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정용민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펌(Crisis Communications Firm) 스트래티지샐러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11월 162007 0 Responses

글로벌 브랜드 ‘샘숭(SAMSUNG)’- 한국의 삼성전자 수정 | 삭제

글로벌 브랜드 ‘샘숭(SAMSUNG)’- 한국의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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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미국 시장에서 삼성은 샘숭(SAMSUNG)으로 불린다. 믿기지 않겠지만 90년대 중반만 해도 많은 미국인들은 그들의 발음대로 샘숭이 “일본의 싸구려 가전제품(?)”인 줄 알고 있었다. 뉴욕 맨하탄의 초대형 전자제품 매장의 고급형 진열대에는500불이 넘는 소니(SONY) 제품들이, 맨 구석 싸구려 코너에는 99불짜리 샘숭(SAMSUNG) 제품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삼성전자의 “Syncmaster”라는 PC 모니터는 북미 지역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삼성 제품은 전반적으로 블루칼라 브랜드 (blue collar brand: 싸구려 브랜드의 의미)의 이미지를 벋어날 수 없었다.

 

96년 8월 서울의 신라호텔. 사장단을 비롯한 삼성의 핵심 경영진 6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돌아 온 이건희 회장의 ‘IOC 위원 피선 축하연’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쩐지 주인공인 이 회장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 회장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다가올 21세기는 브랜드가 경쟁의 핵심이 되는 소프트 경쟁 시대인데, 사장들이 앉아서 광고 카피나 고치고 있어서야 어디 될 일입니까. 브랜드나 광고는 전문적인 분야입니다. 전문가에게 맡겨 삼성의 이미지를 높일 전략을 짜도록 하세요.” 올림픽을 무대로 한 글로벌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은 이 회장은 현장에서 본 삼성의 이미지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어쨌든 삼성의 글로벌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97년 9월 그룹차원의 브랜드 전략이 수립됐다. 삼성의 이미지를 말 그대로 C급에서 A급 수준으로 높이기 위한 전략이 마련됐다. 그 동안 삼성전자의 해외 법인들은 국가별로 55개의 서로 다른 광고 대행사를 고용했었는데, 기업이미지 통일을 위해 모든 글로벌 광고를 Foote, Cone & Belding Worldwide라는 한 회사에게 맡기고 무려 4억달러의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다.

 

90년대 후반 중국시장에서 삼성 ‘애니콜’이라는 휴대폰 브랜드가 히트를 하고, 고급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면서 삼성 휴대폰 브랜드의 자신감은, 고부가가치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게 만들었다.

 

미주나 유럽시장에 먼저 신제품을 출시하는 전략을 바꿔 중국 등 개발도상국에도 동시에 출품했다. 그 결과 2001년 한해 애니콜은 전세계 시장에서 3000만대 이상 판매되어 1조원 이상 순익을 기록했다.

 

또한 삼성은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을 강화했다. 삼성은 무선통신 파트너로서 98년 일본 나가노(長野) 동계 올림픽,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미국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을 거쳐 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까지 연이어 공식 후원한다. 이러한 적극적인 스포츠 마케팅 노력으로 최근 ‘애니콜’은 노키아나 모토롤라보다 세계시장에서 더 고급 휴대폰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에는 ‘DigitAll Hope’라는 자선 프로그램을 마련해 인도, 호주,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NGO, 교육기관 등에 자선활동 기금을 위한 대규모 펀드를 조성하기도 하는 등 이제는 세계 각지에서 그 지역에 맞는 토착 마케팅을 통해 강자(强者)의 여유를 보이기도 한다.

 

최근 세계적 브랜드 컨설팅사 인터브랜드(Interbrand)는2003년 ‘브랜드 가치(Brand Value)’ 랭킹에서 삼성전자를 25위로 꼽았다. 아쉽게도 98년까지 삼성전자는 세계 100대 브랜드에 포함되지 못했었다. 그러나 새롭게 수립된 브랜드 전략을 지속적으로 실행한 결과 삼성은 2000년 43위, 2001년 42위에 랭크되더니 작년에는 34위로 급상승했다. 현재 세계 25위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약 108억 달러(한화 약 12조4천억원)로 산정된다.

 

90년대 중반, 미국 뉴욕의 중심 타임스퀘어에서 반짝이던 삼성의 파란 로고 네온사인은 당시 가난한 유학생인 필자에게 ‘애국심’을 자극하는 향수(鄕愁)였을 뿐이었다. 지금 그 곳을 다시 방문한다면 아마 삼성의 로고는 필자에게 글로벌 시대의 ‘자긍심’으로 다가 올 것 같다.

by 우마미 | 2006/12/05 14:55 | 옛글들(2003) | 트랙백 | 덧글(0)
11월 162007 0 Responses

커피를 갈아 금으로 만드는 기업- 스타벅스 수정 | 삭제

커피를 갈아 금으로 만드는 기업- 스타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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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성업하고 있는 세계적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Starbucks). 1987년 하워드 슐츠가 인수한 스타벅스는 당시 전국에 11개 점포와 종업원 100명을 두고 있었다. 16년이 지난 지금 스타벅스는 전세계 30개국 6300개 점포를 자랑한다. 종업원만 7만명이다. 700배 성장한 셈이다. 하워드 슐츠의 커피를 통한 혁신은 어떤 것이었을까? 여러분들도 스타벅스에 들어설 때 마다 커피 향에 섞여 있는 혁신의 향을 음미하길 바란다.

 

스타벅스의 성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의 커피 문화를 알아야 한다. 맥스웰 스타일로 통하는 미국의 커피는 한마디로 싸고 부담 없는 음료다. 필자가 유학생활을 하던 90년대 뉴욕 한 동네의 조그마한 도넛가게에서 매일 사먹던 커피의 가격은 75센트. 우리나라돈 1000원가량의 단순한 먹거리였다. 미국인들은 그냥 허름한 가게에서 커피를 아무 생각 없이 사먹는 것이다.

 

뉴욕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란 하워드 슐츠는 가난했지만 미식축구를 잘해 겨우 대학에 들어간다. 그러나 대학 시절 중반에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고학과 학자금 융자로 학교를 졸업한 뒤 제록스사 세일즈맨을 거쳐 스웨덴계 가정용품 회사에서 주방기기 판매로 능력을 인정 받아 부사장으로 승진한다.

 

미국내 영업을 총괄 관리하던 중 시애틀의 한 소매상에서 커피 끓이는 용구를 다량 구입하는 데 눈길이 끌렸다. 어떤 회사인지 궁금해 알아본 것이 바로 스타벅스였다. 1971년에 시애틀에서 조그만 커피점으로 시작된 이 스타벅스를 하워드 슐츠는 1981년 처음 찾아 갔다. 고급원두커피에 매료된 그는 좋은 직장을 때려 치우고 이 스타벅스에서 마케팅 담당으로 이직한다.

