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위기가 발생하면 언론에서는 거의 비슷한 표현들을 주로 사용하면서 위기관리 주체의 대응 문제를 비판한다. “오락 가락” “오리무중” “뒤늦은 사과” “뒷북” “황당 대응” “침묵으로 화를 키워” 등등의 지적이 그것이다. 그 중 빠지지 않는 지적이 바로 ‘위기관리 매뉴얼의 부재 또는 부실’이다.
“이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위기관리 매뉴얼조차 없었던 것으로 알려 졌다.” “위기관리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문제를 키웠다.” 이 같은 위기관리 매뉴얼 관련 지적이 줄을 잇는다. 기업이나 기관에서는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사후 위기관리 대책으로 “위기관리 매뉴얼을 보다 정교화 하겠다.” “새롭게 위기관리 매뉴얼을 구축하겠다”는 식의 개선안을 내놓는다.
문제는 이런 비판과 그에 대한 개선계획이 계속 반복된다는 점이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다시 유사한 위기가 발생하면 위기관리 매뉴얼의 형편없음을 탓하는 언론의 지적이 또 생겨난다. 그리고 또 해당 위기관리 매뉴얼은 재차 새롭게 탈 바꿈 된다. 이런 쳇바퀴 같은 위기관리 매뉴얼 논란을 보면서 위기관리 매뉴얼이 진짜 필요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위기관리 매뉴얼을 둘러싼 실무진들의 주요 질문을 중심으로 진짜 위기관리 매뉴얼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 저희 회사는 위기관리 매뉴얼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기업에서 이렇게 위기관리 매뉴얼을 보유하고 있다 이야기한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갖고 있다는 그 위기관리 매뉴얼을 한번 봅시다 하면 대부분이 보여주기를 주저한다. 스스로 만족스럽거나 완벽하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임직원이 충분히 만족하는 완벽한 위기관리 매뉴얼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위기관리 매뉴얼은 기업이나 기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맞춘 포맷과 내용만 적절히 갖추고 있으면 그것이 전부다. 외부에 과시할 만한 주제도 아니며, 다른 기업이나 기관과 비교해 우열을 따질 성격도 아니다. 어떤 기업에서는 위기관리 매뉴얼이 몇 십장 수준인 경우도 있다. 어떤 기관은 별책으로 묶어 백과 사전 같은 거대 분량을 자랑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 낫다 말하기는 어렵다.
가장 완벽한 위기관리 매뉴얼을 정의하라 하면 “임직원들이 오랫동안 반복 활용해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와 수정이 이루어진 위기관리 매뉴얼”이라 할 것이다. 즉, 매뉴얼은 일단 자사의 특성에 기반해 자사만의 버전으로 만들어 반복 활용해 보는 것이 최선이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위기관리 매뉴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먼저 신경 쓰자.
- 위기관리 매뉴얼은 왜 필요할까요?
위기관리 매뉴얼은 위기 시 위기관리를 담당하는 조직에게 필살기를 곧장 발휘하게 만들어 주는 비책이 절대 아니다. 일부 기업에서는 위기관리 매뉴얼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추구하기도 한다. 어떤 기업에서는 위기관리 매뉴얼을 큰 치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위기관리 매뉴얼이 진짜 왜 필요한지에 대한 생각은 쉽게 찾아보기가 힘들다.
위기관리 매뉴얼은 그 자체보다 매뉴얼을 만드는 과정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위기관리 매뉴얼이라는 정리된 체계를 만드는 긴 과정을 통해 자사 조직이 위기관리를 배우는 것이다. 그들의 참여로 좀 더 나은 위기관리 개념과 역할 확인, 프로세스에 대한 인식, 위기관리 자산의 통합이 가능하게 된다. 위기관리 매뉴얼을 다 함께 만들어 본 기업과 만들어 보지 않는 기업이 다른 이유가 이 때문이다.
위기관리 매뉴얼은 위기 시 그 효과를 발휘한다 기 보다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평소 준비 과정에서 큰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매뉴얼 자체는 그 결과이자 상징이다.
- 위기관리 매뉴얼의 분량은 얼마가 적절할까요?
사실 위기관리 매뉴얼의 현실적 분량은 VIP께서 만족하실 수 있는 분량이다. 실무진에서 100 페이지로 매뉴얼을 정리해도 VIP께서 “겨우 100 페이지로 모든 위기를 모두 커버할 수 있겠나?” 하시면 바로 그 분량은 열 배 이상 늘어난다. 반대로 VIP께서 “그 100 페이지를 누가 다 읽고 실행할 수 있겠나?”하시면 곧 장 매뉴얼은 십여 페이지로 요약이 된다. 어떤 매뉴얼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상적 위기관리 매뉴얼은 위기관리 조직이 충분히 이해하고, 암기할 수 있는 수준과 범위여야 한다. 실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 때가서 위기관리 매뉴얼을 들춰보고 위기를 관리하는 조직은 문제가 있다. 단순 정보의 확인 정도라면 모를까? 위기가 발생했을 때 문구를 정독하며 줄을 치는 실무자들이 있어서는 안된다.
