 압력에 밀려 기업이나 조직 그리고 셀럽들이 대충대충 사과를 하는 상황을 지적했다고 본다. 하지만, 현실적 대중이나 정상적 위기관리 주체에게는 해당하는 원칙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의 사과 압력은 더 강해져야 하고, 보다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나 조직 그리고 셀럽 스스로 제대로 된 위기관리를 하게 된다.

여러 사과의 원칙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현실적이라 생각하고 공감 큰 사과의 원칙은 이것이다. “제대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은 크게 사과해야 할 일을 만들지 않는다.” 여러 전문가들은 사과의 원칙을 ‘제대로 사과할 줄 모르는 기업, 조직, 사람’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나마 좀 더 나은 사과를 하도록 하는 조언이다.

하지만, ‘제대로 사과할 줄 하는 기업, 조직, 사람’에게는 그 원칙이 전략적 조언이 아닌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주어진 상황과 여러 주변 조건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석하고 고안해 낸 사과가 훌륭한 사과다. 원점이 마음을 바꾸고, 용서해 주고, 결론적으로 다같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류의 동화에 기반한 사과가 과연 현실에 존재하는가는 각자 판단할 일이다. 사과는 원칙 보다는 전략의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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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2021 Tagged with 0 Responses

[The PR 기고문] 책에 쓰지 못하는 위기관리 아포리즘

[The PR 기고문]

책에 쓰지 못하는 위기관리 아포리즘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위기관리 이론이나 실전 인사이트가 쓰여 있는 책들은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원칙이나 방법론은 상호간에 유사하다. 그도 그럴 것이 위기관리 원칙과 방법론이 서로 전혀 다르고 수 없이 많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원칙이나 방법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들이 위기관리 서적에 쓰지 못하거나, 쓰여 남겨지는 데 적절하지 않은 일부 원칙과 방법론은 분명 존재한다. 그런 류의 원칙과 방법론을 기본적으로 부정적이거나 탈법적인 것으로 해석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들 대부분은 실제 기업 내부의 사정과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며, 위기관리 주제가 따라야 하는 당위성을 일부 대체하는 유효한 기술적 원칙일 뿐이다.

가끔 위기관리 강의를 하다 보면, 기업 경영진의 표정에서 ‘공자의 말씀을 하시는 군’하는 갑갑함을 느낄 때가 있다. 무언가 실제 써먹을 수 있고, 현장에서 바로 통하는 특제처방을 원하는 것이다. 그 바램 대로 이번에는 만병통치약이나 즉효약 까지는 아니지만, 때에 따라 해결사는 될 수 있는 위기관리 아포리즘(aphorism)을 정리해 본다. (아래 보면 기록을 남기지 말라는 원칙이 있는 데 결국 이렇게 기록을 남긴다)

  1. 큰일 일 수록 혼자 하자

비밀은 모두가 죽었을 때 지켜진다는 말이 있다. 기업 위기에 있어서 여러 경영진이 관여되어 있는 이슈나 사건이 많다. 그 관행이나 실행에 진짜 문제소지가 있다면, 관련자와 비밀을 지켜야 하는 사람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래야 사후 위기관리도 간단 해 진다.

  • 감정 대신 주판을 튕기자

자사에 대한 부정 여론이 일어나면, 경영진은 상당한 심적 부담과 상처를 토로한다. 합리적 의사결정이나 상황 판단을 방해하는 감정적 장애가 생긴다. 감정을 최대한 멀리하고 해당 이슈나 위기로 인한 피해나 손해를 정확하게 계산하자. 어떻게 해야 그것들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에 대신 몰두하자.

  •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가만히 있어도 일정 수준 상처로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남은 상처는 일정기간 노력을 통해 흔적을 지워 나갈 수 있다. 당장 입은 작은 상처를 참지 못해 정신없이 반응하고, 전략 없이 실행을 다양화해서는 안 된다. 지나면 별 것 아닐 일을 마구 긁어 상처를 크게 만든 경우가 많다. 일단 견뎌보자.

  • 항상 걸린다 생각하자

말로만 투명사회라 하지 말자. 모든 부정적 의사결정과 그에 관한 활동과 근거들은 남는다. 털면 털린다는 말을 명심하자. 털리지 않아 그렇지 어떤 언론이나 기관이든 마음먹고 자사를 털면 털린다. 문제나 논란이 될 것에 대해서는 미리 법과 여론 차원의 해명이나 설명, 반박 근거들을 준비하자. 그래야 사후 데미지컨트롤이 일부라도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죄는 걸린 죄다.

