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11월 172009 Tagged with , , , , , , , , 2 Responses

조총, 임진왜란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활용

  • 1575년 나카시노(長篠)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3천 명 규모의 소규모 조총부대가 일본 최대 기마부대에 승리함
  • 1583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통일
  • 1589년 황윤길 일행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쓰시마도주로부터 조총 몇 자루를 받아옴. 일본 조총 최초 입수
  • 1592년 임진왜란 발발
  • 1593년 2월 전리품인 조총을 모방하여 제조하는 과정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선조실록》)
  • 1593년 12월 조총의 제조법이 교묘하여 세심하고 정교한 기술 없이는 제조가 불가능하다 – 비변사 (《선조실록》)
  • 1594년 3월 포수 훈련용 총이 부족하다 – 비변사 (《선조실록》) [위키피디어]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 일본군은 조총(화승총)을 가지고 있었단다. 조선군은 승자총통이라는 것을 왜란 발발 이전 17년전에 개발해서 일부 대항을 했었지만, 그 화력은 일본 조총의 10분의 1정도였을 뿐 아니라 제대로 보급 조차 되지 못했단다. (실제 승자총통은 포 모양의 통이다. 총 모양이 아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589년(선조 22) 황윤길(黃允吉) 일행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오는 길에 쓰시마도주[對馬島主]로부터 몇 자루 받아온 것이 시초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 신무기의 성능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쓰는 것을 보고 그 위력을 인식하고 처음에는 노획한 총으로 훈련하여 사용하였다. [두산 엔사이버 백과사전]’ 는 사실이다.

소셜 미디어의 활용이라는 이슈도 이 조총 이슈와 별반 다르지가 않다는 느낌이다. 더 한발 나아가서 소셜 미디어를 마케팅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현재, 소셜 미디어를 통한 위기관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남의 나라 이야기 처럼 들리는 이유도 여기 있겠다.

위 조총의 역사에 나오는 황윤길이라는 사람과 그 일행이 그냥 조총을 몇자루 받아온 사람들로 기록되듯이 그냥 최초로 떠든 사람들로 남는 것이 현실이겠다. 정부나 기업이나 조직들이나 ‘이 신무기(소셜 미디어)의 성능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다가…’하는 것이 똑같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게 항상 돌고 돈다. 소셜 미디어가 위기관리의 전략과 방식으로 자리잡는데는 아마 최초 조총 개발, 임진왜란 발발과 조총의 정착 역사 같이 20여년은 족히 넘겨야 가능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6월 152009 Tagged with , , , , , , , , , , , , , , , , 2 Responses

Glocalization에 대하여…

Think Globally and Act Locally라는 말이 한때 유행 한 적이 있었다. 약 10년전 당시 외국 클라이언트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 “와~!”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청담동 시안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였던 것으로 기억)

그 후 다른 외국계 클라이언트들과 외국계 인하우스 경험을 통해 여러번 이 Glocalization 현상에 대해 insight들을 얻을 수 있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개념은 사실 90년대 초중반 미국 대학원에서의 주요 논의 주제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대기업 인하우스 PR 담당자들은 자신들에게 한걸음 더 다가온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대해 상당히 낯설어 했고 난감해 하는 듯 했다.

그들이 이 주제에 대해 대화할 때 항상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글로벌 차원에서 관리 할 수 있나?”라는 주제였다. 당시 뉴저지의 본사 차원에서 동부지역 각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 매니지먼트도 사실 벅차고 종종 어긋남을 경험했었다면서…어떻게 미국전역을 넘어 유럽과 남미 그리고 저 멀리 아시아 지역(아주 두려워 했다)까지 커뮤니케이션을 관리 할 수 있을까를 그들은 고민했었다.

당시 나는 이들이 커뮤니케이션을 ‘관리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대단해 보였다. 커뮤니케이션을 ‘관리’한다는 의미 처럼 멋진 말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우리에게 아직도 이러한 ‘관리’ 마인드가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

미국 커뮤니케이션 실무자들이 머리에 머리를 맞대고 있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또 다른 글로벌라이제이션이 화두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생들은 배낭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었고, 어학연수와 유학길에 오르기 시작했었다. 한국에게는 확산이 당시 곧 글로벌라이제이션이었다.

미국 실무자들은 이윽고 관리의 형식을 여러번의 실패사례들을 통해 ‘Glocalization’이라는 형식으로 구현하고자 했던거다. 로컬의 상황과 문화를 무시한 실패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일꺼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는 이러한 개념을 시장에 실행하자 곧 바로 터져나왔다. 로컬 상황에 맞춘 실행이 본사의 방침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로컬상황에 맞추려 하니 문제가 또 불거지는거다.

글로벌의 핵심 메시지를 로컬에 적용하려 하니 이런 문제들이 떠 올랐다.

  • 글로벌의 핵심 메시지를 이해하는 로컬 커뮤니케이터가 적고, 키우기가 힘들다
  • 글로벌의 핵심 메시지를 실행하는 담당자들을 본사에서는 100% 신뢰 할 수가 없다.
  • 또한, 글로벌의 핵심 메시지를 실행하는 담당자들의 퍼포먼스를 측정 관리 할수가 없다.


여기서 핵심은 인력이었다. 글로컬라이제이션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인력들이 먼저 글로컬라이제이션이 되어있어야 하는데 이게 힘들었다.

