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CEO를 위한 스토익(Stoic) 위기관리 원칙
첫째, 위기를 위기라 부르는 데서 대응이 시작됨을 기억하라.
둘째, 부정과 축소에 쓰는 시간이 곧 골든타임의 소모임을 직시하라.
셋째, 받아들이되 끌려가지 말고, 수용을 능동 대응의 출발점으로 삼으라.
스토아 학파의 두 번째 수장 클레안테스가 남긴 시구가 있다. 세네카가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옮겨 적어 오늘까지 전해진다. “운명은 따르는 자를 인도하고, 거스르는 자를 끌고 간다.” 두 사람에게 같은 운명이 온다. 피할 수는 없다. 다만 따르는 자는 제 발로 걸어가고, 거스르는 자는 끌려간다. 갈림길은 운명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는 뜻이다.
위기를 맞은 기업의 첫 대응 회의실을 떠올려 보자. 많은 회의가 조금 색다른 말로 시작된다. “이게 무슨 위기입니까?” “언론이 과장하는 겁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요.” “조금 지나면 잠잠해집니다.” 사실 이런 주장과 대화는 상황 분석이 아니다. 섣부른 부정(denial)이다. 이 경우 눈앞에 도착한 위기를 위기가 아니라고 우기는 데 회의의 절반이 쓰인다는 특징이 있다.
부정은 공짜가 아니다. 위기를 인정하지 않는 동안 대응은 시작조차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연락하지 않고, 사실 확인을 미루고, 입장 정리를 뒤로 민다. 그렇게 골든타임은 소모된다. 더 나쁜 것은 부정이 밖으로 새어 나갈 때다. “별일 아니다”라는 부정의 초기 입장은 며칠 뒤 거의 수정된다. 의도적으로 축소하려던 위기는 그 의도 때문에 이내 심각성이 두 배가 되어 돌아온다.
그런 경우 기업들은 위기 앞에서 왜 부정부터 하게 될까? 위기를 인정하는 일이 곧 잘못을 인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둘은 다르다. 위기의 인정은 죄의 자백이 아니다. 상황의 직시다. “지금 우리에게 위기가 왔다”는 문장에는 아무런 법적 책임도 담겨 있지 않다. 다만 그 문장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조직은 비로소 움직일 근거와 동력을 얻는다.
수용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클레안테스가 권한 것도 두 손 놓고 떠밀려 가는 삶이 아니었다. 받아들이되, 받아들인 그 지점에서 자기 몫의 일을 시작하는 태도였다.
에픽테토스는 이를 주사위 놀이에 비유했다. 어떤 수가 나올지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나온 수를 잘 쓰는 것, 그것은 온전히 우리의 일이다. 이를 위기관리에 적용해 보자. 위기라는 패는 이미 기업 앞에 던져졌다. 그 패를 무르겠다고 우기는 데 시간을 쓰는 기업이 있고, 던져진 패를 손에 쥐고 다음 수를 두는 기업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위기가 왔다”를 인정하는 것은 항복 선언이 아니라 출발 신호다. 인정해야 목표가 서고, 목표가 서야 우선순위가 생기고, 우선순위가 생겨야 조직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위기는 인정한 만큼만 관리된다. 절반만 인정한 기업은 절반만 대응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장에서 보아도, 위기를 빨리 인정하는 기업일수록 위기를 짧게 겪는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당연한 이치다. 일찍 인정한 기업은 일찍 움직이고, 일찍 움직인 기업이 상황의 주도권을 쥔다. 늦게 인정한 기업에는 유효한 대응 없이 흘려보낸 시간만 쌓인다.
위기가 왔는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회의실에서 “이게 무슨 위기냐”는 말이 나오려는 순간, 클레안테스의 시구를 떠올리자. 따르는 자는 인도되고, 거스르는 자는 끌려간다. 기업도 다르지 않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피플워치에 연재한 [정용민의 CEO 탐구생활] 칼럼입니다. 원문: 피플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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