  • 기록 남기지 말자

모든 행동은 기록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으로 만든 기록이나, 사려 깊지 못해 만들어지는 기록을 경계하자. 최근 이슈와 위기관리 케이스를 보면 남아 있는 기록들이 후폭풍의 기반이 된다. 이슈와 위기관리 시 기업 내 의사결정 그룹의 기록은 결국에는 지뢰로 남는다. 단, 우리의 기록은 남기지 말되, 상대의 기록은 챙기자. 혹시라도 도움이 될 때가 온다.

  • 사적인 말은 화를 부른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허심탄회란 전략이 없다는 의미다. 막말의 정의는 준비하지 않고 내 뱉은 말이라는 뜻이다. 사적인 말이 포털이나 소셜미디어에서 그대로 방송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예전에는 기자에게만 말 조심하면 되는 환경이었지만, 이제는 경영진 주변 모든 사람이 기자다. 말이 화를 부른다는 말은 이제 불변의 진리가 되었다.

  • 얼굴 가리지 말자

부정 이슈와 위기가 발생했을 때 언론의 취재를 받게 되면, 경영진들은 얼굴을 감싸고 가리며 피하려 한다. 사진 찍히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느낀다. 우산이나 서류 봉투로 얼굴을 가리려 노력하기도 한다. 그런 행위는 언론의 보도 장면을 흥미롭게 만들 뿐 아무 의미도 없다. 공중의 인식 형성에도 유리하지도 않다. 뉴스를 재미있게 만들지 말자.

  • 위기관리, 어설프게 하려면 차라리 가만 있자

흔히 침묵은 죄의 인정이라 한다. 하지만, 어설픈 커뮤니케이션은 죄의 확정이다. 여론의 법정을 통한 죄의 확정 이후에는 아무런 위기관리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위기관리에서 어설픔이나 준비되어 있지 않음은 재앙을 부르는 주문이 된다.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불쌍하게 보이기라도 한다.

  • 유죄추정의 법칙이 현실이다

마녀사냥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마녀로 의심받는 자는 어떤 반론을 해도 결국은 죽는 구도다. 마녀는 물에 뜬다는 기준에 따라 피의자를 묶어 깊은 물 속에 담그기도 했다. 그가 떠오르면 마녀임을 입증한 것이라 끌어 내 화형을 시킨다. 반대로 오랫동안 물에 뜨지 않으면 그 피의자는 죽는다. 마녀사냥을 피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마녀가 할 만한 짓을 하지 않는 것 뿐이다.

  1. 할 수 있는 것을 중요도에 따라 하자. 차근차근.

급한 복통에 고통받으며 화장실 앞에서 여러 겹 옷을 벗으려 혼자 발버둥 치는 사람을 상상해 보자. 주변에 여럿이 도와주었으면 어땠을까? 심한 복통이 오기 전에 미리 옷을 벗어 놓거나, 많은 단추를 풀어 놓았다면 어땠을까? 신속대응은 미리 준비해야만 가능하다. 그 때가면 어떻게 되겠지는 착각이다.

  1. 얼굴 알려질 수록 잃을 건 는다. 섣불리 얼굴 내지 말자

공중에게 많이 알려진 VIP와 잘 알려지지 않은 VIP가 같은 실수를 범했다면, 상대적으로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분은 누구일까? 착한 기업으로 이름 날리던 회사와 잘 알려지지 않은 회사가 같은 문제를 발생시켰다면?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지는 것은 때때로 죄다. 최소한 큰 부담이며, 비용이다. 제대로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유명해지지 말자.

  1. 위기관리는 단호해 보이면 된다. 당당하자.

문제가 생겼다. 그것이 실수 건, 해프닝이건 개선책과 재발방지책을 발표하면 문제는 풀린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개선책과 재발방지책의 수준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 발생한다. 최대한 단호하고 과감하게 사과하고 개선과 재발방지책을 제시할 수록 오히려 칭찬받을 가능성은 커진다. 개선과 재발방지를 위한 의지는 당당해야 인정받는다.

  1. 홍보한다면서 위기 만들지 말자

홍보와 위기는 한 끗 차이다. 홍보를 잘 못하면 위기가 된다. 위기관리는 잘하면 홍보가 된다. 노이즈 마케팅이었다는 사후해명은 대부분 말장난이다. 노이즈가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이라면 그건 그냥 위기일 뿐이다. 그 노이즈를 최초 기획했을 때 목적이 무엇이었던 가에 답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시끄러우니까 그냥 노이즈 마케팅 아니냐 하진 말자.

  1. 뭘 안해서가 아니라 뭘 하니 죄가 된다

위기관리 매뉴얼과 실행을 바라보는 시각을 이해하라는 의미다. 위기관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후 평가가 부정적일 가능성은 줄어든다. 반면, 위기관리를 위해 무언가를 나서서 했을 때에는 사후 평가에 부담을 지게 될 가능성은 는다. 이를 임직원 모두는 동물적 감각으로 알고 있다. 복지부동에 대한 경고와 함께 적절한 실행 가이드라인을 주어야 위기관리는 시작된다.