 

1983년 우연히 슐츠는 이탈리아의 고급 에스프레소 바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기존의 스타벅스를 고급 스타일의 원두커피 바로 변화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당연히 기존 경영진들이 그러한 변화를 좋아 할리가 없었다. “무사안일에 빠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면 내 인생은 끝”이라는 생각으로 스타벅스를 관둔 슐츠는 자기가 꿈꾸던 이태리 스타일 커피전문점 “일 지오르날레”를 연다.

 

일 지오르날레에서 슐츠는 정통 이탈리안 커피숍의 느낌을 재현하고자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매장에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틀어 놓았고, 종업원은 나비넥타이를 매도록 하였다. 서서 즐길 수 있는 바(Bar)만 준비되어 있을 뿐, 의자는 없었다. 슐츠는 커피의 향을 해칠 수 있는 무지방 커피를 제공하지 않았다. 메뉴 또한 모두 이탈리아 말로 쓰여져 있었다. 실내장식도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이탈리아식으로 꾸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이와 같은 이탈리안 커피숍의 분위기가 시애틀에서는 잘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고객들은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오페라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고, 종업원마저 나비넥타이를 불편해했다. 게다가 사람들은 앉아서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의자를 요구했다. 그래서 슐츠는 고객의 니즈에 맞도록 차츰 매장을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음악을 바꾸고, 의자를 갖다 놓았다. 심지어는 무지방 커피까지도 그들의 메뉴에 등장하였다. 유럽식 스타일에 고객만족이라는 미국식 경영방식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이탈리안 스타일의 미국식 커피숍이 생겨 나게 되었다.

 

1987년 슐츠는 스타벅스의 경영진들로부터 스타벅스를 인수하지 않겠냐는 전화를 받게 된다. 슐츠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타벅스의 시애틀 점포들과 원두처리공장, 그리고 상호를 400만 달러에 사들였다. 곧 그는 자신의 집념이 담긴 ‘일 지오르날레’ 상호를 스타벅스로 개명하여 제2의 창업을 하게 된다.

 

슐츠는 이 스타벅스를 통해서 미국인들에게 유럽 스타일의 고급문화를 전하게 되었다. 대중문화에 익숙해 있던 미국 소비자들에게 스타벅스는 세련된 만남의 장소, 고급스러움, 안락함, 대화, 독창적인 커피 음료 등을 제공하는 새로운 커피 문화 그 자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를 슐츠는 ‘스타벅스 경험(Starbuck Experience)’라고 부른다. 그는 “스타벅스는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판다”고 말한다.물론 스타벅스는 최고 품질의 커피를 만든다. 인공 향을 넣지 않고 프랜차이즈로 운영하지도 않는다. 커피가 쉽게 상하지 않는 최신 포장 기술을 개발해 자신의 고급 원두 커피를 해외로 수출한다.

 

그러나 스타벅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 존중의 철학이다. 어떤 기업경영 가치보다도 `인간`은 그 위에 있다. 처음 슐츠는 종업원들과 회사 발전전략을 논의할 때 `위대한 회사(great company)`를 만들자고 약속했다. 인간 정신을 존중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게 슐츠와 종업원들이 공유하는 위대한 회사의 의미다. 스타벅스가 어떤 미국 기업들보다 이직률이 낮고 존경 받는 기업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혁신적이고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 종업원들에게 스며 들어 있는 스타벅스의 정신이다. 스타벅스는 예스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연공서열도 없다. 휴대용 종이컵이나 스타벅스만의 음악 CD 같은 튀는 아이디어는 언제나 환영이다. 그런 종업원들에게 스타벅스는 `브라보` 상을 준다.

 

하워드 슐츠가 75센트짜리 미국식 커피를 3달러짜리 유럽식 커피로 재창조하는 첫번째 혁신에 성공했다면 스타벅스의 직원들은 인간존중, 자선, 사회적 신뢰, 자긍심과 같은 두번째 혁신에 성공했다. 연간 스타벅스에서 팔리는 커피 약 4000억잔과 한달 평균 18번씩 스타벅스를 찾는 전세계의 고객들은 이러한 혁신의 브랜드에 대한 사회적 존경을 상징한다. 항상 위대한 회사는 존경스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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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마미 | 2006/12/05 14:53 | 옛글들(2003) | 트랙백 | 덧글(0)
11월 162007 0 Responses

Vision in PR agency 수정 | 삭제

Vision in PR agency

오늘자 모 경제지에서 FH Korea의 General Manager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게되었습니다. 12-15년쯤의 PR경력에 Agency 경험이 많다면 좋겠다는 자격요건이 보이는군요. 곰곰히 그 광고를 보면서 우리 agent들의 비전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회사만해도 주변을 둘러 보면 “이다음에 대행사 사장을 한번 해 보아야지..”하는 AE는 거의 없다는 걸 느낍니다. 물론 마음속 깊이에서 자리를 ‘노리는(?)’ AE가 있을찌는 모르지만 암튼 밖으로 내어 놓고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 하는 AE는 없습니다. ^^

우리 선배 AE들이 가졌던 agency에서의 비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우리 후배 AE들이 가지고 있는 Agency에서의 비전이란 무엇일까?
참으로 궁금합니다.

예전 기업협회모임에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백발이 되어서도 클라이언트 앞에서 멋지게 PT를 하는 것이 꿈이자 비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약간 유치하긴 하지만….그렇습니다. 감히 해외의 선배님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에드워드 버네이즈, 현재의 해롤드 버슨, 다니엘 에델만 등등) 처럼 타이틀 그대로 Senior Consultant를 꿈꿉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선배 AE들께서는 “이자식 아직도 꿈꾸고 있구나…”하실 수도 있겠지요. 맞습니다.

사실 저도 최근 들어서는 “백발 PT가 과연 나에게 가능할까?”에 대해 자꾸 의구심이 들때가 많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상대적으로 박봉인 이 업계에서 커가는 자식을 바라보면서 내 좋은 일만 할 수 있을까? 40이 넘으면 agency업계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 지 뻔히 알면서 견뎌 낼 수 있을까? agency를 심부름 센터 수준으로 여기는 클라이언트들을 몇개나 더 겪어야 한해가 갈까? 빛의 속도로 변해가는 시장경쟁 속에서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는 agency속 변화에서 언제까지 유유자적(?) 할 것인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다 뱉어내고 이젠 말라버린 지적 자산을 언제까지 불모지로 방치할 것인가?….

선배님들은 이미 이들 중 하나 또는 두개 이상의 회의와 현실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라는 이야기는 여기저기 agency를 떠나시는 선배 또는 후배님들의 “출사표”가 되었지요.

업계에는 “그래도 agency가 좋다”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인하우스에 가 계셔도 agency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시며 좋은 조언을 해주시는 분들도 물론 많으십니다. 그러고 보면 그분들도 사실은 “정말로 절이 싫어 떠난 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적인 생각을 하다가 보면 문득 “만약에….” 라는 가정을 연이어 해보게 됩니다. 만약에 내가 내 나름대로의 애정을 가지고 이 agency업계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백발이 되었다고 치자.

