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스토익(Stoic) 위기관리 원칙 첫째, 위기를 위기라 부르는 데서 대응이 시작됨을 기억하라. 둘째, 부정과 축소에 쓰는 시간이 곧 골든타임의 소모임을 직시하라. 셋째, 받아들이되 끌려가지 말고, 수용을 능동 대응의 출발점으로 삼으라.
스토아 학파의 두 번째 수장 클레안테스가 남긴 시구가 있다. 세네카가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옮겨 적어 오늘까지 전해진다. “운명은 따르는 자를 인도하고, 거스르는 자를 끌고 간다.” 두 사람에게 같은 운명이 온다. 피할 수는 없다. 다만 따르는 자는 제 발로 걸어가고, 거스르는 자는 끌려간다. 갈림길은 운명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는 뜻이다.
위기를 맞은 기업의 첫 대응 회의실을 떠올려 보자. 많은 회의가 조금 색다른 말로 시작된다. “이게 무슨 위기입니까?” “언론이 과장하는 겁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요.” “조금 지나면 잠잠해집니다.” 사실 이런 주장과 대화는 상황 분석이 아니다. 섣부른 부정(denial)이다. 이 경우 눈앞에 도착한 위기를 위기가 아니라고 우기는 데 회의의 절반이 쓰인다는 특징이 있다.
부정은 공짜가 아니다. 위기를 인정하지 않는 동안 대응은 시작조차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연락하지 않고, 사실 확인을 미루고, 입장 정리를 뒤로 민다. 그렇게 골든타임은 소모된다. 더 나쁜 것은 부정이 밖으로 새어 나갈 때다. “별일 아니다”라는 부정의 초기 입장은 며칠 뒤 거의 수정된다. 의도적으로 축소하려던 위기는 그 의도 때문에 이내 심각성이 두 배가 되어 돌아온다.
그런 경우 기업들은 위기 앞에서 왜 부정부터 하게 될까? 위기를 인정하는 일이 곧 잘못을 인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둘은 다르다. 위기의 인정은 죄의 자백이 아니다. 상황의 직시다. “지금 우리에게 위기가 왔다”는 문장에는 아무런 법적 책임도 담겨 있지 않다. 다만 그 문장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조직은 비로소 움직일 근거와 동력을 얻는다.
수용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클레안테스가 권한 것도 두 손 놓고 떠밀려 가는 삶이 아니었다. 받아들이되, 받아들인 그 지점에서 자기 몫의 일을 시작하는 태도였다.
에픽테토스는 이를 주사위 놀이에 비유했다. 어떤 수가 나올지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나온 수를 잘 쓰는 것, 그것은 온전히 우리의 일이다. 이를 위기관리에 적용해 보자. 위기라는 패는 이미 기업 앞에 던져졌다. 그 패를 무르겠다고 우기는 데 시간을 쓰는 기업이 있고, 던져진 패를 손에 쥐고 다음 수를 두는 기업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위기가 왔다”를 인정하는 것은 항복 선언이 아니라 출발 신호다. 인정해야 목표가 서고, 목표가 서야 우선순위가 생기고, 우선순위가 생겨야 조직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위기는 인정한 만큼만 관리된다. 절반만 인정한 기업은 절반만 대응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장에서 보아도, 위기를 빨리 인정하는 기업일수록 위기를 짧게 겪는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당연한 이치다. 일찍 인정한 기업은 일찍 움직이고, 일찍 움직인 기업이 상황의 주도권을 쥔다. 늦게 인정한 기업에는 유효한 대응 없이 흘려보낸 시간만 쌓인다.
위기가 왔는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회의실에서 “이게 무슨 위기냐”는 말이 나오려는 순간, 클레안테스의 시구를 떠올리자. 따르는 자는 인도되고, 거스르는 자는 끌려간다. 기업도 다르지 않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피플워치에 연재한 [정용민의 CEO 탐구생활] 칼럼입니다. 원문: 피플워치
위기관리의 전제란 기업이 선의의 행위자로 행동하고 있고, 경영진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충실의무를, 직원이 성실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조건을 말합니다. 위기관리의 원칙과 프로세스, 그리고 컨설턴트가 내놓는 조언과 전략은 모두 이 조건 위에서 설계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조건은 법령이 정한 의무를 지켰다는 뜻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해 왔다는 뜻입니다.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 사안에 위기관리의 원칙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 그것은 관리가 아니라 은폐가 됩니다.
선의는 착함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의는 도덕적 선함이 아닙니다. 두 가지 조건으로 정의되는 기능적인 상태입니다.
첫째는 해악을 기획하지 않는 것입니다. 위기를 의도적으로 설계하거나,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 선택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둘째는 문제를 인지한 시점부터 즉시 바로잡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선의는 이 둘이 결합할 때만 성립합니다. 의도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선의가 아닙니다.
이 정의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위기의 발생 여부는 그 회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기준이 되는 것은 위기 앞에서 선의의 행위자로 움직였는가입니다.
전제는 세 층위로 나뉩니다
선의는 회사 전체의 지위이지만, 회사라는 법인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경영진의 결정과 직원의 실행을 통해서만 움직입니다. 그래서 전제도 하나의 덩어리로 확인할 수 없고, 세 층위에서 나누어 확인해야 합니다.