  1. 내가 살아야 위기관리다

회사의 위기라고 해도 일단 내가 살아야 한다. 내가 일단 피해 입지 않는 범위에서 위기관리도 가능해진다. 그래서 회사의 위기관리 목표와 임직원 개개인의 위기관리 목표는 종종 동일하지 않다. 많은 기업의 위기관리 매뉴얼에서 이 매뉴얼에 따라 위기대응을 하면 사후에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 적어 두는 이유다.

  1. 요즘 누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지는 좀 알자

똑같은 짓 당분간 하지 말자는 의미다. 경쟁사가 갑질 논란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우리 회사도 돌아봐야 한다. 대기업 블라인드에 불이 붙었다면, 그 내용을 우리 회사에서도 들어보고 이해해야 한다. 여론은 떼를 지어 몰려 다닌다, 누가 현재 어떤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지 알아야 똑 같은 길을 가지 않을 수 있다.

  1. 위기대응 하는 실무자들이 날수 있게 하자

어떤 위기관리 체계를 만들더라도 실무자들이 실행을 어려워하고, 실행에 걸림돌이 되는 체계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경영진이 핸들링 하기 좋은 체계보다 실무자들이 쉽고 편하게 실질적 위기대응을 할 수 있게 하는 체계에 좀 더 신경 쓰자.

  1. 어차피 책임은 결국 대표가 진다. 그러니 먼저 말하자

왜 내가 책임 져야 하는가 하는 말은 종종 괘변이라 욕을 먹는다. 대표이사나 조직의 장은 책임을 지는 자리다. 자신이 아니라 주장해도 결국에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위기를 관리하는 가 아니면 위기에 의해 관리되는 가는 중요한 차이다. 먼저 스스로 내가 책임질 테니 최선을 다해 위기를 관리하자 말 하면 사후에 차라리 남는 것이라도 있다.

  1. 일단 욕먹은 것은 빨리 고치자

어떤 기업 케이스이건 예전에 욕만 먹고 안 고치면 더 욕먹고 또 욕먹게 된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회사 명성은 계속 곤두박질 친다. 예전에 문제가 되었거나, 다른 기업이 욕먹는 부분은 재빨리 찾아 개선하고 재발방지 하게 만드는 게 필수다. 더 중요한 건 욕 먹을 짓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 착한 기업은 없다

착한 기업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착하게 계속 보이려 노력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를 위해 평시나 위기 시 일관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위기관리다.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보다 훨씬 눈에 띈다는 것을 이해하자. 그들보다 훨씬 더 다양하게 욕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자. 그래서 더욱 더 주변과 자신을 살피며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생각하자. 그 뿐이다.

  • 막말인지 아닌지는 화자가 제일 잘 안다. 자신을 속이지 말자

자신이 한 말로 논란이 일어났다면, 스스로 먼저 질문하자. 그 말이 사전에 준비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돌발적으로 나온 것이었는지 판단해 보자. 사전에 준비된 것이었다면 그 준비에 문제가 있었음을 사과하자. 돌발적이었어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준비된 말은 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발생한 논란을 두고 화자가 자신을 속이면 논란만 더 커진다.

  • 여러 회사가 동시에 위기관리 할 때에는 다른 회사들 보다 딱 한 발자국만 잘 하자

곰을 만날 때 뛰어야 하는 이유는 곰보다 빨리 뛸 수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옆 사람보다 멀리 도망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뛰는 것이다. 많은 기업이 동시에 같은 문제에 엮였을 때에는 불필요하게 튀거나 뒤쳐지지만 않으면 산다.

  • 공감은 돈 안 든다. 인색하지 말자

공감은 이해를 전제로 한다. 공감을 책임인정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주어진 상황과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이해하게 되면 이해관계자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기업을 인간화 하여 커뮤니케이션 하는 데 성공하면 위기는 생각보다 쉽게 풀린다. 공감의 힘을 믿자.