나와 내 팀이 정성을 다해 만든 프리젠테이션자료를 가지고 밤을 세워 PT연습을 한 후 인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인하우스에 내 옛날 동료가 우연히 담당 책임자 (CCO)로 있다고 치자.

그 사람 왈 “아니 자네, 아직도 agency에 있나. 어지간히 능력도 없는 사람일쎄. 그래 요즘 살기는 어떻구? 그 나이가 되서도 직접 PT하러 다녀? 쯧쯧”한다면……..심난하겠지요.

이렇게 사회적 인식까지 안도와 준다면 agency에서 큰 비전을 찾기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울까요…

우리 업계도 태어난지 이제는 20년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업계를 거쳐간 수많은 선배 AE분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아주 초기 AE분들로 부터 최근 agency를 떠나신 AE분들께서는 우리 업계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말그대로 그저 한순간 업계에 ‘몸을 담근 것’으로 젊은 그 시기를 기억하시나요 아니면 ‘내 일생 가장 멋진 시기 중 하나’로 기억을 하시나요. 오늘 지금에는 자신이 일하셨던 업계에 대해 어떤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요…

지금은 인하우스의 홍보책임자로 가있는 선배 AE가 얼마전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음…예전에는 agency premium이라는 게 사실 존재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 premium은 없어졌어. 지금 AE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불행한 이야기지..”라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에 크게 반론을 제기할수가 없었습니다. 돌아오면서 “그게 왜 일까….누구의 잘못일까?” 생각했습니다.

요즘 책 중에 “바보들은 항상 남의 탓만 한다”인가 라는 제목이 있더군요. 제 스스로가 “그 바보”인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드는 생각 우리 agency AE들이 혹시 “굿모닝 시티 피해자들”과 같은 처지는 아닌지….

agency에서 눈부시지는 않아도 clear한 비전을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AE여러분들 화이팅!


11월 162007 0 Responses

“좋은 제품을 싼 값에 팔기 위한” 혁신 – 델 컴퓨터 수정 | 삭제

“좋은 제품을 싼 값에 팔기 위한” 혁신 – 델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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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소프트웨어 업계의 황제”라면 델컴퓨터의 마이클 델은 ‘하드웨어 업계의 황제’다. PC가 좋아 중고 PC를 고쳐 시장에 내다 팔던 대학생이 20년이 지난 지금 매출 354억 달러 (한화 약 42조원), 순익 21억 달러 (한화 약 2조 5천억원)의 거대 기업의 주인이 되었다. “좋은 제품을 싼 값에 판다”는 간단한 원리로 성공했다. 이 원리 속에 숨겨진 혁신의 모습들을 찾아보자.

 

1965년 생 마이클 델. 혁신의 신화는 마이클 델의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한다. 델은 학생 시절 자신의 컴퓨터 “애플II”의 속안을 들여다 보는 게 취미였다. 치과의사 아버지와 금융회사의 브로커 어머니 밑에서 유복하게 자란 델은 텍사스 대학에 입학할 때도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의대에 들어갔다.

 

학과 공부엔 영 관심이 없던 델은 주로 컴퓨터를 뜯고 고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낡은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던 델은 문득 뇌리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중고 IBM PC를 사들여 업그레이드한 후 인근 사업체를 직접 방문해 되파는 것이다. 마침내 델은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이기 위해 2학년 진급을 포기했다. 단돈 1천 달러로 사업을 시작한지 불과 한 달 만에 그는 자그마치 18만 달러어치 PC를 팔아치웠다.

 

첫번째 혁신– 좋은 제품을 싸게 판다!

 

델은 경쟁사 제품들 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뛰어난 성능의 PC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었다. 델은 곧 낡은 기계들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대신, 컴퓨터 전체에 들어가는 부품을 싸게 사서 이를 직접 조립해 기존 경쟁사 제품들보다 싼 가격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좋은 제품을 싸게 판다는 마이클 델의 철학은 소비자를 위한 것으로 곧 델컴퓨터의 기업철학이 되었다.

 

두 번째 혁신 -직접 주문 받아 팔고 고쳐준다!

 

최초 직접방문 판매에서 우편주문판매로 사업을 확대한 델은 94년 인터넷 웹사이트 www.dell.com를 만들었고, 이어 96년에는 여기에 전자상거래 기능을 부가했다. 미국 전자상거래의 시작은 이때 부터였다. 현재 이 웹사이트를 통해 온라인으로 판매되는 컴퓨터는 하루 4천만 달러어치에 이른다. 매출의 40%. 기술지원의 40%, 주문 문의의 70%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진다.

 

우수한 부품들을 값싸게 구입해 월등한 성능의 PC를 만들고 거기에다 불필요한 유통 비용을 없앤 결과 델의 컴퓨터는 최근 경쟁사 제품들보다 약 40%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다.

 

세 번째 혁신 – 고객이 원하는 PC를 만들어 빨리 판다!

 

고객이 델의 웹사이트에서 원하는 성능의 부품을 골라 PC를 주문하면 생산라인에서는 몇 시간 안에 주문된 컴퓨터의 조립이 시작된다. 이세상 하나 뿐인 나만의 PC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것도 생산 4시간을 포함 해 주문에서 선적까지가 36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고객이 주문을 한 순간 델-부품회사-배달회사가 순식간에 네트워크로 연결돼 마치 하나의 회사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직접판매와 부품 업체들과의 협력만으로 컴퓨터업계의 거인들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처음에는 무모하게 보였다. 그러나 직접판매로 중간상인이 챙겼던 돈이 소비자와 델에게로 돌아가고, 완제품과 부품의 재고량을 대폭 줄여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되면서 델은 ‘가격 대비 성능이 가장 우수한 컴퓨터를 판매하는 회사’라는 평을 얻었다.

 

네 번째 혁신 – 고객만족을 통해 주주들을 만족시킨다!

 

이러한 성공 속에서도 마이클 델은 고객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한시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는 고객의 의견을 듣는 정기적 회의에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한다. 고객과 직접 관계를 맺으면서 얻은 정보가 회사의 성공적인 전략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는 마이클 델은 지금도 자기 시간의 40%를 고객과 만나는 데 쓰고 있다.

 

최근 델 컴퓨터 주총에서 마이클 델은 앞에 나와 델의 주식 성과와 코카콜라, 컴팩, 인텔,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식 성과를 비교한 한 장의 슬라이드를 주주들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델 주식의 그래프가 다른 기업들보다 두 배나 높이 치솟아 있었다. 델이 엄청난 수익으로 이 기업들을 능가했다는 의미다. 델은 주주들을 바라보며 “자, 이것으로 우리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수갈채가 계속 이어졌다.

