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10년 전, 필자가 스토아 철학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게 기업 위기관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다. 개인적으로 철학 공부를 한다고 펼쳐 든 책이 대부분 스토아 철학 책이었다. 2000년도 더 된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이, 지금 이 순간 쏟아지는 언론 보도와 SNS 여론, 규제기관의 조사와 소비자 불매운동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오히려 그 어떤 현대적 위기관리 이론보다 더 본질에 가깝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3세기, 철학자 제논이 아테네의 스토아 포이킬레라는 주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철학이다. 이 철학의 핵심은 단순하다. 세상에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현명한 사람은 그 둘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통제 가능한 것에만 에너지를 집중한다는 것이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이성으로 판단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덕스러운 행동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스토아 철학의 핵심이다.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네카, 크리시포스. 이들이 남긴 글과 사유는 지금도 경이로울 만큼 생생하게 살아있다.
위기관리 컨설턴트로서 필자가 현장에서 자주 목격하는 장면이 있다. 위기가 터지면 경영진이 패닉 상태에 빠지고, 그 패닉이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이어지며, 그 잘못된 결정이 위기를 더 키우는 악순환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조언만 제대로 따랐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가치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는 걸 보면서, 필자는 확신하게 됐다. 스토아 철학은 기업 위기관리의 가장 깊은 뿌리가 될 수 있다고.
스토아 철학자들의 여덟 가지 조언을 세 단계로 나눠 살펴보자. 위기가 오기 전에 갖춰야 할 것들, 위기가 터진 순간부터 수습까지 지켜야 할 것들, 그리고 위기가 끝난 후에도 멈추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첫 번째 조언: 위기는 예고 없이 오지 않는다
세네카는 이렇게 경고했다.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준비 없이 미래를 맞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늘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상상하고 대비하는 프레메디타티오 말로룸(역경에 대한 사전 명상)을 강조했다.
위기 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여다보면 설마가 아니었던 경우가 태반이다. 내부 제보가 있었고, 현장 실무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비슷한 사례가 경쟁사에서 먼저 터졌는데도 흘려보낸 경우. 위기의 전조는 대부분 존재했다. 다만 경영진이 불편해서, 바빠서, 설마 하는 마음에 외면했을 뿐이다. 세네카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당신은 가장 나쁜 상황을 충분히 상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그 상상에 대비해 오늘 무언가를 하셨습니까?
두 번째 조언: 감정은 판단을 흐리고, 조직 전체를 흔든다
스토아 철학의 체계를 완성한 크리시포스는 감정의 위험성에 대해 깊이 파고들었다. 분노, 공포, 과도한 낙관, 이 세 가지가 위기 상황에서 경영진의 판단을 가장 심각하게 왜곡한다고 했다. 그런데 크리시포스의 이 경고는 단순히 개인의 감정 절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리더의 감정 상태는 조직 전체로 즉각 전파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조직 차원의 위기관리 문제다.
위기가 터진 다음 날 아침, CEO의 첫 마디는 30분 안에 조직 전체로 퍼진다. “우리 망하는 거 아니야?”라는 한마디가 떨어지면 오전이 지나기 전에 “위에서도 답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말이 돌고, 대응팀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브리핑 도중 감정이 격해진 CEO가 내뱉은 한마디가 다음 날 헤드라인이 되고, 밤새 불안 속에서 내린 새벽 네 시의 결정이 오전에 번복되는 장면도 낯설지 않다. 한편으로는 밤새워 작성하고 법무 검토까지 마친 공식 입장문이 발표 직전 CEO의 감정 하나로 뒤집히는 일도 있다. “이 기자 예전부터 우리 회사 물어뜯으려 했잖아.” 그 순간부터 입장문에 공격적인 문장들이 추가됐고, 결국 여론을 더 악화시켰다.
감정을 느끼는 것과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흔들리더라도 판단과 행동만큼은 이성의 궤도 위에 올려놓는 것. 그것이 크리시포스가 말한 진정한 평온이며, 위기 앞에서 리더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적 자산이다. 그리고 이 평온은 위기가 터진 후에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위기 이전부터 꾸준히 단련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조언: 상황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판단이 문제다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다.