세 주체는 각각 다른 의무를 지고 있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 각각 다른 항목에서 확인됩니다.
주체
전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 확인되는 것
기업
선의의 행위자로 행동함
해악을 기획하지 않았는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준과 절차를 갖추어 두었는가 위험 신호가 위로 올라오는 경로를 만들고 불이익 없이 쓰이게 했는가 직원을 방패로 세우지 않고 보호했는가
경영진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충실의무
평시의 의사결정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충실하게 처리되었는가 사적인 말과 행동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았는가 감지되거나 보고된 위기 요소를 적시에 처리했는가 결정의 정보와 대안과 이유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가
직원
성실의무
맡겨진 분야와 영역의 업무를 기준대로 처리했는가 현장에서 알게 된 사실을 제때 회사에 전달했는가
표. 위기관리의 세 가지 전제와 확인 항목 — 스트래티지샐러드
여기에서 말하는 회사의 이익에는 평판이 포함됩니다. 재무적으로는 이득이 되는 결정이 회사의 이름을 깎는다면, 그것은 회사의 이익을 위한 결정이 아닙니다. 경영진 개인의 말과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적인 자리에서의 발언이나 처신이라도 회사의 자산을 깎는 순간 사적인 일로 남지 않습니다.
세 층은 서로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경영진이 아무리 신중해도 현장의 사실이 올라오지 않으면 그 신중함은 틀린 사실 위에서 작동하고, 직원이 아무리 성실해도 회사가 기준과 절차를 갖추어 두지 않았다면 개인의 성실로 메울 수 있는 범위를 넘습니다.
특히 위기의 상당수는 특별한 사건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조금씩 밀리고 생략된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회사가 직원을 방패로 세우거나 책임을 아래로 내려보내는 순간, 그 직원은 우리 편이 아니라 회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해관계자가 되고 동시에 가장 유력한 제보자가 됩니다.
법이 정한 선은 바닥이지 천장이 아닙니다
위의 세 가지 전제는 각각 법에 대응하는 최소한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업에는 준법통제기준을 마련하라는 상법 조항이 있고, 경영진에게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충실의무가 있으며, 직원에게는 신의성실 원칙에서 도출되는 성실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켰다는 사실만으로 전제가 갖추어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위기의 성패를 가르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법원이 아니라 공중이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사안이 위기가 되는 경우는 흔합니다. 절차를 다 지켰고 위법도 없었는데 여론이 돌아서는 상황입니다. 이때 위법 사항이 없다는 해명을 앞세우면 위기는 대개 더 커집니다. 공중이 묻고 있는 것은 적법했느냐가 아니라 마땅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함의 범위는 회사마다 다르고 사안마다 다릅니다. 그 회사가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신뢰의 크기, 사업이 다루는 위험의 성격, 이해관계자가 대신 감수하고 있는 위험의 크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법령은 그 가운데 사회가 최소한으로 합의해 문서로 옮겨 놓은 부분일 뿐입니다. 법적 방어선을 위기관리의 목표선으로 삼으면, 지키기는 하겠지만 그 자리에서 신뢰가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전제를 지키는 일이 곧 위기관리입니다
전제가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이 터졌다면, 그것은 위기 사안이 아니라 스스로 불러들인 경영의 실패입니다. 경영의 실패에는 위기관리의 원칙과 도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 전제가 지켜지고 있는 회사에서는 위기가 잘 발생하지 않습니다. 위기관리의 본령이 발생 가능한 위기를 미리 예상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해 두는 것이므로, 전제를 지키는 일 자체가 이미 위기관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준비는 위기가 닥친 뒤에 급히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운이 따르지 않아 위기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과가 갈리는 것은 그때입니다. 전제를 지켜 온 회사에는 설명할 것이 남아 있고, 지키지 않은 회사에는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기 상황에서 회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평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해 왔다는 사실을 정확하고 충분하게 입증하는 커뮤니케이션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하는 실행입니다. 실행 없는 입증은 변명이 되고, 입증 없는 실행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두 가지가 함께 성공할 때 위기관리가 완성됩니다.
근거로 삼은 표준과 자료 상법 제382조 제2항 · 제382조의3 · 제542조의13 민법 제2조 · 제681조 이사의 충실의무 조항은 2025년 개정으로 그 대상이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되었습니다. 본문에 인용한 조항은 전제의 최소선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며, 위기관리가 요구하는 수준은 그보다 넓습니다.
ERM은 회사의 목표 달성을 흔들 수 있는 불확실성을 전사 차원에서 다루는 체계이고, BCP는 업무가 중단되었을 때 핵심 기능을 정해진 시간 안에 되살리기 위한 체계이며, 위기관리는 발생 가능한 위기를 미리 예상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해 두는 활동입니다. 세 가지가 모두 위기관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실무의 혼선이 시작됩니다. 셋은 대체 관계가 아니라 근거로 삼는 표준부터 서로 다른 별개의 체계입니다.