위기관리 매뉴얼을 개발하는 과정을 함께 한 위기관리 조직 구성원들은 완성된 위기관리 매뉴얼을 읽지 않아도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과 책임 그리고 대응 방식을 상당부분 이미 인지할 수 있다. 매뉴얼은 그 인지 사실에 대한 단순 기록일 뿐이다. 그 수준에서 분량은 결정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위기관리 매뉴얼은 모든 상황과 시나리오를 모두 포함해야 하나요?
위기관리 매뉴얼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는 단순 이유가 아니라면, 발생 가능한 모든 위기 유형과 시나리오를 전부 담는 위기관리 매뉴얼은 만들 수도 없고, 만들어도 별 의미가 없다. 실제 위기관리 매뉴얼을 위기 유형별로 여럿 만들다 보면 몇 개 유형 매뉴얼을 완성하기 전에 깨닫게 된다. 유형은 달라도 대응 조직과 방식 그리고 프로세스는 거의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위기 유형의 특수성이 있어, 그 관리 전략이나 방식에 일부 다름이나 가감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외 상당 부분은 위기 유형에 따라 바뀌지 않는 상수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위기 요소 진단이나 취약성 진단을 통해 주요 위기 유형들을 매뉴얼에서 일부 다루는 것은 괜찮겠지만, 욕심을 내 모든 유형과 그에 따른 다양한 시나리오를 담는 것은 그리 권장되지 않는다. 분량을 늘이기 위한 목적이라면 모르지만, 실제로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효율성도 없고.
- 위기관리 매뉴얼과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매뉴얼은 어떻게 다르죠?
흔히 홍보실에서 가지고 있는 ‘부정기사 대응 방안, 체계’를 위기관리 매뉴얼이라 부르는 기업도 있다. 어느 기업에서는 사고, 안전이나 정보 보안 매뉴얼을 위기관리 매뉴얼이라 부르기도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기업이나 기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게 전부다.
그러나, 정확히 분류하자면 위기관리 매뉴얼은 일반적으로 전사 조직이 포함된 매뉴얼을 의미한다. 대표이사를 포함 전체 임원과 부서의 위기 시 역할과 책임이 수록된다. 위기관리 조직의 규모에 있어서도 전사 핵심 임원들이 모두 포함될 뿐 아니라, 위기 유형에 있어서도 법무, 재무, 안전, 환경, 홍보, 영업, 마케팅, 정보보안, 기술 등등의 여러 분야가 모두 커버된다.
한편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매뉴얼은 주로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개발해서 핵심 임원들까지 공유되는 ‘위기 시 커뮤니케이션 해야 하는 임직원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매뉴얼’을 의미한다. 위기관리를 상황 관리와 커뮤니케이션 관리의 두 축으로 나눌 때, 뒤 부분의 커뮤니케이션 관리 내용을 주로 담은 매뉴얼이다. 일부 기업에서는 위기 시 언론 대응 매뉴얼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커뮤니케이션 대상이 점점 광범위하게 설정되고 있다. 언론을 넘어 온라인은 물론 여러 이해관계자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 위기관리 매뉴얼의 핵심은 어떤 부분인가요?
위기관리 매뉴얼의 모든 페이지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는 ‘비상연락망 페이지’라 이야기하는 경영자들이 있다. 상당히 공감가는 개념이다. 경영자 입장에서 볼 때 자사 위기관리 조직은 상당시간 훈련 받았고, 경험이 많기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비상연락망만 가동하면 자동으로 조직이 소집되어 움직여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 보다 멋진 조직이 없다.
비상연락망과도 유사한 개념이지만, 위기관리 매뉴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누가?(who?)라는 부분이라 항상 강조한다. 그 ‘누가?’라는 지정을 모두 모아 놓아 명시한 페이지가 비상연락망 페이지다. 그 페이지에 그 ‘누가’들이 모두 리스팅 되어 있는 것이다. 매뉴얼에서 지정한 ‘누가’는 조직 구성원 입장에서는 ‘내가’가 된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위기관리 조직 구성원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를 궁금해하게 된다. 그에 대한 준비와 답은 위기관리 매뉴얼에 있다. 단, 그런 질문을 위기 시 하는 조직이 있는 반면, 그런 질문을 평소에 하는 조직이 있다. 두 조직 간 위기관리 역량에 다름이 있다면 그 때문이다.
