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2021 Tagged with 0 Responses

[The PR 기고문] 누가 요즘 신문을 읽어요?

[The PR 기고문]

누가 요즘 신문을 읽어요?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얼마전부터는 홍보담당자 중에서도 종이신문을 건너뛰는 경향이 생겼다. 회사 PC나 노트북으로 스크랩 서비스 이용이나 온라인 검색이 가능한 데 왜 그 불편한 종이신문을 한 장 한 장 읽어야 하느냐 이야기하는 홍보담당자도 나타났다.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다.

아예 종이신문을 접해보지 못한 젊은 홍보 신입도 늘고 있다. 그들에게 “종이 신문을 좀더 접해라. 그래야 전체적인 여론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조언은 이제 종이 신문과 같은 꼴(?)이 되어 버렸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됐다는 분위기다.

미디어 트레이닝을 진행하면서 50대 한 임원분으로부터 “요즘 누가 신문을 읽나요?”하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종이 신문은 이미 죽었는데 그 죽은 기사를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하는 거였다. 이 질문에 요즘 기자들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까지 따라 나왔다. 죽은 신문에 아무도 읽지 않는 기사를 계속 올리는 수많은 기자들도 이젠 죽었다는 거다.

신문, 종이 신문, 기사, 기자…이 화두들은 종종 혼동 속에서 언급되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 신문이 죽었을까? 종이 신문이 죽었을까? 기사가 죽었을까? 기자가 죽었을까? 정확하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다 죽었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사업이고 플레이어들이다’는 이야기로 퉁 쳐진다.

문제는 이런 혼동에 기반한 논의가 기존 기업 내 언론홍보 기능까지 고사시키는 의사결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이 죽었으니 이제 그 기능은 필요 없다는 의식의 흐름 때문이다. 더구나 기업 커뮤니케이션이나 이슈 및 위기관리 기능에 있어서도 그 중요성이 함께 저하되는 현상까지 보인다. 보지 않은 신문을 통한 문제 제기가 이제는 그 위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그 기반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정확하게 우리의 환경을 보자. 언론홍보와 이슈와 위기관리 관점에서 실질적인 실행 환경을 들여 다 보자. 진짜 신문이 죽었을까? 종이 신문은 진짜 계란판의 의미 밖에 없게 되었을까? 기사는 진짜 아무도 읽지 않을까? 기자도 신문과 함께 그 실제 기능을 잃었을까? 답은 글쎄다.

첫째, 신문은 더욱 더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종이 신문과 신문을 동일어로 사용하지 말자. 실제로 종이 신문의 구독 비율은 형편없이 줄었다. 그렇다고, 해당 신문을 읽는 독자들까지 형편없이 줄었다고는 볼 수 없다. 종이 신문을 비롯하여, 온라인 매체 사이트와 포털 사이트,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되는 신문 발 정보의 공급과 소비량은 그 이전 보다 엄청나게 늘었다. 신문은 더 강력 해 졌다.

오히려 읽기 싫은 기사가 너무 많이 노출되어 지겹고 괴로울 지경 까지 환경이 변했을 뿐이다. 신문 발 정보 없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이슈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나? 기존 신문들이 한 일주일 아무 취재나 정보 공유 없이 사라져 버린다면, 현재 같은 사회 상황이 지속될 수는 있을까? 만약 신문이 죽었다면 그들이 눈 앞에서 사라져도 아무 문제나 변화는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실행 차원에서도 기업 내 분위기를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목격된다. 평소 다양한 보도자료를 통한 기사화에 별 반응 없는 임원들이 많아 졌다. 신문을 아무도 안 보는데, 거기에 보도자료를 뿌려 기사를 얻어 내는 것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이야기한다. 그런 생각이 합리적인 것 아니냐는 동의 요청까지 이어진다.

그 후 해당 임원의 문제와 관련된 신문 기사가 실리면 반응은 어떨까? 합리적 기준을 가지고 계속 이야기하자면 해당 신문은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니, 아무리 자신의 이야기라 해도 신경 쓰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 현실은 다르다. 해당 임원은 그 신문에 주목하고, 어떻게 든 처리해야 한다며 홍보실과 로펌을 두루 찾는다. 그 임원은 왜 그러는 걸까? 아무도 보지 않는 신문 일 뿐인데.