당연히 인력들을 글로컬라이제이션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투자와 좋은 인력들을 필요로 했고, 그 인력 배정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PR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감이 없지 않았다. (특히나 커뮤니케이션 분야야 말로 관리 대상으로 떠오른지가 얼마되지 않았고, 정확하게 관리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아직도 부족하다)

그러한 공간들을 한국에서는 일정기간동안 ‘검정머리 외국인’들이 채워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영어로 대화하고 생각하는 한국인’이었다. 글로컬라이제이션의 기본 철학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일단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로컬 인력들이 좀 더 매니저블하게 활용될 수 밖에 없었다. 본사는 이 자체로도 한국시장이 (어느정도) 관리되고 있다는 안심을 하게 된거다.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관리의 철학이 너무 강하다보니, 오디언스 중심의 철학이 종종 간과되었다는 사실이다. 관리가능한 ‘검은 머리 외국인’은 로컬 오디언스의 입장에서는 본사의 노랑머리 외국인과 별반 다름이 없었고, 검은 머리 외국인들 스스로도 자신이 로컬 오디언스와 같은 부류라는 것을 일부 부정하고 싶어했다.

커뮤니케이션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들은 본사의 획일화된 글로벌 정책을 중분히 로컬라이제이션 할 수 있는 권한도 직책상 이임받기 힘들었고, 그러한 본사의 철학이 당연히 이 곳 한국에서 충분히 실현되어지지도 못했다.

외국계 클라이언트들 중 하나 둘씩 한국시장에서 사라져간 기억들을 되돌아 보면 그 실무자들의 역할이 거의 비슷한 것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후발 외국 기업들의 PR실무자들이 이전 그들의 전철을 유사하게 밟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외국기업의 글로컬라이제이션이 한국에서 진정 성공하려면 다음과 같은 보완 및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 본사 차원에서 글로컬라이제이션을 진행하는 커뮤니케이션 매니지먼트적인 철학이 오디언스를 중심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 철학이어야지, 커뮤니케이션 조직을 중심으로하는 조직 철학이 되어서는 안된다.
  • 글로컬라이제이션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지, 다양성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가면 안된다.
  • 글로컬라이제이션은 로컬 인력은 물론 로컬의 역사, 문화, 사회, 국민성, 소비자들의 특수성등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한국 소비자들을 단순 소비 대상으로 보는 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 글로컬라이제이션은 진정한 로컬 전문가들의 실행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 퍼포먼스는 분명히 입증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글로벌의 잣대로 특정되면 안된다. 메시지는 글로벌의 것이지만 실행의 잣대는 로컬에 기반해야 한다.
  • 글로컬라이제이션의 진정한 실천을 위해서는 로컬인력들을 대상으로하는 중장기적 투자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임파워먼트를 줄 수 있는 인력으로 키워내야 한다. (아니면 차라리 검은 머리 외국인 보다 노랑머리 한국인이 더 낫다)



오늘 아침 갑자기 예전 클라이언트였던 외국계회사의 파산 소식들과 Tom Fishburne의 카툰을 보면서 든 아련한 생각들을 적어보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Source: Tom Fishburne)

   

4월 072008 Tagged with , , , , , , , 2 Responses

김경해 사장의 CEO 블로그를 바라 봄…

사용자 삽입 이미지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김경해 사장님께서 CEO 블로그 <Big Think, Big PR>을 오픈하셨다. 그는 47년생이다. 예순을 넘긴 그 연세에 블로그를 하실 예정이시란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도 블로그 하나 운영하기가 멀리 사시는 부모님 찾아 뵙기 만큼 힘든데…그분도 예외는 아니시리라 믿는다.

매일 새글을 올리시거나 밤을 세워 댓글을 다시지는 못하시겠지. 그렇지만…그는 젊은 AE들이 팀블로그를 꾸민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축하 글’을 적어주셨다. “어떻게 나도 내 블로그를 만들어 볼 수 있냐?” 물으셨다. 가끔 미국에서 전해오는 PR2.0 관련 워크샵이나 세미나 invitation을 나에게 forward 해주시기도 한다. 그 만큼 관심이 있으신 게다.

그를 처음 뵜을 때 그에게서 받은 느낌은 단순히 ‘신사’였다. 회사 인턴들에게까지 극존대를 쓰시는 신사. 미국 대학원 시절 보내드린 이메일 몇통으로 나는 그 노신사 앞에서 job interview를 보게되었고, 그에게서 나의 비전을 찾았다.

지금까지 업계에서 그 만큼 PR을 사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으며, 그 만큼 전문적 경험을 쌓아온 그 연배의 CEO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 만큼 엘레강스하고 때로는 아카데믹한 영어를 쓰시는 분과 같이 일 해 본적이 없다.

내가 쥬니어일 때는 업계의 아버지(Father of Public Relations in Korea)로서 그 분이 아니라, 가까운 CEO로서의 그를 보면서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이 없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자라보니 우리나라 PR 1 세대로서 그 만한 분이 없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더욱 명확한 것은 그는 그의 세대가 져야 할 짐을 그 당시에 적절하게 짊어졌었다.

이제는 역사의 길로 걸어가시는 그에게 PR2.0, Blogger Relations, Podcasting, YouTube, Corporate Blog들은 차세대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PR 에이전시의 CEO로서, 가장 권위있는 위기관리 전문가이자 PR 컨설턴트로서, 인생의 큰 선배로서 그의 글에서 나는 ‘역사(History)’를 읽는다.

잔잔하게 남겨진 그에 대한 스토리 (His story), 곧 역사 (Histroy)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