세 개념은 각각 다른 표준 위에 서 있습니다
ERM의 근거는 리스크관리 표준인 ISO 31000과 COSO의 전사적 리스크관리 프레임워크입니다. 여기에서 리스크는 「목표에 대한 불확실성의 영향」으로 정의됩니다. 손실만이 아니라 목표를 흔드는 모든 불확실성이 대상이며, COSO는 2017년 개정에서 이를 전략 수립과 성과 관리에 통합되어야 하는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BCP의 근거는 사업연속성 관리 표준인 ISO 22301입니다. 여기에서 사업연속성은 「중단 상황에서도 사전에 정해 둔 허용 시간과 수준으로 제품과 서비스의 제공을 계속할 수 있는 조직의 역량」으로 정의됩니다. 업무영향분석으로 복구 우선순위를 정하고, 목표복구시간과 목표복구시점으로 허용 한계를 수치화합니다.
위기관리의 근거는 위기관리 표준인 ISO 22361입니다. 여기에서 위기는 「조직을 위협하며, 존립과 온전함을 지키기 위해 전략적이고 적응적이며 시의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비정상적이고 이례적인 사건 또는 상황」으로 정의됩니다. 주목할 것은 이 표준의 목적입니다. 대응 절차의 제공이 아니라 「전략적 위기관리 역량을 계획하고 수립하고 유지하고 검토하고 개선하는 것」입니다. 위기관리를 사후 절차가 아니라 평시에 쌓는 역량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한 단어를 더 볼 필요가 있습니다. 리스크관리를 규정해 온 표준 계열은 리스크관리를 「조직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조정된 활동」으로 정의합니다. 위기관리 표준은 위기관리를 「조직을 이끌고, 지휘하고, 통제하는 조정된 활동」으로 정의합니다. 앞에 이끈다가 하나 더 붙어 있습니다. 통제 위에 판단이 얹혀야 한다는 뜻이며, 두 영역의 성격 차이가 이 한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세 체계는 다루는 대상이 다릅니다
구분
ERM
BCP·BCM
위기관리
근거 표준
ISO 31000, COSO ERM
ISO 22301
ISO 22361
다루는 대상
목표를 흔드는 불확실성
업무의 중단
이해관계자의 판단을 흔들 소지
핵심 질문
무엇이 얼마나 흔들 수 있는가
멈추면 언제까지 되살리는가
지금 무엇을 해 두어야 하는가
주관 부서
재무, 감사, 전략
운영, 생산, 정보기술
최고경영진, 커뮤니케이션
주 산출물
리스크 목록과 한도, 보고 체계
복구 우선순위와 절차
선행 조치, 포지션, 창구 체계
성공의 모습
손실이 한도 안에 머무름
정해진 시간 안에 복구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
성공의 판정자
회사 자신
회사 자신
회사 밖의 이해관계자
표. 세 체계의 비교 — 스트래티지샐러드
성공의 모습과 성공의 판정자, 이 두 항목이 실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만듭니다. ERM은 손실이 한도 안에 있었는지를, BCP는 몇 시간 만에 복구했는지를 회사가 스스로 판정할 수 있습니다. 위기관리에는 그런 내부 지표가 없습니다. 판정은 회사 밖에서 이루어지고, 판정의 기준도 회사가 정하지 않습니다.
주관 부서가 서로 다르다는 점도 뒤에서 다시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세 체계가 위기 상황에서 충돌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 체계 모두 본령은 평시에 있습니다
세 가지 모두 사고가 난 뒤에 꺼내 드는 대응책이 아닙니다. ERM은 평시에 무엇이 회사를 흔들 수 있는지 목록으로 만들어 두는 일이고, BCP는 멈췄을 때 무엇부터 되살릴지 미리 정해 두는 일입니다.
위기관리도 같습니다. 진짜 위기관리는 발생 가능한 위기를 미리 예상하고, 그에 대해 지금 해야 할 일을 그때 해 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위기는 이 단계에서 소멸합니다.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알려지지 않고, 평가받지도 않은 채 사라집니다.
위기관리에는 두 개의 국면이 있습니다
평시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위기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후의 활동은 성격이 다르며, 실무에서는 데미지 컨트롤이라고 부르는 편이 정확합니다.
데미지 컨트롤의 목표는 단순합니다. 예상되는 피해를 신속하게 계산하고, 그 피해를 최소화하며, 지속 기간을 최단으로 줄이는 것입니다. 회복이 아니라 축소가 목표입니다.
데미지 컨트롤은 표준에 등재된 용어가 아니라 실무에서 쓰는 말입니다. 다만 위기관리 표준이 사건과 위기를 나누는 방식과 짝을 이룹니다. 사건은 기존 절차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고, 위기는 준비된 절차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절차가 감당하는 구간까지는 준비의 영역이고, 그 밖으로 넘어간 구간이 데미지 컨트롤의 영역입니다.
이 구분을 놓치면 위기관리를 사후 대응으로만 이해하게 됩니다. 위기가 발생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구성되는 대책 기구가 그 결과입니다. 그런 기구는 유효한 대응 시점을 이미 지나 있으며, 위기관리 체계가 아니라 수습 기구로 보아야 합니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같은 것은 아닙니다.
위기관리의 성과는 증명되지 않습니다
ERM은 손실 한도로, BCP는 목표복구시간으로 성과를 숫자로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위기관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잘 된 위기관리의 결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고, 그 상태에는 증명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기관리는 투자 판단이 가장 어려운 영역입니다. 다만 반대 방향의 신호는 분명합니다. 알려진 위기가 짧은 기간에 줄을 잇는 회사는 위기관리가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부재가 곧 지표입니다.