둘째, 종이 신문은 청와대가 읽는다.

청와대만 종이 신문을 볼까? 국회와 의원실에서도 본다. 정부 부처와 산하 기관들이 모두 종이 신문을 본다. 규제기관을 비롯하여 경찰과 검찰 같은 다양한 수사기관도 종이 신문을 읽는다. 환경단체와 시민단체는 어떤가? 그리고 다른 매체의 수많은 기자들은? 진짜 종이 신문은 모두 계란 판 정도의 의미만으로 전락했나?

기업 내에서는 어떤가? 회장과 대표이사, 주요 임원들이 종이 신문을 본다. 그들 가정에서도 종이 신문을 읽기도 한다. 홍보실이 임원들로부터 듣는 익숙한 말이 있다. “그거 지면에도 났습니까?” 이 질문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 아직도 온라인 보다는 지면에 더 신경 쓰는 최고의사결정자들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기업이 합리적 사고를 한다며 무시하는 종이 신문에 실린 기사로 인해 규제 조사와 수사를 받게 되는 경우를 무시할 수 있는 기업이 있을까? 아침 받아 본 종이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회사로 문의해 오는 국회 인사나, 환경이나 시민 단체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을까? 매일 같이 종이 신문 지면에 도배되는 기사를 읽는 청와대 관계자들을 기업이 계속 무시할 수 있을까? 특정 종이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따라서 취재를 시작하는 기자들의 전화는 아무것도 아닌가?

지면을 확인하며 이야기하는 경영진을 무시할 수 있는 부서는 얼마나 있을까? 그 앞에서 ‘이미 종이 신문은 죽었습니다. 아무도 종이 신문을 읽지는 않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임원은 몇이나 될까? 그 이야기에 그렇구나 하며 종이 신문을 쓰레기 통에 던져 버리는 회장과 대표이사는 몇이나 될까?

셋째, 가짜 기사와 나쁜 기사 때문에 기사는 빛난다

굳이 일반화의 오류라는 표현을 쓸 필요도 없다. 모든 기사가 가짜이며 나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다만, 자신이나 자사에게 불리하거나 부정적 내용이면 그 기사는 가짜이며 나쁘다 해석된다. 그리고는 요즘은 가짜뉴스와 나쁜 뉴스가 너무 많아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수십년 전 예전에는 가짜나 나쁜 뉴스가 전혀 없었을까? 그 때는 정말 저널리즘이 살아 있어서 가짜나 나쁜 뉴스가 발붙일 곳이 없었을까? 모든 독자들이 기사를 보며 전부 진짜이며, 좋은 뉴스구나 감탄하기만 했을까? 그런 상황이 오히려 가짜다.

부정확한 기사, 품질이 떨어지는 기사, 일부러 왜곡된 시각을 집어넣은 교묘한 기사는 분명 존재한다. 그것도 이전과 같이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런 수준 낮은 기사는 자신과 자사의 미디어 리터러시를 지속적으로 키워 나가면 걸러 낼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반복적으로 수준 낮은 기사에 휘둘린다면 자신이나 자사의 리터러시 수준을 의심하는 것이 맞다.

우리는 몰라도 대중이 그런 수준 낮은 기사에 휘둘린다 믿는 것도 문제다. 그렇지 않다. 이슈나 위기관리 관점에서 대중, 공중, 이해관계자에 대한 정확한 시각와 평가는 아주 중요한 대응 커뮤니케이션의 기반이다. 상대를 우매한 그룹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성공할 수 없다.

차라리 수준 낮은 기사 때문에 수준 높은 기사의 가치는 빛나게 되었다. 제대로 된 기사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진영논리 속에서도 뼈아픈 기사는 의미 있는 충격을 미친다. 겉으로는 그 기사를 가짜이고 나쁜 뉴스라 폄하해도 시린 부분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군계일학은 계속 존재한다. 오히려 기사 아웃렛 환경이 확장되면서 군계일학의 기사나 기자의 사후 취재담이 세상에 알려질 확률은 더 늘었다. 당연히 그 내용이 기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수배로 높아졌다. 기사가 죽었다며 안일하게 바라볼 환경은 절대 아니라는 의미다.