 

다섯번째 혁신 – 소비자들을 위한 연구개발만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델컴퓨터가 경쟁사에 비해 연구개발 투자비율이 낮다는 지적을 한다. 이에 대해 델은 “매년 열리는 컴덱스 (세계 최대의 컴퓨터 인터넷 관련 박람회)에 가봐라. 이미 쏟아져 나오는 기술들도 상품화 하지 못하는 게 태반이다” 따라서 “기술을 위한 기술은 필요 없다. 델은 오직 소비자들을 위한 개발만을 한다”고 당당히 대답한다. 

 

그래도 델은 매년 5억달러 (한화 약 6000억원)가량을 R&D에 투자하고 있다. 연구인력도 3000명에 이른다. 경쟁업체보다 투자금액이 적다고 해서 연구개발을 소홀히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델의 연구개발은 ‘제품의 질은 높이고 가격과 비용을 줄이는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다.

 

올해로 38살이 된 마이클 델이 이끄는 델컴퓨터는 전세계적인 PC 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99년 이후 만 4년 만인 올해 매출이 2배로 늘어나게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PC를 좋아함에 만 그치지 않고 마이클 델은 자신과 같은 소비자를 위해 혁신적 사고를 거듭했고 그 결과로 바로 오늘날의 성공이 있게 되었다. 기업에게 있어서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한다’는 자세와 이를 위한 끊임없는 혁신적 사고가 얼마나 제대로 보답을 받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델컴퓨터의 사례다. 이게 혁신의 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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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마미 | 2006/12/05 14:49 | 옛글들(2003) | 트랙백 | 덧글(0)
11월 162007 0 Responses

Best or Different -이탈리아 베네통(Benetton) 수정 | 삭제

Best or Different -이탈리아 베네통(Bene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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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되라 아니면 차별화 (Best or Different)하라!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1955년 이탈리아 시골의 한 스웨터 가게로 시작된 ‘베네통’은 그리 변한 것은 없다. 약간(?)의 변화라면 세계 각국에 8000여 개의 가게들을 통해 옷을 팔게 되었다는 것과 한 시즌에 5000개의 디자인에 280만 종의 옷들을 시장에 내 놓고 있다는 점 뿐이다. 옷보다 이슈를 먼저 파는 베네통의 “최고가 되라 아니면 차별화하라(Best or Different)”전략을 살펴보자.

 

거대 글로벌 패션기업 베네통의 출발은 다른 기업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하다. 1955년 이탈리아 폰자노 지방의 한 가난한 집. 부친이 돌아가셔 생계가 어려워진 당시 스무 살 장남 루치아노 베네통은 막내의 자전거와 자신의 아코디언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옷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1res Jolie라는 브랜드로 판매된 스웨터는 루치아노의 여동생 줄리아나의 멋진 뜨개질 솜씨와 화려하고 대담한 색상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대담한 색상과 독특한 디자인의 스웨터로 성공한 것을 계기로 1964년에는 이탈리아의 벨루노 지방에 첫 판매점과 1965년 첫 번째 생산공장을 열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프랑스로부터 시슬리 상표를 인수해 1975년 베네통은 이탈리아에만 200여 개의 판매점을 가진 큰 의류회사가 되었다.

 

일단 차별화하자!

 

1980년대 초 베네통의 문제는 의류업계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사실 고유의 이미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브랜드 고유의 이미지는 글로벌 마케팅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자산이다. 베네통은 최고가 되라 아니면 차별화하라(Best or Different)는 전략을 기반으로 당시 세계 최고들과 맞서 철저하게 스스로를 차별화하기로 결심한다.

 

1982년 베네통과 패션 사진 작가 올리베이로 토스카니는 베네통의 ‘차별화 전략”을 기반으로 한 베네통만의 독특한 광고를 만들어냈다. 그 유명한 광고 ‘United Colors of Benetton’의 탄생이었다.

 

광고를 통한 베네통의 메시지는 “인종과 문화를 넘어선 인류의 화합”이었다. 하지만 이 광고들은 종종 언론에 보도될 만큼 금기의 영역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평가는 물론 여러 나라에서 논쟁을 야기시켰다.

 

신부와 수녀의 키스, 탯줄을 자르지 않은 갓 태어난 아기, 지면 가득히 정렬된 콘돔, 전쟁 참전 용사의 묘지, 가족에 둘러싸여 에이즈(AIDS)로 죽어가는 환자의 모습, 발가벗은 임산부 등이 주요 주제였다. 베네통은 표나는 상품광고보다는 단순히 광고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베네통만의 다큐식 광고를 개발했다.

 

전쟁, 출생, 죽음, 폭력이 의류회사 베네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물론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왜 베네통은 엄청난 비난을 받으면서 이런 주제들을 자신들의 메시지로 활용하는 것일까?

 

사진작가 토스카니는 “베네통은 가장 적은 예산으로 브랜드를 알리는 회사다.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베네통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스웨터를 생산해냅니다’라는 식의 광고는 이미지로서 충분하지가 않다”고 설명한다. 베네통의 광고는 철저히 ‘차별화’를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제는 그만, 최고가 되었다!

 

차별화 된 광고 덕으로 베네통은 세계 120여 개국 8000개 점포에서 연 간 2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거대 패션 그룹이 되었다.

 

최근 루치아노 베네통은 60대 후반인 자신이 직접 나체로 나서 “난 여전히 양모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광고를 끝으로 지금까지의 ‘차별화’ 전략을 마감하는 듯 하다. 지난 4월 영입 된 베네통의 신임 CEO 실바노 카사노에 의하면 베네통은 앞으로 튀는 광고를 자제할 예정이란다. 그는 이제 튀는 광고로 시장에서 반감을 조성할 필요가 없다며 전세계 사람들이 편안하게 공유할 수 있는 광고로 다가서겠다고 한다.

 

이제 베네통에게는 차별화(Different)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이야기다. 이는 곧 최고(Best)가 되었다는 의미다. 글로벌 시장에서 아직도 ‘튀는’ 광고와 마케팅으로 최고를 향해 달리고 있는 후발 주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부러운 모습이다. 최고로서 그들의 여유로움과 관대함이 말이다.

 

by 우마미 | 2006/12/05 14:48 | 옛글들(2003)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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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성을 지키며 변화에 성공한 월마트(Wal Mart) 수정 | 삭제

일관성을 지키며 변화에 성공한 월마트(Wal M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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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포츈 500 기업들 중 1위,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들 중 2위, 2002년 한해 2천450억 달러(한화 약 294조)의 매출, 종업원수 140만명. 이 것이 세계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에 대한 소개다. 매출액은 우리나라 1년 예산인 112조5천억원의 2배를 훨씬 넘고 매주 월마트에 들러 쇼핑하는 인구가 전세계 4~5천만명에 이른다니 우리나라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이들은 어떻게 성공했으며 왜 성공할 수 밖에 없었을까?