널리 알려진 위기관리 성공 사례들도 이 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례들은 대부분 이미 위기가 발생해 알려진 뒤의 대응을 평가한 것입니다. 배울 가치가 있는 기록이지만, 위기관리의 표준이 아니라 데미지 컨트롤의 표준입니다.
BCP를 갖췄다고 위기관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무에서 가장 비용이 큰 오해입니다. BCP는 멈춘 공장을 다시 돌리는 계획이지, 흔들린 신뢰를 되돌리는 계획이 아닙니다. 목적도 산출물도 실행 주체도 다릅니다.
복구는 예정보다 빨리 끝났는데 시장에서의 자격은 회복되지 않은 상태가 실제로 존재합니다. 복구는 회사의 기준으로 완료되고, 신뢰는 상대의 기준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세 체계는 위기 상황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보고합니다
소유 부서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상황을 서로 다르게 정의합니다. 재무는 손실 규모로, 운영은 복구 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은 이해관계자의 인식으로 보고합니다. 셋 다 맞는 보고지만 서로 번역되지 않습니다.
조율되지 않은 채 각각 올라가면 최고경영진의 판단이 지연됩니다. 그리고 그 지연이 만든 공백은 회사의 설명이 아니라 외부의 해석으로 채워집니다. 위기 초기에 컨트롤타워가 하나로 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할 때
회사가 보유한 문서가 세 가지 중 무엇인지 먼저 확인해 보십시오. 표지에 위기관리라고 적혀 있어도 내용이 복구 절차라면 그것은 BCP입니다.
각 체계의 담당 부서와 최종 책임자가 각각 지정되어 있는지 보십시오. 한 부서가 셋을 모두 맡고 있다면 실제로는 하나만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평시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짚어 보십시오. 세 체계 모두 평시 활동이 본령이며, 발생 이후의 절차만 있는 문서는 준비가 아니라 예고편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세 부서의 보고가 한자리에서 합쳐지는 구조가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이 구조가 없으면 세 체계를 모두 갖추고도 판단이 늦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외부 자문을 구할 때는 사전 체계를 세우는 일인지 발생 이후의 대응인지부터 정해 두십시오. 이 구분 없이 받은 제안들은 서로 비교되지 않습니다.
근거로 삼은 표준과 자료 ISO 22361:2022 Security and resilience — Crisis management — Guidelines ISO 22301:2019 Security and resilience — Business continuity management systems — Requirements ISO 31000:2018 Risk management — Guidelines COSO Enterprise Risk Management — Integrating with Strategy and Performance (2017)
CEO를 위한 스토익(Stoic) 위기관리 원칙 첫째, 위기 초기의 첫 보고를 사실로 확정하지 말라. 둘째, 인상과 사실을 분리해 ‘아직 모른다’의 기간을 일정기간 유지하라. 셋째, 입장 표명은 사실의 속도가 아니라 확인의 속도에 맞추라.
에픽테토스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훈련하라고 가르쳤다. 거칠고 강렬한 인상이 밀려올 때마다 그것을 향해 말하라. “너는 인상일 뿐, 보이는 그대로의 것이 아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를 정교하게 구분했다. 밖에서 밀려오는 것은 인상(phantasia)이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나의 동의(synkatathesis)다. 인상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동의는 언제나 내 권한이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위기관리의 눈으로 읽으면 이것은 놀랍도록 실전적인 지침이다. 위기가 터진 첫날, 경영진의 책상에 올라오는 첫 보고가 바로 그 ‘인상’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오래 확인해 온 법칙이 있다. 위기의 첫 보고는 대부분 틀리며 정확하지 않다. 피해 규모는 더 커지거나 줄어들고, 사고 원인은 며칠 뒤 다른 것으로 밝혀지며, 책임 소재는 거의 반드시 수정이 반복된다. 첫 보고가 끝까지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보고자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위기 초기의 정보란 원래 부서지고 뒤섞인 채로 급박하게 도착한다. 안개 속에서 급히 그린 지도가 정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많은 경영진이 그 첫 보고에 즉시 ‘동의’해 버리는 경우다. 첫 지도를 손에 쥐고 전군에 진격 명령을 내린다. 원인을 단정한 공식 입장이 나가고, 책임자를 지목한 발표가 이어지면 문제다. 그리고 하루 이틀 뒤 사실이 수정되면, 회사는 말을 바꿔야 한다. 첫 발표의 신뢰가 무너지고, ‘거짓말하는 회사’라는 새 프레임까지 얻는다. 위기 그 자체보다 번복이 회사를 더 깊이 상처 낸다.
여기서 반론이 나온다. “요즘 같은 속도전에 기다리라는 말이냐. 골든타임을 놓치면 어쩌냐.” 의미있는 걱정이다. 그러나 신속과 성급은 다르다. 신속은 확인된 것을 빠르게 말하는 것이고, 성급은 확인되지 않은 것을 빠르게 말하는 것이다. 위기 초기에 회사가 내야 할 메시지는 원인 규명도 책임 판정도 아니다. 상황을 인지했고, 문제나 피해자를 살피고 있으며, 사실을 확인 중이라는 것. 이것만으로 첫 메시지는 충분하다. 확인되지 않은 것을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무능이 아니라 정직이며, 실은 상당한 용기다.