  • 가장 최고의 위기관리 경지는 위기관리가 필요 없는 수준이다

이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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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2021 Tagged with 0 Responses

[The PR 기고문] 사람들은 기업을 인간으로 이해한다

[The PR 기고문]

사람들은 기업을 인간으로 이해한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어린 아이들은 종종 사물을 마주할 때 마치 그것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 심지어 인형, 장난감, 의자, 선풍기 등과 대화를 나누는 아이들도 있다. 각종 동화나 애니메이션에서도 사람의 모습으로 말과 행동을 하는 동물과 사물이 인기 많은 주인공이다. 심리적으로 사물을 인간화 하여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 것은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과 기업의 관계도 그렇다. 사람들이 기업을 인간처럼 이해하고 관계 맺으려 하기 이전에, 오래전부터 기업은 사람들 머릿속에 자신이 자리잡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기업 광고에서 유명 모델을 내세우거나, 사람을 로고로 만들거나, 이미지 좋은 사람을 홍보대사로 임명했다. 오너나 대표이사가 다양한 스타일로 대중에게 직접 나서기도 한다. 우리가 다양한 기업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여러 인간의 모습이 그 때문이다.

기업 자체로는 인간의 모습을 띠지 않지만, 사람들이 기업을 생각할 때에는 특정한 인간의 모습을 떠올린다. 어떤 기업은 세련되고 스마트한 청년의 모습이다. 어떤 기업은 우직하고 성실한 아저씨의 모습이다. 애정 있고 상냥한 엄마의 모습도 있다. 어떤 기업은 이국적이고 혁신적인 스타일의 셀럽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기업을 인간으로 받아들여 이해하고, 관계를 그린다.

기업 위기관리 관점에서 이 기업의 인간적 면모는 아주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기반이 된다. 평시와 위기 시 일관성이라는 기준을 두고 볼 때 기존 보유하던 인간성 자산을 위기 시 얼마나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가에 위기관리 성패가 갈린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위기 시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한 기업들의 주된 인간적 유형을 살펴본다.

그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평소 엄청난 광고 및 홍보 물량으로 사람들과 꾸준하게 커뮤니케이션 하는 기업이 있다. TV나 온라인 상에서 끊임없이 그 기업의 메시지가 흘러나오고,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찬사가 메아리 친다.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그 기업을 아주 멋지고 좋은 친구로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그 기업과 관련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찾아다니고, 그들이 베푸는 여러 사회활동과 행사에도 흔쾌하게 참석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과 그 기업은 막연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회사 제품에서 엄청난 문제가 발견되었다. 소비자 일부는 실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언론과 규제기관이 나서면서 금세 북새통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그 친구(기업)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하지만, 그 기업은 그 것은 문제가 아니라 관행이었을 뿐이며 심지어 치명적인 것도 아니라 이야기한다. 일부 피해 입은 소비자에게는 보상하겠지만, 너무 심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사람들에게 화를 내며 별 것 아닌 것을 별 것 같이 만들지 말라 소리쳤다.

그 기업을 오랜 친구로 여기던 사람들은 그 기업에게서 낯섦을 느꼈다. 어 저 친구가 왜 저러지? 저런 친구가 아닌데 이상하네? 친구가 왜 우리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할까? 사람들은 그 친구를 향해 애석한 감정을 토로했다.

그후 어느 날 그 기업이 다시 등장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역시 최고의 친구라 이야기하며 다가온다. 지나간 것은 모두 잊고 같이 다시 더 좋은 친구가 되자 손을 내민다. 더욱 다양한 행사에 초대하고, 사회 봉사 활동에 나서는 자신에게 박수 처달라고 요청한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고민에 빠진다. 그때 그 친구는 어디로 간 걸까?

너는 나를 알지만 나는 너를 모른다

철수에게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기업이 있다. 그 기업의 일거수일투족을 응원하고 주식을 사서 주주로서 자랑스러움 까지 느끼고 있다. 그 기업의 여러 온라인 소셜미디어 계정을 팔로우 하고 있으며, 종종 댓글을 달아 칭찬과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 기업의 여러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우호적 평가를 하기도 한다. 때때로 그 회사의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다닐 때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철수는 그 기업 제품을 사용하다가 큰 문제를 발견했다. 당연히 이 문제는 오랜 친구 (기업)가 나서서 깔끔하게 해결해 주겠지 라는 기대가 있었다. 소비자만족센터에 전화를 걸고, 매장에 나가 상담까지 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당신이 제품 관리를 잘 못한 것일 뿐, 우리에게 책임도 없고,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다’였다. 일부 직원은 귀찮다는 듯 철수에게 블랙 컨슈머라며 비아냥 거리기까지 했다.

철수는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너희를 좋아하고 응원했는데, 이럴 수 있어?’ 화가 나고 눈물까지 난다. ‘누가 당신 보고 우리를 좋아하라고 했나? 그냥 당신이 우리를 짝사랑했던 것 뿐이잖아. 심지어 우린 당신을 잘 몰라. 알 필요도 없고. 바보 같은 녀석’ 그 기업은 이렇게 철수와 커뮤니케이션 하고 있는 것 같다. 철수는 생각한다. 이게 내가 좋아했던 그 친구가 진짜 맞나?