 

1962년 우리에게는 클린턴 대통령의 고향으로 알려진 미국 아칸소에 샘 월튼이라는 한 40대 잡화상이 할인점을 하나 열었다. 그 이름은 월마트(Wal Mart). 당시에는 이미  K마트, 울코, 타깃 같은 대형 할인점들이 대도시에서 성업 중이었다. 이후 30년이 채 안되어 월마트는 이들 선두 주자들을 밀어내고 세계최대의 유통업체로 뛰어 오른다.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핵심철학은 지킨다

 

월마트 1호점에 최초 내걸린 문구는 “우리는 항상 싸게 팝니다(We sell for less, always)”와 “고객의 만족을 보장합니다”였다. 이들 철학은 언제나 가장 낮은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물품을 공급한다는 창업자 샘 월튼의 신념이었다.

 

이후 월마트는 ‘5년 이내에 아칸소주에서 수익성이 가장 높은 회사가 된다(1965)’ ‘4년 이내에 10억 달러짜리 회사가 된다(1977)’ ‘2000년까지 점포 수를 2배로 늘리고 제곱 피트당 매출액을 60% 증대 시킨다(1990)’ 등과 같은 구체적 비전을 제시해 구성원들의 열정을 이끌어냈다.

 

1992년 샘 월튼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후계를 이은 데이비드 글라스는 모든 부문에서 ‘철저한 원가절감을 통한 최저가 상품 공급’이라는 샘 월튼의 경영철학을 ‘그대로’ 계승해 발전시켰다. 이렇듯 우리는 월마트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그들만의 핵심 철학만은 ‘일관되게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객을 향한 철학 – 고객은 항상 옳다!

 

월마트가 가진 독특한 또 하나의 철학은 ‘고객은 항상 옳다(Customer is always right)’는 믿음이다. 샘 월튼은 “항상 고객들에게 신뢰를 주어야 하며, 고객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고객은 우리에게 와 물건을 살 것이다”라며 직원들에게 고객제일주의를 강조했다.

 

월마트에는 크리에이터로 불리는 독특한 안내 직원들이 있다. 이들은 해당 지역 출신의 아줌마 아저씨들로 구성되어 있고 월마트에 들어오는 고객들에게 미소로 반기며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크리에이터의 존재는 고객들에게 기분 좋은 쇼핑과 점포에 대한 친근감을 제공한다.

 

또 월마트는 직원들의 웃옷에 모두 ‘만약 미소 짓지 않으면 1달러를 가져가세요’란 문구가 적인 명찰을 달게 한다. 고객을 만나 미소 짓지 않는 직원에게 고객은 언제든지 1달러를 요구할 수 있다. 이 1달러를 일명 ‘스마일 1달러’라고 부른다. 스마일 1달러는 매장 판촉 직원에서 매니저 까지 예외가 없다.

 

이밖에도 월마트는 고객이 10발짝 이내에 있다면 고객의 눈을 응시하고 반기며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말을 걸도록 교육 시키는 ‘10 발자국 룰’, 회사에 들어온 요청은 국내외에서 들어온 것을 막론하고 요청 당일 해가 지기 전까지 해결한다는 ‘Sundown Rule’등을 실천하고 있다. 이렇듯 월마트에서는 고객제일주의라는 기본원칙을 지키기 위해 조직의 모든 시스템과 제도들이 유기적으로 연계 운영되고 있다.

 

행복하게 일하는 회사 월마트

 

구성원에게 최고의 대우를 하되 최고의 성과를 요구 한다는 게 월마트 샘 월튼의 이념이었다. 최고의 자부심을 가진 종업원이 최고의 고객만족과 효율적 매장운영을 이루어 내는 법이다. 따라서 월마트는 직원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작업환경 개선에 힘쓰고, 의료비 지원은 물론 목표 이상의 실적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공정하게 이윤을 분배함으로써 매년 가장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최고 경영자가 직접 커피를 타 마시고, 최고 경영자와 경영진은 4평 남짓한 작고 검소한 사무실을 사용하며, 잦은 현장방문을 통해 구성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킨다. 또한 전 직원이 서로를 ‘고객에게 봉사한다’는 공통 목적을 갖는다는 뜻에서 ‘동료(associate)’라 부른다. 회장을 비롯한 모든 종업원이 월마트 심벌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일하는 평등주의도 재미있다.

 

자발적 서비스 정신 고취를 위해 회사측에서는 직원들의 사기진작에도 힘쓴다. 특히 하루 업무 개시 직전에 매장의 전직원이 함께 모여 월마트 구호(Wal Mart Cheers)를 외치는데 이를 통해 직원들은 월마트에 대한 소속감과 주인 의식 및 자부심을 느끼고 이를 고객 서비스 향상으로 이어나간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월마트 구호는 샘 월튼이 70년대 한국 방문 당시 우리나라 중소제조업체 직원들이 작업전 회사 구호를 외치는 장면을 보고 미국에 건너가 자사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메이드 인 코리아’ 방식이다.

 

현재 월마트는 미국내에서만 3,000여개가 넘는 촘촘한 점포망을 구비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멕시코 587개, 영국 256개 등 한국을 포함한 9개 국가에 1,227개 점포를 운영중이다. 샘 월튼은 생전 늘 “한때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항상 변화의 최전선에 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일관된 철학을 기반으로 한 끊임없는 변화 노력은 언제나 보답을 받게 마련이다. 성공적 혁신은 일관성과 변화의 오묘한 칵테일로 비유될 수 있겠다.

by 우마미 | 2006/12/05 14:38 | 옛글들(2003)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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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Nike): 홈런을 위해 ‘저스트 두 잇 (Just Do It)’! 수정 | 삭제

나이키(Nike): 홈런을 위해 ‘저스트 두 잇 (Just D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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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창립 29주년의 나이키는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1위의 스포츠용품 업체다. 브랜드 가치만 해도 세계 10위권에 드는 초일류기업 중 하나다. 과감한 디자인과 혁신적 기능을 무기로 소비자들을 사로 잡아온 이 회사의 매출액은 100억 달러 (한화 12조원). 나이키의 창립자 필 나이트(Phil Knight)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잔말 말고 그냥 해보라니까 (Just Do It)!”

 

필 나이트는 항상 “남을 앞서기 위해서는 모범적 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세상이 수용하는 기존의 형식을 따르면 한 번도 세상을 앞설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과 문명의 틀을 넘어서라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하고 힘든 주문이다.

 

필 나이트는 대학 시절 중거리 달리기 선수였다. 그러나 성적은 중간에 지나지 않았다. 졸업 후 그는 프로 선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선수 시절 신발에 대한 관심이 그를 신발업계에 뛰어들게 했다.

 

1964년 500달러(한화 60만원)의 자본금으로 ‘블루 리본 스포츠 (Blue Ribbon Sports)’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신발 회사를 설립했다. 포트랜드 외곽에 차린 이 회사는 벽만 있는 허름한 매장이었다. 최초의 상표명은 ‘타이거’였다. 주말마다 그는 초록색 소형 트럭을 손수 몰고 전국의 신발업자를 찾아 다니며 신발을 팔았다.