에픽테토스의 훈련을 위기관리의 책상 위로 옮겨 보자. 첫 보고가 올라오면 그것에 의지해 의사결정 하기 전에 한 번 말해 보는 것이다. “이건 첫 보고일 뿐, 사실 그대로가 아니다.” 그리고 세 가지를 물어보자. 이 중 정확하게 확인된 것은 무엇인가? 추정인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 줄의 분류가 성급한 의사결정을 막는 방어선이 된다.
일시 의사결정을 유보하는 것은 판단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판단을 제자리에 놓는 것이다. 그 기간을 견디면 오판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결정한 오판은 두고두고 회사를 따라다닌다. 인상은 밀려오게 두되, 동의는 아껴라. 위기의 첫날, 리더의 품격은 무엇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에 급히 서명하지 않았느냐에서 갈린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피플워치에 연재한 [정용민의 CEO 탐구생활] 칼럼입니다. 원문: 피플워치
기자회견은 위기 국면에서 회사가 선택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방식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식입니다. 그래서 열 것인가보다 언제 열 것인가가 먼저입니다. 회사가 해야 할 행동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뒤에 여는 회견과, 행동 없이 소통만을 목적으로 여는 회견은 결과가 전혀 다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는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자회견은 회사가 무엇을 했는지를 설명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실무에서는 순서가 뒤집힌 회견을 자주 봅니다. 여론이 나빠지자 우선 회견부터 열고, 그 자리에서 앞으로 피해자를 만나 보겠다고 말하는 방식입니다. 회견장에서 나온 약속은 아직 이행되지 않은 말이고, 듣는 쪽은 그 말이 지켜질지를 다시 지켜보게 됩니다. 사안이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 기간이 연장됩니다.
그래서 회사가 해야 할 일을 어느 정도 이행한 뒤에 회견을 여는 편이 낫습니다. 최고경영자가 피해자를 직접 만나 위로하고 사과하며 배상 협의를 진행한 뒤에 여는 회견은, 이미 이루어진 일을 설명하는 자리가 됩니다. 회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말이 아니라 사실로 전달됩니다.
다만 이 조언에는 반론이 있습니다. 그런 활동을 먼저 하다 보면 물리적으로 시간이 흐르고, 그사이 골든타임을 놓친다는 지적입니다. 타당한 지적입니다. 실제로 불을 끄기 위해 회견을 급하게 여는 상황은 자주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무조건 선행하고 회견을 늦추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준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기자들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로 모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했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상태인가가 회견을 열 수 있는 조건입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경우라면 그 일은 반드시 했어야 합니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것은 기자들에게 그대로 읽히고, 회견은 그 지점에서 무너집니다.
반대로 시간이나 상황이 허락하지 않은 경우라면, 그 일에 앞으로 어떻게 임할 것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 어떤 기준과 원칙으로 실행할 것인지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실체 없는 다짐과 기준이 선 설명은 다르게 받아들여집니다.
해야 할 일의 내용은 위기 유형에 따라 다릅니다. 피해자를 만나는 일일 수도 있고, 사안과 얽힌 여러 이해관계자를 접촉하는 일일 수도 있으며, 사고 현장에 직접 가 보거나 실태를 파악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실체 있는 실행이나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소통이 성립합니다.
메시지 없는 회견은 사안을 키웁니다
여론이 나빠지면 사과 기자회견을 하자는 의견이 나오는데, 무엇을 누구에게 어떤 순서로 말할지에 대한 논의는 건너뛰는 경우가 많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사과문을 읽는 행동 자체에 관심이 쏠립니다.
그러나 기자회견의 성패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말했는가로 갈립니다. 메시지가 준비되지 않은 행동은 사안을 키웁니다. 회견을 열었는데 부정적인 기사가 더 늘어나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질의응답을 포함할 것인가
회견을 설계할 때 중요한 판단입니다. 질문을 일정 수 이상 받아야 한다는 통념이 있지만, 그대로 따를 일은 아닙니다.
준비가 완료된 상태라면 질문을 받는 편이 낫습니다. 회피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고, 준비한 메시지를 여러 번 전달할 기회도 생깁니다.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면 다릅니다. 초기 입장문만 우선 전달하고 시간을 확보한 뒤, 완전히 준비된 상태에서 질의응답을 진행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이 쏟아지는 자리는 그 자체로 다음 기사가 됩니다.
최고경영자의 질의응답 참여는 플래닝의 문제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최고경영자가 질의응답에 참여하는 것이 권장됩니다. 다만 실제로는 참여하지 않거나 형식적으로만 참여하는 경우가 있고, 그 자체를 실패로 볼 일은 아닙니다. 준비 상태와 개인적 성향에 따라 홍보부문이 미리 설계해야 할 사항입니다.
경향은 대체로 나뉩니다. 전문경영인은 질의응답에 참여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고, 오너의 경우 참여하지 않는 비율이 높은 편입니다.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하면 홍보부문의 지원을 받아 진행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판단이 회견 당일에 즉흥적으로 내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어디까지 답할지, 답하지 않는 부분은 누가 이어받을지가 미리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참여시키기로 했다면 예상 질문에 대한 훈련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열지 않는 선택도 있습니다
모든 위기가 기자회견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사안의 무게, 이해관계자의 범위, 이미 나간 메시지의 양을 함께 봐야 합니다. 서면 입장문으로 충분한 사안에 회견을 열면 사안의 크기를 회사가 스스로 키우는 셈이 됩니다.