나에 대해 잘 모르면서

어떤 기업이 사회적으로 비난 받을 문제를 저질렀다는 뉴스가 나온다. 보도 내용을 보니 정말 어처구니없고, 그에 대해 기업이 해명하는 것도 황당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이 기업을 이전에 몰랐었고 이 부정적 뉴스를 통해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그 기업에 대해 악평을 하고 분노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 기업은 억울했다. 자신들에 대해 좀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앞뒤와 전후좌우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냥 미웠다. 우리에 대해 잘 모르면서 욕만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에게 왜 저렇게까지 악의를 품으며 공격할까? 우리가 자기들에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식으로 우리를 힘들게 할까? 하며 서러움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아주 친한 친구가 비난 받을 상황이 되면, 아예 입을 다문다. 그 친구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문제가 무엇이라는 것까지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모두 욕을 하는 상황에서 나까지 나서서 내 친한 친구에게 욕을 퍼부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위와 같이 서러움을 느끼는 그 기업은 평소에 사람들과 친한 친구가 되려는 노력을 좀 더 했었어야 했다. 낯선 기업은 그 자체가 취약함이다.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는 항상 색안경을 끼게 된다.

너희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

온라인에서 팔로워만 수십만명 거느리고 있는 기업이 있다. 매일 매시간 사람들과 대화하며 좋은 친구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의 반응을 보면 대부분 엄지척을 들어 보이며 기업에게 좋은 친구임을 반복해 강조했다. 기업 경영진은 이정도 사랑받는 기업이라면 어떤 사업이라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크게 문제가 터졌다. 여기저기에서 화살이 날라와 꽂혔다. 기업은 여러 다양한 메시지로 해명하고, 예전처럼 대화를 계속하려 하는데, 이전과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그렇게 많던 엄지척이 하루 아침에 수많은 나빠요와 싫어요로 대체되어 버렸다. 경영진은 물론 임직원들까지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나쁜 놈도 이런 나쁜 놈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지?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가 당신들에게 얼마나 잘 했는데? 이런 불만이 기업 경영진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이런 유형은 평시 자사에게 향한 사람들의 관심과 응원을 진정한 우정이라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상호 관계가 그런 우정에 까지는 이르지 못한 의례적/이익적 관계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온라인을 중심으로 하는 상호 관계 때문에 이런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는 기업들이 늘어간다.

너희가 뭔 데?

평소 광고나 홍보에 관심을 두지 않는 기업이 있다. 단순히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경영진은 대부분 사람들과 여론에 대하여 부정적인 개념까지 가지고 있다. 특히 언론이나 온라인을 통해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멸했다. 언론은 썩었고, 온라인은 쓰레기 통이라 이야기했다. 평소에도 일부 불만이나 비판은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가니까.

사람들은 그 기업을 상당히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인간으로 인식했다. 때로는 무례하고, 황당하기까지 한 태도에 실망했다. 딱히 그 기업과 친해지고 싶지 않고,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마음도 별로 없었다. 그냥 저 기업은 이상하다는 생각만 하고 지내고 있었다. 기분 나빠 관심두기 싫은 인간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기업에 큰 문제가 발생됐다. 수사기관이 그 기업을 압수수색하고, 오너와 대표이사를 줄줄이 소환 했다. 언론과 온라인도 당연히 주목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분 나쁨에 관심을 끊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씩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내 그 여론은 엄청난 비판과 비난 그리고 공격으로 이어지고, 일부는 그 공격성을 행동으로 까지 표현했다.

그 기업은 여러 조언을 들어 오너가 직접 나와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겸허하게 책임 지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기업을 향한 화살은 줄어들지 않았다. 예전 사례와 다른 사례들이 줄줄이 따라 나와 더 다양한 비판이 창궐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한번 이럴 때가 올 것이라며 기다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무례하게 우리를 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 기업은 이러게 생각했다. ‘올 게 왔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 처럼 사람은 기업을 생명이 있는 인간으로 바라본다. 별 관심이나 관계 맺기의 기회가 없던 기업을 볼 때에는 그냥 낯설거나 한 두 번 본 인간으로만 이해한다. 알고는 있지만 친하지는 않은 그런 존재다. 일부 기업은 운 좋게 그 보다 사람들에게 좀더 관심과 사랑을 받는 친구로 여겨 지기도 한다. 그런 관계가 지속되고 반복적으로 강화되면 사람들은 일부 기업을 아주 친한 친구, 막역한 사이로 인식하기 까지 한다.