- 위기관리 매뉴얼은 얼마나 자주 업데이트 해야 할까요?
위기관리 매뉴얼의 수명은 약 6개월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기업 임원들은 대부분 놀란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다는 반응을 보인다. 매뉴얼의 수명이 그렇게 짧은 이유는 위기관리 조직 구성원들이 지속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위기를 관리해야 하는 주체가 계속 변동하는 것이다.
위기가 변동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위기를 관리해야 하는 조직이 계속 변동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참 재미있다. 퇴사한 임원의 후임으로 그 자리에 오른 신임 임원은 자사 위기관리 매뉴얼의 존재조차 모를 수 있다. 재무팀에 있다 영업팀으로 자리를 옮긴 팀장은 자신이 새로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렇다고 새로 바뀐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위기관리 매뉴얼 시험을 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기관리 매뉴얼을 기반으로 한 교육과 훈련,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위기관리 매뉴얼의 수명을 계속 늘려 가기 위한 노력은 정기 교육, 훈련과 시뮬레이션뿐이다. 그대로 사무실 책장에 꼽혀 있기만 한 매뉴얼은 아무 의미가 없다.
- 제대로 된 위기관리 매뉴얼은 어떤 형식인가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자사 특성에 잘 맞추어진 매뉴얼이면 충분하다. 포맷이나 디자인 그리고 분량에 대해서 너무 부담이나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다. 자사 조직 구성원들이 친근하게 접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위기관리 매뉴얼을 만들 때 기존 각 부서에서 보유하고 있는 각종 관리 매뉴얼들을 모두 모아 통합시키는 형식은 매우 상적으로 보이기는 한다. 부서별로 법이나 규정으로 정해진 매뉴얼들이 존재하는 데, 그런 모든 매뉴얼을 모아 통합해 보는 것은 매우 생산적인 것이다.
즉, 위기관리 시스템을 새로 만든다는 개념을 넘어, 기존에 익숙해져 있는 위기관리 방식들과 규정들을 한데 모아 더욱 더 강력히 통합시킨다는 개념이 필요하다. 새로 맞춘 옷은 오래 입은 옷 보다 불편 한 게 당연하다. 위기관리 시스템이 전혀 없다 이야기하는 조직도 있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그 나름 방식이나 체계는 일부라도 존재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어떻게 엮어 내는 가는 매우 중요한 과제다.
- 위기관리 매뉴얼을 만들어도 그걸 직원들이 볼까요?
안 본다. 심지어 위기관리 매뉴얼 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한 직원들도 꼼꼼하게 수백 페이지를 읽지 않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위기관리 업무만 전담하는 조직 구성원이라면 모를 까. 대부분 위기관리 조직은 기존 부서 책임자들을 모아 놓은 일종의 태스크포스 형식이다.
조직 구성원들은 평소에도 각자 여러 태스크포스에 속해 있다. 그 각 역할에 있어서도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바쁜데, 위기관리 조직 태스크포스 역할을 위해 수백페이지 매뉴얼을 평소 열람하고 숙독하는 구성원들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위기관리 조직이 보지 않는 매뉴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매뉴얼을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나? 매뉴얼을 읽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하나? 이미 이런 고민은 글로벌 기업들 사이에서도 오래된 것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그럼 어떤 해답을 찾았을까? 정기 교육과 훈련이 전부다. 그 뿐이다.
- 실제 위기관리를 할 때 위기관리 매뉴얼이 참고나 도움이 되나요?
전쟁이 발생해 머리 위에 미사일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벙커에 틀어 박혀 훈련 교본이나 작전계획을 읽고 있는 병사나 지휘관을 상상해 보자. 대형 빌딩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현장에 도착한 소방관들이 소방차 호수 작동 매뉴얼을 찾아 읽고 있다 상상해 보자. 택시 운전사가 손님을 태운 뒤, 자동차 운전 매뉴얼을 공부하는 상황이라면?
위기관리 매뉴얼은 평시 대비를 위한 노력이라는 의미가 핵심이다. 이를 통해 조직 구성원이 자신의 위기 시 역할과 책임을 사전에 이해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물론 이를 바탕으로 실제 위기가 발생하면 자신의 위기관리 역할과 책임을 찾아 준수할 수 있다.
실제 위기를 관리할 때 위기관리 매뉴얼이 도움이 된 다기 보다는, 위기관리 매뉴얼을 함께 만들고 이해한 조직 구성원들이 위기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개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어쨌든 위기관리 매뉴얼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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