반대로 최고경영자가 직접 나서야 할 무게의 사안에 실무 부서 명의의 문서만 나가면, 회사가 사안을 가볍게 본다는 신호가 됩니다. 형식의 무게와 사안의 무게를 맞추는 것이 판단의 핵심입니다.
위기관리위원회는 위기 상황에서 회사의 최종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기구입니다. 실행 조직이 아니라 결정 조직이며, 위기의 심각성이 일정 수준을 넘어섰을 때 가동됩니다. 모든 위기에 위원회가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위기 대응 조직은 단계로 나뉩니다
잘 설계된 위기관리 체계는 대응 조직을 하나로 두지 않습니다. 심각성에 따라 가동되는 조직이 달라지고, 조직마다 책임자와 권한이 다릅니다.
가장 아래에는 상황을 처음 감지한 부서와 그 사안에 가장 관여도가 높은 주관부서가 있습니다. 사안이 커지면 실무대응그룹(위기관리팀)이 소집됩니다. 주관부서를 중심으로 유관부서와 홍보, 법무 등 실행팀이 합류하고, 필요하면 외부 자문이 참여해 초기 대응과 상황 관리를 총괄합니다.
사안이 더 커지면 위기관리위원회가 열립니다. 사업부문장 또는 최고경영자가 위원장을 맡고, 사업부문장 그룹과 실무대응그룹이 함께 들어옵니다. 물리적으로 모이는 공간이 위기관리센터(워룸)입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작은 사안에 최고경영자가 매번 소집되면 조직은 지치고, 큰 사안에 실무자만 남으면 결정이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 들어가야 합니까
결정 권한을 가진 사람이 들어가야 합니다. 보고할 사람이 아니라 결정할 사람입니다. 참석자들이 모두 “확인해 보겠습니다”라고 답한다면 그 위원회는 기능하지 않습니다.
위원장이 자리를 비울 경우를 대비한 대행 순서도 미리 정해 두어야 합니다. 위기는 위원장의 일정에 맞춰 발생하지 않습니다. 대행 원칙이 없는 조직은 위원장이 출장 중이라는 이유로 반나절을 흘려보냅니다.
규모는 작을수록 좋습니다. 참석자가 늘어날수록 결정 속도는 느려지고 정보 유출 위험은 커집니다.
결정과 실행을 나누는 이유
위기 상황에서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방향을 정하는 일과 정해진 방향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이 둘을 같은 사람들이 하면 어느 쪽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위원회는 방향을 정합니다. 무엇을 인정하고 무엇을 보류할지, 누가 대변인이 될지, 어느 이해관계자를 먼저 다룰지를 결정합니다. 실행은 실무대응그룹과 각 부서가 맡습니다.
결정과 실행이 분리되면 위원회는 상황 변화에 따라 방향을 조정할 여유를 갖습니다. 실행에 매몰된 조직은 방향이 틀렸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위원회가 작동하지 않는 조건
첫째, 소집 기준이 없는 경우입니다. 어느 정도 사안이면 위원회를 여는지가 정해져 있지 않으면, 열어야 할 때 열리지 않고 열지 않아도 될 때 열립니다.
둘째, 최종 결정자가 빠진 경우입니다. 위원회에서 합의한 내용이 나중에 뒤집히면 이후의 모든 논의가 무의미해집니다.
셋째, 전문가에게 결정을 미루는 경우입니다. 법무, 홍보, 외부 자문이 각자의 관점에서 조언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 조언들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위원회의 일입니다. 전문가들끼리 합의하도록 맡겨 두면 결정은 나오지 않습니다.
넷째, 평시에 한 번도 모이지 않은 경우입니다. 잘 운영되는 위원회는 위기가 없을 때도 정기적으로 만나 위기 요소를 점검하고 대비 상태를 확인합니다.
위기관리 매뉴얼은 위기가 발생했을 때 회사가 그 위기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미리 정해 둔 문서입니다. 영어로 옮기면 how to handle our corporate crises에 해당합니다. 특정 부서의 문서가 아니라 전사적으로 필요한 문서이며, 매뉴얼을 갖춘 것과 위기관리 역량을 갖춘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매뉴얼과 무엇이 다른가
실무에서 가장 자주 혼동되는 두 문서입니다. 두 문서는 별도로 만들어지지만, 조직과 프로세스와 역할 체계를 공유하며 서로 연동됩니다. 위기관리 매뉴얼이 상위 체계이고,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매뉴얼은 그 체계 안에서 커뮤니케이션 실행에 집중합니다.
위기관리 매뉴얼은 위기 자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다룹니다. 사고 수습, 피해자 대응, 생산과 영업의 조정, 법적 대응, 규제기관 신고, 복구 절차가 모두 여기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대상은 전사입니다. 생산, 안전, 품질, 법무, 인사, 영업, 대관, 재무, 정보보안, 고객서비스, 커뮤니케이션 부서가 각자의 역할을 갖습니다.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매뉴얼은 그 위기를 어떻게 알릴 것인가를 다룹니다. 영어로는 how to communicate about it입니다. 대변인 지정, 창구일원화, 이해관계자별 메시지, 언론 응대, 기자회견 운영, 사과문의 원칙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대상은 커뮤니케이션 부서와 대변인, 그리고 최고경영자입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커뮤니케이션 매뉴얼만 만들어 두고 위기관리 체계를 갖췄다고 여기는 기업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직은 말할 준비는 되어 있으나 정작 위기 자체를 다룰 준비가 없습니다. 반대로 대응 절차만 정해 두고 커뮤니케이션을 뒤로 미룬 조직은, 잘 수습하고도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해 평가받지 못합니다.