 

당시 아디다스 판매 사원들의 비웃음을 받으며 그는 첫 해에 겨우 1,300켤레를 팔았다. 년간 판매 8천 달러에 이익은 250달러(한화 30만원)였다. 그러나 15년 후 1980년 나이키는 아디다스를 제치고 미국 내 판매 1위를 차지했다. 30년이 채 못된 1993년에는 1억 켤레 판매를 돌파했다.

 

1971년 필 나이트는 포틀랜드에서 광고를 전공하던 대학생 캐롤린에게 신발 옆 부분에 들어갈 로고 디자인을 부탁했다. 그녀는 그에게 스워시 (Swoosh, 현재의 나이키 로고, ‘휙’이라는 뜻)를 만들어 주고 35달러를 받았다. ‘V’자를 부드럽게 뉘어놓은 듯한 나이키의 로고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날개를 상징한다.

 

남과는 뭔가 다른 것을 찾아야 성공한다

 

미국의 1970년대는 신발의 혁명 시기였다. 나이키는 이 호기를 “뭔가 다른 방식”을 통해 장악 했다. 필은 신발 광고를 했다. 그는 당시 테니스 선수 죤 맥켄로를 스폰서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그는 심판에게 욕설을 퍼부어 늘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나이키는 80년대 당시 최고의 농구선수 매직 죤슨과 래리  버드 대신 노쓰 캐롤라이나 대학의 신인 마이클 조던과 계약했다.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만을 위한 신발을 디자인했고 그것을 ‘에어 조던(Air Jordan)’이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NBA에서 검정색 농구화가 허용되지 않았지만 ‘에어 죠던’은 검은 색과 빨강이었다. 마이클은 한 게임당 1000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그러나 벌금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신었다. 필 나이트는 소비자들의 관심과 논쟁이 벌금보다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연히 수많은 소비자들이 나이키 매장에서 에어 조던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80년대 말 나이키의 매출은 연간 8억 7천만 달러에서 40억 달러로 5배나 급격히 뛰어 올랐다. 필 나이트는 나이키 운동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파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이키 운동화를 와서 사도록 만든 것이다. 뉴욕의 전문직 여성들이 출근길에 양장에 나이키 조깅화 차림으로 달리다가 사무실에 도착해 하이힐로 바꾸어 신는 문화를 정착시킨 것도 나이키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마이클 존슨이 신었던 ‘황금신발’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메리언 존슨이 입었던‘Swift Suit (속도복)’는 나이키의 스포츠 과학의 승리였다. 나이키는 단순한 스타 마케팅을 넘어 스포츠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비전까지 제시해준다. 최근에는 골프 천재이자 최초의 흑인 골퍼인 타이거 우즈를 통해 나이키는 계속 ‘뭔가 다른 방식’으로 운동화에 인격을 불어넣고 있다.

 

나이키의 상대는 소니, 닌텐도 그리고 애플?

 

이제 나이키는 경쟁상대로 아디다스, 리복 같은 동종업체를 꼽지 않는다. 소니, 닌텐도, 애플 등이 자신들의 경쟁상대라고 한다. 나이키 소비자들이 그들의 제품도 사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이들의 혁신을 지켜보고 나이키를 지켜본다. 만일 소니가 더 많은 기능에 더 작은 전자제품을 선보이면 나이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키는 고품질의 신발도 중요하지만, 자사의 제1경쟁력을 ‘혁신적 디자인의 제품을 시장에 가장 먼저 내놓는 것’으로 삼고 있다. 나이키는 거대한 혁신 즉 홈런 한방을 연이어 노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구/개발 쪽으로 엄청난 돈을 투자한다.

 

나이키는 현재 신발과 의류용품 분야 등에서 동종 업계 최다수의 디자이너를 확보하고 있고 최대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창업 30여 년 만에 나이키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필 나이트 회장을 비롯한 나이키 전 구성원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창의성을 존중하는 기업문화를 가꾸어온 때문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새로 찾아 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은 더 어렵다. 혁신은 남이 하지 않았고 하기도 싫어하는 일을 과감히 해내는 것이다. 혁신은 그래서 어렵다고 한다. 혁신은 나이키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창의성’을 먹고 자란다. 창의성 개발을 위해 오늘 자신의 책상 앞에 나이키가 우리에게 준 교훈을 써 붙여보자. 저스트 두 잇 (Just Do It)!. “잔말 말고 한번 해보라니까!” 성공할 꺼라 믿기만 하면 된다. 어려워 보이지만 간단하다.

by 우마미 | 2006/12/05 14:36 | 옛글들(2003) | 트랙백 | 덧글(0)
11월 162007 4 Responses

롤리타 렘피카: 프랑스 시장을 무너뜨린 한국의 트로이 목마 수정 | 삭제

롤리타 렘피카: 프랑스 시장을 무너뜨린 한국의 트로이 목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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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마케팅의 세계를 가다

 

3회: 한국 태평양 롤리타 렘피카 향수

프랑스 시장을 무너뜨린 한국의 트로이 목마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세계 27위, 53살 짜리 한국의 화장품 회사가 화장품의 나라 프랑스에서 큰 사건을 냈다. 프랑스인이 이끄는 프랑스식 회사를 만들어 프랑스식 향수를 팔아 프랑스 시장을 삼켜버린 것이다. 그 누구도 유명향수 ‘롤리타 렘피카’를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프랑스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보낸 ‘트로이의 목마’로 보지 않았던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1945년 설립된 화장품 회사 태평양은 1990년 프랑스에 PBS라는 현지법인을 세워 ‘리리코스’라는 기초화장품을 생산했었지만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프랑스에서는 기초화장품보다 향수나 색조화장품이 인기라는 점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은 이 실패의 교훈을 통해 한국 화장품 시장의2-3% 정도인 향수시장이 프랑스에서는 32%나 된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고 이 시장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태평양은 야심찬 ‘현지화’ 전략을 세웠다. 프랑스 향수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자본만 제공할 뿐 기획, 디자인, 제조 및 판매를 모두 프랑스 현지인들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1995년 설립된 프랑스 현지회사 PCP(PACIFIC CREATION PARFUMS)에는 한국인 파견직원 2명을 제외한 150명이 모두 현지 채용인들로 채워졌다.

 

프랑스의, 프랑스에 의한, 프랑스를 위한 향수

 

특히 태평양은 당시 크리스찬 디오르 이사인 카트린 도팡을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로 영입했다. 그녀는 지난 74년 이브생로랑에 입사해 유니레버, 이브로세 등에서 근무한 화장품 업계의 전설적인 영업통이었다.