기업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전문가들은 그 기업에게 ‘인간화’ 전략을 종종 조언한다. 해당 문제로 인해 피해를 입었거나, 고통을 받았거나, 분노를 느끼는 여러 사람들과 먼저 공감해 보라 이야기한다. 위기 시 기업이 주변 사람들을 오래된 친구로 보는지, 그냥 아는 친구로만 바라보는지, 별로 친하지 않은 인간으로 바라보는지, 전혀 낯설어 하는지는 해당 기업의 말과 행동을 통해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한 공감은 상당히 유효한 전략이 된다.

당연히 사람들은 기업이 자신을 좋은 친구로 여길 때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그에 더해 자신들이 그 기업을 좋은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면 더욱 더 이상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위기관리에 실패할 가능성은 대폭 줄어들고, 대신 이해와 장상참작의 분위기가 생겨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기업이 제대로 인간화 되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대해 기업은 좀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한다. 위기관리 관점에서 기업은 위기 시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좋은 친구로 여러 사람들의 기대를 완전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좋다.

자사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기 전에, 친구들과의 관계를 먼저 따지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래된 좋은 친구는 좀처럼 배반하지 않는다. 모르면서 친구를 욕하지도 않는다. 친구가 어려울 때에는 도움의 손길도 내민다. 좋은 친구가 많은 사람이 그런 것처럼, 좋은 친구가 많은 기업은 성공한다. 그러니 위기일 수록 그 친구들과 더 좋은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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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 기고문] 누가 요즘 신문을 읽어요?

[The PR 기고문]

누가 요즘 신문을 읽어요?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얼마전부터는 홍보담당자 중에서도 종이신문을 건너뛰는 경향이 생겼다. 회사 PC나 노트북으로 스크랩 서비스 이용이나 온라인 검색이 가능한 데 왜 그 불편한 종이신문을 한 장 한 장 읽어야 하느냐 이야기하는 홍보담당자도 나타났다.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다.

아예 종이신문을 접해보지 못한 젊은 홍보 신입도 늘고 있다. 그들에게 “종이 신문을 좀더 접해라. 그래야 전체적인 여론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조언은 이제 종이 신문과 같은 꼴(?)이 되어 버렸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됐다는 분위기다.

미디어 트레이닝을 진행하면서 50대 한 임원분으로부터 “요즘 누가 신문을 읽나요?”하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종이 신문은 이미 죽었는데 그 죽은 기사를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하는 거였다. 이 질문에 요즘 기자들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까지 따라 나왔다. 죽은 신문에 아무도 읽지 않는 기사를 계속 올리는 수많은 기자들도 이젠 죽었다는 거다.

신문, 종이 신문, 기사, 기자…이 화두들은 종종 혼동 속에서 언급되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 신문이 죽었을까? 종이 신문이 죽었을까? 기사가 죽었을까? 기자가 죽었을까? 정확하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다 죽었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사업이고 플레이어들이다’는 이야기로 퉁 쳐진다.

문제는 이런 혼동에 기반한 논의가 기존 기업 내 언론홍보 기능까지 고사시키는 의사결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이 죽었으니 이제 그 기능은 필요 없다는 의식의 흐름 때문이다. 더구나 기업 커뮤니케이션이나 이슈 및 위기관리 기능에 있어서도 그 중요성이 함께 저하되는 현상까지 보인다. 보지 않은 신문을 통한 문제 제기가 이제는 그 위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그 기반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정확하게 우리의 환경을 보자. 언론홍보와 이슈와 위기관리 관점에서 실질적인 실행 환경을 들여 다 보자. 진짜 신문이 죽었을까? 종이 신문은 진짜 계란판의 의미 밖에 없게 되었을까? 기사는 진짜 아무도 읽지 않을까? 기자도 신문과 함께 그 실제 기능을 잃었을까? 답은 글쎄다.

첫째, 신문은 더욱 더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종이 신문과 신문을 동일어로 사용하지 말자. 실제로 종이 신문의 구독 비율은 형편없이 줄었다. 그렇다고, 해당 신문을 읽는 독자들까지 형편없이 줄었다고는 볼 수 없다. 종이 신문을 비롯하여, 온라인 매체 사이트와 포털 사이트,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되는 신문 발 정보의 공급과 소비량은 그 이전 보다 엄청나게 늘었다. 신문은 더 강력 해 졌다.

오히려 읽기 싫은 기사가 너무 많이 노출되어 지겹고 괴로울 지경 까지 환경이 변했을 뿐이다. 신문 발 정보 없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이슈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나? 기존 신문들이 한 일주일 아무 취재나 정보 공유 없이 사라져 버린다면, 현재 같은 사회 상황이 지속될 수는 있을까? 만약 신문이 죽었다면 그들이 눈 앞에서 사라져도 아무 문제나 변화는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실행 차원에서도 기업 내 분위기를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목격된다. 평소 다양한 보도자료를 통한 기사화에 별 반응 없는 임원들이 많아 졌다. 신문을 아무도 안 보는데, 거기에 보도자료를 뿌려 기사를 얻어 내는 것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이야기한다. 그런 생각이 합리적인 것 아니냐는 동의 요청까지 이어진다.