매뉴얼이 담아야 하는 것
매뉴얼의 출발점은 정의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무엇을 위기로 볼 것인가를 먼저 정합니다. 브랜드에 영향을 미치는가, 평판과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는가, 정상적인 사업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가, 나아가 회사의 존립이나 관계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가. 이런 판별 기준이 있어야 현장에서 판단이 섭니다.
다음은 심각성 구분입니다. 모든 위기를 같은 무게로 다룰 수는 없습니다. 사안의 규모와 파급력에 따라 단계를 나누고, 단계마다 가동되는 조직과 대응 수준을 연동시킵니다.
그리고 조직입니다. 누가 감지하고, 누가 주관하며, 어느 단계에서 실무대응그룹(위기관리팀)이 소집되고, 어느 단계에서 위기관리위원회가 열리며, 위기관리센터(워룸)를 언제 여는지를 정합니다.
마지막으로 프로세스입니다. 감지에서 시작해 상황파악, 초기대응, 보고, 의사결정, 대응실행, 추이확인을 거쳐 종결과 사후평가, 개선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단계별로 정리합니다. 연락망은 별첨이지 본체가 아닙니다.
매뉴얼만으로 부족한 이유
매뉴얼은 문서이고 위기는 사람이 관리합니다. 그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것이 훈련입니다. 위기관리에 실패한 기업 중 상당수는 매뉴얼이 없었던 곳이 아니라 있었는데 쓰지 못한 곳입니다.
실무자가 매뉴얼을 찾지 않고도 첫 한 시간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조직은 매뉴얼을 제대로 갖춘 것입니다. 반대로 매뉴얼을 찾아 읽어야만 움직일 수 있다면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입니다.
매뉴얼이 죽는 조건
첫째, 갱신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조직이 바뀌고 사업이 바뀌면 매뉴얼의 전제도 바뀝니다. 담당자 이름이 절반 이상 맞지 않는 매뉴얼은 이미 문서가 아닙니다. 법령에 근거한 신고 기한이나 적용 기준도 개정되므로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 너무 두꺼운 경우입니다. 분량이 늘어날수록 실제로 읽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위기 상황에서 펼쳐 볼 수 있는 분량인지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남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경우입니다. 다른 회사의 매뉴얼은 그 회사의 위기 요소와 조직 구조를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형식은 참고하되 내용은 자사의 위기요소 진단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미디어 트레이닝은 경영진과 대변인이 언론을 상대할 때 필요한 판단과 화법을 실습으로 익히는 훈련입니다. 말솜씨를 다듬는 과정이 아닙니다. 질문에 담긴 구조를 읽고, 답할 것과 답하지 않을 것을 순간적으로 가르는 훈련입니다.
질문을 분별하는 훈련
숙련된 기자의 질문에는 확인하려는 사실과 끌어내려는 발언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확인해 주지 않아도 될 것까지 확인해 주게 됩니다.
실제 현장에서 반복되는 질문 형태가 있습니다. 여러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붓는 방식, 같은 답변이 반복될 때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강요하는 방식, 현장에 없는 제3자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 잘못된 전제를 깔아 두고 묻는 방식, 확언을 요구하는 방식,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해 묻는 방식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위험한 것은 잘못된 전제를 깔아 둔 질문입니다. 전제를 그대로 두고 답하면 그 전제를 인정한 것이 됩니다. 훈련의 핵심은 이런 질문을 만났을 때 전제부터 바로잡고 답변으로 넘어가는 습관을 몸에 붙이는 것입니다.
메시지를 유지하는 훈련
열 개의 질문에 열 개의 다른 답을 하면 기사에는 가장 자극적인 하나만 남습니다. 무엇을 반복할지 정하고 그것을 흔들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 훈련의 중심입니다.
질문에서 핵심 메시지로 넘어가는 연결이 특히 중요합니다. 이 연결이 어색하면 회피로 보이고, 자연스러우면 설명으로 읽힙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이어 붙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전달됩니다.
답변의 길이도 훈련 대상입니다. 질문보다 답변이 훨씬 길어지면 하지 않아도 될 말이 섞여 들어갑니다.
습관을 교정하는 훈련
훈련의 상당 부분은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몸에 밴 습관을 걷어내는 데 쓰입니다.
기자를 가르치려 드는 태도, 기사나 질문을 비난하는 반응, 오프 더 레코드를 시도하는 버릇, 질문이 끝나기 전에 답을 시작하는 조급함, 경쟁사를 언급하며 갈등 소재를 스스로 제공하는 발언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습관은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실습 장면을 녹화해 다시 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신의 답변 영상을 처음 보는 경영진은 대부분 놀랍니다. 스스로 생각한 태도와 화면에 담긴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시선, 표정, 침묵의 길이 같은 비언어 요소도 이 과정에서 함께 점검합니다.