 

그녀는 소비자들에게 낯선 새로운 브랜드를 만드는 대신 유명 디자이너와 손잡고 그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브랜드로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을 택했다. 당시 ‘롤리타 렘피카’는 주목 받는 신예 디자이너로 그녀의 작품들은 동화를 연상시키는 순수함과 사로잡힐 듯한 관능미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마침내 1997년 4월 PCP는 유명 디자이너 롤리타 렘피카와 라이센싱 계약을 맺고 ‘Made in Paris’ 향수 ‘롤리타 렘피카’를 선보이게 된다. 향 (Firmenich) 과 용기 디자인 (Alain de Mourgues), 패키지(Autajon) 광고 (Saatchi & Saatchi)등도 모두 롤리타 렘피카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현지 전문가들의 작품이었다.

 

샤넬 No.5의 10년이 롤리타 렘피카에게는 2년?

 

명품들이 즐비해 새 브랜드가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는 고급 향수 시장 프랑스에서 여성적이고 환상적인 향과 용기 디자인을 내세운 롤리타 렘피카는 출시 8개월 만에 시장 점유율 1%로 프랑스 고급 향수시장10위권에 진입한다.

 

200여개 브랜드의 향수가 경쟁하는 프랑스에서 샤넬No. 5의 점유율이 3.6%인 점을 감안하면 롤리타 렘피카의 성공은 기적이었다. 이후 롤리타 렘피카는 샤넬 No.5가 10년을 투자해 얻은 결실을 단 2년 만에 달성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2002년에는 프랑스 시장 시장점유율 2.7%로 샤넬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세계 500개 고급 향수 브랜드 중 9위 브랜드 롤리타 렘피카

 

롤리타 렘피카는 지난 수년간 프랑스와 미국의 향수 재단들이 선정하는 최우수 여성 향수, 최우수 남성 향수 및 최우수 용기 디자인상을 휩쓸었다. 또한 유럽 주요국은 물론 미국. 중동. 중남미. 일본.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 약 80여 개국에서 세계적 향수 브랜드로 명품 대우를 받고 있다.

 

프랑스는 화장품에 관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확보하고 있어 세계적 화장품 회사들이 최고의 인프라를 바탕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프랑스에서의 성공은 곧 글로벌 경쟁에서의 성공을 의미하기에 태평양의 글로벌 브랜드 전략은 성공적으로 평가 받는다.

 

만약 태평양이 고집 세게 한국적 제품과 브랜드로 프랑스 시장에 계속 도전했다면 어땠을까? 성공적 결과를 위해서는 국적도 과도한 자존심도 실리를 위해 과감하게 포기하는 야심찬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생한 교훈을 태평양과 롤리타 렘피카는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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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마미 | 2006/12/05 14:36 | 옛글들(2003)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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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종이공장에서 세계 휴대전화 거인으로 – 노키아(Nokia) 수정 | 삭제

산골 종이공장에서 세계 휴대전화 거인으로 – 노키아(Nok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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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휴대전화 시장 1위, 전세계 휴대전화 시장 35% 점유 기업, 유럽 증시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기업, 92년부터 7년간 주가가 291배 뛴 기업, 이 기업이 바로 핀란드의 노키아다. 산림국 핀란드를 일으킨 IT (정보통신) 기업 노키아의 생생한 성공담을 구경하자.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산타 클로스의 고향이라는 북유럽 핀란드는 전 국토의 70%가 삼림이다. 일년 중 반이 겨울인 이 나라가 가진 자원은 아이러니 하게도 울창한 나무들뿐이다. 노키아는 이런 조국의 IT산업을 이끌어 담박에 핀란드를 세계 정보통신 산업의 메카로 만들어 놓았다.

 

올해로 138살을 맞는 회사 노키아가 처음부터 통신 관련 사업을 했던 것은 아니다. 91년 경제 불황 전까지 노키아는 고무, 케이블, 텔레비전, 컴퓨터, 알루미늄, 펄프 및 종이, 발전, 부동산, 통신을 취급하는 9개 계열사를 거느린 잡동사니 회사였다. 당시 노키아도 그룹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었다.

 

80년대 말 노키아는 독일에서 컴퓨터, 컬러 TV로 막대한 손실을 보았고, 당시 사장이 자살할 정도로 어려웠다. 더욱이 소련의 붕괴는 안정적 수출 상품이었던 노키아의 경공업 제품을 창고에 쌓이게 하였고 국내 경기 침체로 90년대 초 적자액은 무려 2억 달러(한화 2500억)에 달했다.

 

경쟁력 없는 사업은 버려라!

 

이런 위기에서 노키아를 구출해낸 것은 요르마 오릴라(Jorma Ollila) 회장을 비롯한 노키아 이사회의 최고경영자들이었다. 92년 오릴라는 취임과 동시에 업계에서 1위를 할 가능성이 없는 사업들을 과감히 정리했다. 그는 “장차 죽느냐 사느냐의 승부를 걸 수 있는 분야는 전자통신분야뿐”이라며 휴대전화 하나에만 전념키 위해 8개 계열사를 몽땅 처분했다. 다소 모험적이었지만 당시 경영진은 무선통신시대가 다가올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것이다.

 

사실 노키아는 81년부터 휴대전화를 만들기 시작했었다. 핀란드는 산악지대가 많고 인구가 분산되어 있는 휴대전화 시장으로는 최적지였지만 당시 잘 나가던 경공업과 가전제품 사업에 매달린 노키아에게는 부수적 사업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키아는 GSM(유럽 등지에서 통하는 비동기 방식) 휴대전화가 처음 출시되기 9년전인 82년부터 GSM 표준 기술 개발에 착수해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휴대전화를 노키아의 핵심사업으로 결정하게 된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핵심역량은 지킨다!

 

현재도 노키아의 전체 직원 6만명 중 3분의 1이 연구 개발(R&D)에 종사하고 있다. 제품 주기가 짧은 통신산업에서 성공하려면 ‘신속한 제품개발’과 ‘대량생산을 통한 원가 경쟁력 확보’가 핵심이라 믿기 때문이다.

 

또한 지멘스 등 경쟁사가 부품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데 반해 노키아는 필요한 부품을 필요한 만큼 외부에서 사들인다. 노키아의 표어인 커넥팅 피플(connecting people)에는 자신이 가장 잘 하는 핵심 부문을 빼고는 모두 다른 기업에 맡긴다는 뜻이 들어 있다.

 

연구활동도 다른 곳이 더 잘 할 것 같으면 그곳에 맡기고, 심지어 경쟁업체와도 같이 연구 활동을 하면서 노키아는 경쟁력을 유지한다. 이러한 노키아의 경쟁력 때문에 2001년 세계 3대 휴대전화 회사인 스웨덴의 에릭슨은 “노키아 등 질 좋고 값싼 제품을 공급하는 경쟁사에 밀려 휴대전화 생산을 완전 중단한다”고 발표할 정도다.

 

기업 전략을 사내 모두가 공유한다!

 

통신업으로 급격히 사업을 전환하면서도 노키아 직원들은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노키아는 늘 비전과 전략을 종업원들한테 공유해왔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부터 매년 전세계 간부들이 일반 직원들과 함께 회사의 비전과 전략을 토론하는 “노키아 웨이(Nokia Way)”가 그 방식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노키아는 가벼운 조직과 신속한 의사결정을 덤으로 얻었다. 