그 후 해당 임원의 문제와 관련된 신문 기사가 실리면 반응은 어떨까? 합리적 기준을 가지고 계속 이야기하자면 해당 신문은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니, 아무리 자신의 이야기라 해도 신경 쓰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 현실은 다르다. 해당 임원은 그 신문에 주목하고, 어떻게 든 처리해야 한다며 홍보실과 로펌을 두루 찾는다. 그 임원은 왜 그러는 걸까? 아무도 보지 않는 신문 일 뿐인데.

둘째, 종이 신문은 청와대가 읽는다.

청와대만 종이 신문을 볼까? 국회와 의원실에서도 본다. 정부 부처와 산하 기관들이 모두 종이 신문을 본다. 규제기관을 비롯하여 경찰과 검찰 같은 다양한 수사기관도 종이 신문을 읽는다. 환경단체와 시민단체는 어떤가? 그리고 다른 매체의 수많은 기자들은? 진짜 종이 신문은 모두 계란 판 정도의 의미만으로 전락했나?

기업 내에서는 어떤가? 회장과 대표이사, 주요 임원들이 종이 신문을 본다. 그들 가정에서도 종이 신문을 읽기도 한다. 홍보실이 임원들로부터 듣는 익숙한 말이 있다. “그거 지면에도 났습니까?” 이 질문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 아직도 온라인 보다는 지면에 더 신경 쓰는 최고의사결정자들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기업이 합리적 사고를 한다며 무시하는 종이 신문에 실린 기사로 인해 규제 조사와 수사를 받게 되는 경우를 무시할 수 있는 기업이 있을까? 아침 받아 본 종이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회사로 문의해 오는 국회 인사나, 환경이나 시민 단체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을까? 매일 같이 종이 신문 지면에 도배되는 기사를 읽는 청와대 관계자들을 기업이 계속 무시할 수 있을까? 특정 종이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따라서 취재를 시작하는 기자들의 전화는 아무것도 아닌가?

지면을 확인하며 이야기하는 경영진을 무시할 수 있는 부서는 얼마나 있을까? 그 앞에서 ‘이미 종이 신문은 죽었습니다. 아무도 종이 신문을 읽지는 않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임원은 몇이나 될까? 그 이야기에 그렇구나 하며 종이 신문을 쓰레기 통에 던져 버리는 회장과 대표이사는 몇이나 될까?

셋째, 가짜 기사와 나쁜 기사 때문에 기사는 빛난다

굳이 일반화의 오류라는 표현을 쓸 필요도 없다. 모든 기사가 가짜이며 나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다만, 자신이나 자사에게 불리하거나 부정적 내용이면 그 기사는 가짜이며 나쁘다 해석된다. 그리고는 요즘은 가짜뉴스와 나쁜 뉴스가 너무 많아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수십년 전 예전에는 가짜나 나쁜 뉴스가 전혀 없었을까? 그 때는 정말 저널리즘이 살아 있어서 가짜나 나쁜 뉴스가 발붙일 곳이 없었을까? 모든 독자들이 기사를 보며 전부 진짜이며, 좋은 뉴스구나 감탄하기만 했을까? 그런 상황이 오히려 가짜다.

부정확한 기사, 품질이 떨어지는 기사, 일부러 왜곡된 시각을 집어넣은 교묘한 기사는 분명 존재한다. 그것도 이전과 같이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런 수준 낮은 기사는 자신과 자사의 미디어 리터러시를 지속적으로 키워 나가면 걸러 낼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반복적으로 수준 낮은 기사에 휘둘린다면 자신이나 자사의 리터러시 수준을 의심하는 것이 맞다.

우리는 몰라도 대중이 그런 수준 낮은 기사에 휘둘린다 믿는 것도 문제다. 그렇지 않다. 이슈나 위기관리 관점에서 대중, 공중, 이해관계자에 대한 정확한 시각와 평가는 아주 중요한 대응 커뮤니케이션의 기반이다. 상대를 우매한 그룹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성공할 수 없다.

차라리 수준 낮은 기사 때문에 수준 높은 기사의 가치는 빛나게 되었다. 제대로 된 기사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진영논리 속에서도 뼈아픈 기사는 의미 있는 충격을 미친다. 겉으로는 그 기사를 가짜이고 나쁜 뉴스라 폄하해도 시린 부분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군계일학은 계속 존재한다. 오히려 기사 아웃렛 환경이 확장되면서 군계일학의 기사나 기자의 사후 취재담이 세상에 알려질 확률은 더 늘었다. 당연히 그 내용이 기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수배로 높아졌다. 기사가 죽었다며 안일하게 바라볼 환경은 절대 아니라는 의미다.