강의와 훈련은 다릅니다
미디어 트레이닝의 본질은 실습입니다. 강의만 듣고 끝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실제로 질문을 받고, 답변하고, 그 장면을 복기하는 과정이 있어야 훈련입니다.
질문자 역할을 맡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현직 기자의 질문 방식을 아는 사람이 압박 수위를 조절하며 물어야 실전에 가까워집니다. 친절한 질문만 오가는 세션은 훈련이 아니라 예행연습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미디어 트레이닝은 기술 습득이 아니라 감각 유지에 가깝습니다. 훈련한 지 오래된 경영진은 실제 상황에서 훈련하지 않은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게 반응합니다. 언론 환경도 몇 년 단위로 바뀌고, 경영진이 바뀌면 조직의 훈련 이력은 개인에게 이전되지 않습니다.
CEO를 위한 스토익(Stoic) 위기관리 원칙 첫째, 모든 위기나 이슈를 같은 크기로 보지 말라. 둘째, 정기적으로 현안에서 물러나 전체 지형을 조망하라. 셋째, 조망에서 얻은 경중의 순서대로 자원을 배분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플라톤의 가르침을 빌려 이렇게 권했다. 인간사를 논하려거든 높은 곳에 올라 지상의 일들을 내려다보라. 무리 지어 모인 사람들, 행군하는 군대, 농사와 혼인과 이별, 태어남과 죽음까지. 그는 황제의 격무 한가운데서도 이 조망 훈련을 반복했다. 눈앞의 소란에서 한 발 물러나 전체를 내려다볼 때, 비로소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은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기업 위기관리에 있어서도 큰 것을 보지 못해 실패하는 회사 보다, 작은 것에 매몰되어 실패하는 회사가 더 많다. 그런 회사에서는 사소한 온라인 뒷말에 대응 회의가 소집되고, 지엽적인 기사 한 줄에 조직이 들썩인다. 그러는 사이 정작 치명적인 위험은 아무 관심을 받지 못하고 점점 자라난다. 낮은 곳에 서 있으면 모든 이슈가 같은 크기로 보인다. 눈앞에 있는 것이 가장 커 보이는 착시 때문이다.
모든 이슈에 전력으로 대응하는 회사는 부지런한 회사가 아니다. 위험한 회사다. 조직의 힘은 한정되어 있다. 작은 이슈마다 전력을 쏟는 회사는, 정작 회사의 명운이 걸린 이슈가 왔을 때 쓸 힘이 남아 있지 않다. 위기관리는 체력전이다. 어디에 힘을 쓰고 어디에 힘을 아낄지의 배분도 전략이다.
응급실을 떠올려 보자. 환자가 밀려들 때 의료진은 접수 순서대로 진료하지 않는다. 생명이 위태로운 중환자부터 본다. 트리아지(triage), 곧 중증도 분류다. 먼저 온 경상 환자에게 매달리다 중환자를 놓치는 응급실은 없다. 그런데 기업의 위기나 이슈 대응실에서는 이 당연한 일이 자주 뒤집힌다. 먼저 눈에 띈 이슈, 윗분이 언급한 이슈, 목소리 큰 부서의 이슈가 중환자보다 먼저 진료대에 오른다.
지난 편에서 위기의 신호는 듣는 데서 잡힌다고 했다. 그런데 제대로 듣기 시작한 회사에는 새로운 과제가 생긴다. 들리는 소리가 너무 많아지는 것이다. 그 모든 소리에 일일이 반응할 수는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분별이다. 어느 소리가 중하고 어느 소리가 가벼운가. 이 분별이 조망에서 나온다.
조망은 타고나는 감각이 아니다. 훈련이다. 마르쿠스가 매일 높은 곳에 오르기를 반복했듯, 경영진에게도 정기적인 ‘물러남’의 시간이 필요하다. 눈앞의 현안에서 한 발 떨어져, 우리 회사를 둘러싼 위험의 전체 지형을 내려다보는 시간. 어떤 위험이 자라고 있고, 어떤 이슈가 시들고 있으며, 우리의 힘은 지금 어디에 쏠려 있는가. 분기에 한 번이라도 이 질문 앞에 앉는 회사와, 매일 눈앞의 불씨만 쫓아다니는 회사는 위기 앞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얻는다.
조망이 주는 선물이 하나 더 있다. 마음의 평정이다. 마르쿠스가 높은 곳에 오른 본래 이유이기도 하다. 코앞에서 보면 거대해 보이던 이슈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제 크기로 돌아온다. 회사를 삼킬 것 같던 논란이 사실은 지나가는 소나기였음이 보이고, 반대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균열이 사실은 둑 전체를 위협하고 있었음도 보인다. 조망은 과대평가와 과소평가를 함께 교정한다. 이슈를 실제 크기로 보는 것, 위기관리는 거기서부터 정확해진다.
낮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위기로 보이고, 그래서 아무것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 높이 올라야 경중이 보인다. 경중이 보여야 순서가 서고, 순서가 서야 힘이 남는다. 그 남은 힘이, 진짜 위기가 왔을 때 회사를 지킨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피플워치에 연재한 [정용민의 CEO 탐구생활] 칼럼입니다. 원문: 피플워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