넷째, 기자를 무시하며 이슈나 위기관리에 성공한 기업 없다

기자를 건너 뛰자는 논의를 진행하는 기업도 생겨났다. 왜곡을 일삼는 기자를 상대하지 말고, 온라인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을 직접 상대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어차피 온라인과 소셜미디어에 자사 입장이 게시되면, 그걸 기자들이 받아쓸 텐데, 왜 골치 아프게 기자에게 까지 자료를 보내야 하는지 질문하는 기업도 생겨났다.

한마디로 기업을 취재하는 기자들에 대한 대우나 평가가 이전 보다 낮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현상을 가지고 기자가 죽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진짜 기자들은 아무 의미 없는 이해관계자로 무시해 버릴 수 있을까? 자사가 뿌린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주어 먹는 하이에나 정도로 폄하하면 아무 문제는 없을까?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실제 대형 이슈나 위기가 발생했을 때 관련된 취재를 하는 기자들을 무시하는 실험을 해 보면 된다. 기자들의 전화를 받지 않으면 된다. 기자들의 방문을 막아 철통방어를 해보자. 어쩌다 연락된 기자에게 묵비권이나 거짓 정보를 흘려 괴롭혀 보자. 대신 소셜미디어로 잘 정리된 내용을 게재한 뒤, 알아서 해석해 기사 쓰라 가이드 해보자. 그 결과가 소중한 교훈이 될 것이다.

각각의 기사에게도 그랬던 것과 같이, 유리하고 좋은 기사를 쓴 기자는 진짜 기자라 하고, 반대인 기자는 나쁜 기자라 하며 비속어를 써 비아냥 거리는 것이 오히려 문제다. 그런 편향된 시각이 기자들에 대한 전략적 대응 기반을 무너뜨린다. 기자를 폄하하고, 기자를 차별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자의 취재 방향과 수준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사내 환경을 스스로 조성하니 문제다. 제대로 된 대응을 하고도 사후 아무 평가를 내부로부터 받지 못하게 되니 악순환은 계속된다. 기자가 죽었다고 확신해 보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업 홍보나 마케팅도 마찬가지고, 이슈관리나 위기관리에 있어서도 공히 적용되어야 하는 룰이 있다. ‘A 또는 B 또는 C’라는 ‘or’ 주장과 생각은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신문과 기자가 죽었으니 우리는 이제 온라인과 소셜미디어에 집중해야 한다’ 같은 주장은 경계해야 하며 실질적이지 않은 주장이라는 의미다.

얼핏 보면 상당히 전략적이고 효율적인 주장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A나 B가 죽었을 리 없고, 더욱 더 강력해지고 있다면 C에 집중하는 것이 정상적 대안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이해가능 한 것이다. 가장 전략적인 룰은 ‘A와 B와 C 모두를 제대로…’라는 ‘and’ 시각에 기반한 것이다. 신문, 종이 신문 기사, 기자 그 어떤 것도 죽은 것이 없다. 완전하게 사라지지도 않았으며, 그 다양한 영향력은 계속 변화할 뿐 아직도 기업에게는 치명적인 수준으로 생생하다. 그러니 ‘and’룰도 계속 유효하다.

신문과 기자들이 죽었기 때문에 회사 내 언론홍보 기능을 없애자 하는 기업은 몇 년 후 아주 뼈아픈 교훈을 가진 후 스스로 다시 언론 홍보 기능을 일으켜 세워야 할 것이다. 신문과 기자들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생각으로 기업 이슈관리와 위기관리 기능을 축소한 기업도 이내 마찬가지 환원의 심각한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실제 환경과 영향력 구도에 대한 시각이 부실한 기업은 그러한 폐지, 축소, 충격, 환원의 고통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홍보실 직원들이 불철주야 언론 홍보를 너무 잘했더니, 스스로 인기 좋은 기업이 된 줄 알고 이후 홍보실을 축소한 예전 기업들도 그랬다. 이슈나 위기를 초반에 잘 관리하던 실무진이 고생하던 기업에서는 자사 스스로 ‘발생될 이슈나 위기가 없는 기업’이라는 환상을 가지기도 했다. 그 후 위기관리 시스템을 오래도록 방치했고, 그 기업들도 몇 년 후에는 똑같았다. 그런 불필요하고 고통스러운 반복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살아있는 신문과 기자들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전략적으로 대응해 나가는 것이 옳다. 지금까지 내내 그래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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