넷째, 기자를 무시하며 이슈나 위기관리에 성공한 기업 없다

기자를 건너 뛰자는 논의를 진행하는 기업도 생겨났다. 왜곡을 일삼는 기자를 상대하지 말고, 온라인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을 직접 상대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어차피 온라인과 소셜미디어에 자사 입장이 게시되면, 그걸 기자들이 받아쓸 텐데, 왜 골치 아프게 기자에게 까지 자료를 보내야 하는지 질문하는 기업도 생겨났다.

한마디로 기업을 취재하는 기자들에 대한 대우나 평가가 이전 보다 낮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현상을 가지고 기자가 죽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진짜 기자들은 아무 의미 없는 이해관계자로 무시해 버릴 수 있을까? 자사가 뿌린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주어 먹는 하이에나 정도로 폄하하면 아무 문제는 없을까?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실제 대형 이슈나 위기가 발생했을 때 관련된 취재를 하는 기자들을 무시하는 실험을 해 보면 된다. 기자들의 전화를 받지 않으면 된다. 기자들의 방문을 막아 철통방어를 해보자. 어쩌다 연락된 기자에게 묵비권이나 거짓 정보를 흘려 괴롭혀 보자. 대신 소셜미디어로 잘 정리된 내용을 게재한 뒤, 알아서 해석해 기사 쓰라 가이드 해보자. 그 결과가 소중한 교훈이 될 것이다.

각각의 기사에게도 그랬던 것과 같이, 유리하고 좋은 기사를 쓴 기자는 진짜 기자라 하고, 반대인 기자는 나쁜 기자라 하며 비속어를 써 비아냥 거리는 것이 오히려 문제다. 그런 편향된 시각이 기자들에 대한 전략적 대응 기반을 무너뜨린다. 기자를 폄하하고, 기자를 차별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자의 취재 방향과 수준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사내 환경을 스스로 조성하니 문제다. 제대로 된 대응을 하고도 사후 아무 평가를 내부로부터 받지 못하게 되니 악순환은 계속된다. 기자가 죽었다고 확신해 보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업 홍보나 마케팅도 마찬가지고, 이슈관리나 위기관리에 있어서도 공히 적용되어야 하는 룰이 있다. ‘A 또는 B 또는 C’라는 ‘or’ 주장과 생각은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신문과 기자가 죽었으니 우리는 이제 온라인과 소셜미디어에 집중해야 한다’ 같은 주장은 경계해야 하며 실질적이지 않은 주장이라는 의미다.

얼핏 보면 상당히 전략적이고 효율적인 주장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A나 B가 죽었을 리 없고, 더욱 더 강력해지고 있다면 C에 집중하는 것이 정상적 대안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이해가능 한 것이다. 가장 전략적인 룰은 ‘A와 B와 C 모두를 제대로…’라는 ‘and’ 시각에 기반한 것이다. 신문, 종이 신문 기사, 기자 그 어떤 것도 죽은 것이 없다. 완전하게 사라지지도 않았으며, 그 다양한 영향력은 계속 변화할 뿐 아직도 기업에게는 치명적인 수준으로 생생하다. 그러니 ‘and’룰도 계속 유효하다.

신문과 기자들이 죽었기 때문에 회사 내 언론홍보 기능을 없애자 하는 기업은 몇 년 후 아주 뼈아픈 교훈을 가진 후 스스로 다시 언론 홍보 기능을 일으켜 세워야 할 것이다. 신문과 기자들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생각으로 기업 이슈관리와 위기관리 기능을 축소한 기업도 이내 마찬가지 환원의 심각한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실제 환경과 영향력 구도에 대한 시각이 부실한 기업은 그러한 폐지, 축소, 충격, 환원의 고통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홍보실 직원들이 불철주야 언론 홍보를 너무 잘했더니, 스스로 인기 좋은 기업이 된 줄 알고 이후 홍보실을 축소한 예전 기업들도 그랬다. 이슈나 위기를 초반에 잘 관리하던 실무진이 고생하던 기업에서는 자사 스스로 ‘발생될 이슈나 위기가 없는 기업’이라는 환상을 가지기도 했다. 그 후 위기관리 시스템을 오래도록 방치했고, 그 기업들도 몇 년 후에는 똑같았다. 그런 불필요하고 고통스러운 반복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살아있는 신문과 기자들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전략적으로 대응해 나가는 것이 옳다. 지금까지 내내 그래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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