충분히 관리 가능한 수준의 위기인데, 경영진이 “이건 회사 역사상 최악의 사태”라고 규정해 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 판단이 내려지면 실무자들은 우울한 시나리오만 보고하기 시작하고, 의사결정은 공포 위에서 이루어지며, 실제보다 훨씬 더 큰 위기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반대로 심각한 위기를 “이 정도는 곧 지나가겠지”라고 흘려버리는 경영진도 있다. 그 판단 역시 재앙의 씨앗이 된다. 위기 그 자체가 기업을 무너뜨리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위기에 대한 경영진의 잘못된 판단이 기업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네 번째 조언: 목적지 없는 배에는 어떤 바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그 다음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항구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될 수 없다.
위기가 터지면 대응팀을 꾸리고, 긴급 회의를 열고, 보도자료를 쓰고, 모니터링을 강화하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런데 “우리가 이 위기를 통해 최종적으로 어디에 도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는 경영진은 생각보다 드물다. 목표가 없으니 전략도 없고, 오늘의 대응이 내일의 대응과 충돌하고, CEO 발언이 실무진 행동과 따로 논다. 위기관리의 출발점은 대응 속도가 아니라 대응 방향의 설정이다.
다섯 번째 조언: 통제 가능한 것에 집중하라
방향을 바로잡았다면, 다음은 에너지를 어디에 쏟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것들은 우리 안에 있고, 어떤 것들은 우리 밖에 있다.
위기 대응 회의실에서 경영진의 시선은 온통 밖을 향해 있다. “저 기자가 왜 저렇게 쓰는 거야”, “경쟁사가 이 기회에 우리를 흔들려는 거 아니야”. 한 시간짜리 회의에서 우리가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10분도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머지는 전부 통제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분노와 불안이다. 그러는 사이 골든타임은 조용히 흘러간다. 경영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자기 회사가 무엇을 결정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다. 이 원칙 하나만 지켜도 위기 대응 회의의 질은 완전히 달라진다.
여섯 번째 조언: 역할에 충실하라
에픽테토스는 모든 사람은 삶이라는 연극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그 역할에 충실한 것이 덕이라고 했다.
CEO가 직접 기자들과 통화하며 배경을 설명하는 사이, 홍보팀은 그 내용을 언론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된다. 법무팀은 “절대 인정하면 안 된다”는데 영업팀장은 고객사에 이미 사과 메일을 보낸 상태다. 재무팀이 보상 규모를 산정하기도 전에 홍보팀은 “신속히 보상하겠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 혼선들이 동시에 터지는 순간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다.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초과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것, 그것이 위기 대응 체계의 기본이다.
일곱 번째 조언: 명성보다 행동이 먼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했다. 좋은 평판을 얻으려 노력하지 말고, 평판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라.
피해자 지원은 아직 검토 중인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메시지가 먼저 나오고, 재발방지 시스템은 설계도 안 됐는데 “철저한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이 앞선다. 처음 한두 번은 통할 수 있다. 그러나 말과 행동의 간극이 드러나는 순간, 신뢰는 위기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한다. 실질적인 피해 복구와 진정성 있는 사과, 구체적인 재발방지 조치. 이것이 선행되지 않은 위기 커뮤니케이션은 반드시 역풍을 맞는다.
여덟 번째 조언: 위기 이후의 개선 없이는 위기관리도 없다
세네카는 말했다.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것, 그것이 철학의 목적이라고.
위기가 수습되면 기업들은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대응팀은 해산되고, 모니터링은 종료되고, 임원들의 관심은 다음 분기 실적으로 이동한다. 위기에서 배워야 할 것들은 서랍 속 보고서 안에서 조용히 잠든다. 그렇게 2년, 3년이 지나면 비슷한 위기가 다시 터지고, 또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무엇이 취약했는지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시스템과 문화를 실제로 바꾸는 것, 그것이 위기관리의 진짜 완성이다. 세네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같은 위기에 두 번 무너지는 기업은, 첫 번째 위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기업이라고.
스토아 철학자들의 이 조언들은 어느 한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2000여 년간 동서양의 수많은 리더들이 이들의 사유에서 위기를 버텨낼 힘을 얻었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의 CEO들 중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책상에 두고 읽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것이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위기관리 현장에서 일한 필자는 잘 알고 있다.
한국의 기업 경영진들도 오늘부터 스토아 철학을 가까이하시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해, 조직의 위기 대응 역량을 한 차원 높이는 데까지, 스토아 철학은 분명 좋은 교사가 되어줄 것이다. 위기는 반드시 다시 온다. 그때 당신 곁에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세네카가 있다면, 그 위기의 무게가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