 

매력적인 조직문화를 만든다!

 

노키아는 금전적 인센티브 외에도 직원들에게 젊은 나이에 경력을 쌓고 책임 있는 일을 담당하면서 일을 즐기고 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현재의 노키아 경영진은 90년대 초반 매우 젊은 나이에 중책을 맡았던 이들이다.

 

노키아는 직원을 해고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다른 회사들은 실수를 한 직원을 내보내지만, 노키아는 그 자리에서 실수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그 직원을 함부로 해고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노키아는 90년대 초 사업부서를 매각하는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직원들의 이해를 최대한 반영했다. 소비자가전 부문 등을 매각할 때에도 고용 안정이 계약서에 명시되도록 직원 입장에서 협상했다.

 

브랜드가 전부다! (Brand is everything)

 

이외에도 전문가들은 노키아의 마케팅과 브랜딩을 성공요인으로 꼽는다. 노키아는 휴대전화 업체 중 가장 먼저 고객 차별화 전략을 도입하여 각각의 고객에 맞는 제품으로 마케팅 활동을 전개했다. 노키아는 성능이 비슷한 제품이 넘쳐 나는 휴대전화 시장에서의 성패는 브랜드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노키아는 미국계 다국적 기업이 브랜드 마케팅 시장을 휩쓸고 있는 가운데, 2002년 인터브랜드의 글로벌 브랜드 자산가치 평가에서 유럽계 브랜드로는 유일하게 6위를 차지했다.

 

많은 기업들 중 노키아는 정말 ‘모범생’ 같은 성공신화를 자랑한다. 어느 한 구석 모난 데가 없이 정확하고 깔끔한 변화와 혁신 사례다. 최근 노키아는 10년 전 자신이 그랬듯이 무선통신분야에 다시 한번 새로운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노리다 한번에 낚아채 듯이 노키아는 오늘도 무선통신을 노린다. 혁신은 그만큼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강한 자는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다.

by 우마미 | 2006/12/05 14:34 | 옛글들(2003) | 트랙백 | 덧글(0)
11월 162007 0 Responses

컨설팅 회사 홍보담당자와의 대화 수정 | 삭제

컨설팅 회사 홍보담당자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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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세계적 컨설팅 회사의 홍보담당자와 장시간에 걸친 대화에서 거론된 이야기들을 한번 정리해 봅니다. 좋은 이야기들이 많은데 머릿 속에서 보관유효기한이 한 주가 채 안되서…<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컨설팅 회사 홍보담당자)

 

근래 들어 재미있는 컨설팅업계 이야기다. 우리회사만 해도 해외유수의 MBA들이 컨설턴트로 일선에 나가서 인하우스 사람들과 일을 한다. 문제는 인하우스의 담당 인력들이 기획조정실 인력들이라는 거다. 보통 대기업 기조실 인력들의 경우 우리 컨설턴트 보다 더 좋은 학교의 MBA거나 또 거기에다 실무경력이 상당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당연히 MBA끝내고 컨설턴트로 몇 년일 한 사람들보다 실력이 있는 거다. 프로페셔널 서비스라는게 인적자원을 파는 건데 이건 아주 역전 현상이다. 그래서 컨설턴트들의 말이 씨가 안 먹히거나 해서 많이 고생들을 한다.

 

PR업계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대세라고나 할까. 만약에 홍보 10년차가 되어가는 내 앞에 1-2년 차짜리 에이전시 AE가 앉아 있다고 하자. 솔직히 나는 그녀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손바닥 보듯이 환하게 알고 있다. 혹시 내가 하기 싫은 잡다한 일이라면 모를까 그녀에게 일을 선뜻 맏기지는 않을 것 같다. 컨설팅 업계도 마찬가지인 거다.

 

글로벌 기업인 이 회사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너무 좋았다. 모든 것이 국내 기업과는 차원이 달랐고 정말 한번쯤은 경험해 보아야 할 좋은 환경이다. 그러나 고민이 생긴 것은 조직내에서 PR담당자로서의 역할과 위상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politic한 줄서기류의 문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PR부서를 마케팅과 동일하게 생각한다. 경영 컨설턴트들이 이정도 인식이라면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컨설팅 회사의 특성상 마케팅, PR, 총무, 회계 등이 모두 admini그룹이다. 돈을 벌어오는 선수들이 아니라는 거다. 내가 에이전시에 있을 때 총무쪽 인사들을 약간 무시했던 것과 같이 바로 내가 그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슬프다.

 

조직내에서 나 혼자 PR을 하면서 무슨 위상이냐 겠지만, 현실이 참 힘들 때가 있다. 가끔씩 취재의뢰가 들어오면 왠만해서는 컨설턴트들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 쓸데없는 짓이라며 설정된 사진을 찍는 것도 거부한다. 모두가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컨설팅 회사의 좋은 점이라면…전반적으로 회사내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수준이 높다. 거의 가정환경도 훌륭하다. 인턴들을 여럿 쓰는데 모두 S대생들로 한정된다. 내게는 아직 어려보이는 그들을 가만히 보면 ‘참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인턴일을 하면서 받는 몇 십만원의 월급으로 ‘티파니 목걸이’ 하나를 달랑 사고 만다. 그들의 인적 네트워크 또한 ‘끼리끼리’ 문화로 혀를 내두룰 정도의 품질이다. 그들을 보면서 이제 한국도 자본주의가 안정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업무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여러 편의 컨설턴트 명의의 칼럼을 쓴다. 물론 내가 컨설턴트는 아니다. 하지만 왠만해서 컨설턴트들이 시간을 내어 신문 칼럼을 쓰지 않는다. 만약 의뢰가 들어오면 직접 내가 그 주제에 맞는 컨설턴트를 확인해서 가서 질문을 하고 받아 적는다. 전반적인 골격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다. 그 후 사내 인트라넷이나 기존에 번역해 놓은 사례들을 끼워 맞춰서 칼럼 하나를 만든다.

 

그 칼럼을 해당 컨설턴트에게 검토를 의뢰하고 별 문제없겠다는 사인이 떨어지면 신문사에 보내 게재가 된다. 어쩔때는 영문 사례를 그냥 번역해서 한국사례 하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고는 한다. 뭐…일종의 사기다. ^ ^

 

– 그러나 이 여자 선배는 몇 년 전보다 훨씬 고급 경영지식을 폭 넓게 흡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엄청나게 공부를 했다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PR인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 컨설팅 회사의 PR담당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참 업종마다 PR담당자들의 애환이라는 게 다양하기도 하다”는 당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욱 많은 PR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컨설턴트의 가장 소중한 자질은 ‘듣는 자질’이라고 합니다. 많은 PR인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제 자신의 컨설팅 역량 수양에 도움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by 우마미 | 2006/12/05 14:33 | 옛글들(2003)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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