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역할과 책임을 확정하라

[기업 위기관리 백팔수(百八手): 15편] 역할과 책임을 확정하라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주어가 빠진 지시는 제대로 된 지시가 아니다. 위기관리에 있어서도 ‘누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매뉴얼 문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특정 부서를 지칭하는 위기관리 매뉴얼에서의 이 ‘누가?’는 매뉴얼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뼈대가 된다.

반면 ‘누가?’가 확정되어 있지 않은 매뉴얼이나 구두지시는 위기 시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빨리 합시다!” “최선을 다해 봅시다!” “각자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제대로 해 주세요!” 이와 같이 ‘누가’가 빠져버린 지시는 종종 제대로 된 실행에 연결되지 않는다.

위기관리 과정에서 대부분 조직 구성원은 정치적 입장을 가지게 된다. 전사적으로 어떻게 위기를 관리하는가 하는 것 이전에, 이번 위기로 인해 내가 입을 수 있는 피해나 책임의 영역은 어느 정도인가가 더욱 중요해 보이게 된다. 따라서 ‘누가’라는 확정 없이 내려온 지시에 대해 “내가 하겠다!”하고 자발적으로 나서는 인력을 기대만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위기관리 이후 해당 위기관리 전반을 평가 할 때에도 ‘누구’의 개념은 큰 의미를 가진다. 위기를 맞아 무엇을 했는지는 그 실행 ‘주체’가 사내에서 가장 많이 알고 있다. ‘누가’ 위기에 대응했는지 알지 못한 채 평가를 진행하게 되면 분명 의미 없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 뻔하다.

각 부서별로 역할과 책임을 배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실제로도 평시 경영 주제에 있어서 각 부서는 자신만의 역할과 책임이 있다. 각 부서별로 담당분야가 있고, 내외부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이해관계자들이 있다. 이 부분들을 그대로 모아 구조적으로 정리하게 되면 어느 정도 위기관리 매뉴얼상의 역할과 책임의 가르마는 타지게 된다.

부서별로 역할과 책임을 가르는 것은 위기 발생 시 부서별로 자신들이 해야 할 위기대응 업무를 스스로 신속히 이해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와 함께 같이 협업해야 하는 부서가 어느 곳인지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도 있다. 위기 시 어떤 부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매뉴얼상에서 확인 할 수 있게 되므로, 같이 협업하는 데 있어서도 불필요한 중복이나 반복을 최소화 할 수 있다. 최대한 사일로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위기관리를 위해 최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리더가 누구인지도 미리 정해 놓아야 제대로 된 역할과 책임이 완성된다. 기업별로 위기관리 매뉴얼을 보면, CEO와 같이 평시 최고의사결정권자가 위기관리 리더십을 총괄하고 있는 곳도 있는 반면, 위기관리위원회 수장을 정해 놓아 어느 정도 수준 이하의 위기 시에는 그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위기관리를 하게 정해 놓은 곳도 있다.

어떤 리더십 구조가 좋다 나쁘다를 논의하기 이전에, 위기관리 조직을 이끌면서 최고의사결정권을 가진 포지션을 정확하게 정해 놓는 것은 필수적 위기관리 체계 중 하나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최고의사결정권자의 가시성(visibility)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일단 역할과 책임을 배분한 뒤에는 지속 시뮬레이션 해 각 부서별로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이해와 실행 숙련도를 점검해야 한다. 매뉴얼상 적혀 있는 역할과 책임과 실제 해당 부서가 생각하는 그것 그리고 숙련도는 전혀 다른 의미다. 적혀 있다고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평시 업무 진행에는 익숙하지만, 위기 시 주어진 실행에는 어려움을 겪는 부서가 있을 수 있다. 위기 시에는 보다 적극적이고 때로는 공격적으로 실행해야 하는데, 그런 경험에 있어 부족함이 있는 부서도 있을 수 있다. 예산이나 인력문제로 인해 매뉴얼에서 정한 역할과 책임이 버거운 부서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일선의 문제점들은 매뉴얼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다.

시뮬레이션 해 보아야 숨겨있거나 알지 못했던 문제들이 드러난다. 그래야 그 부분을 평시에 주목해 전사적 투자나 지원을 할 수 있게 된다. 해당 부서도 그래야 찜찜함이나 부담스러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 진다. 시뮬레이션을 통한 반복적 숙련을 기대함에 앞서 이러한 문제점을 찾아낸다는 것도 나름 큰 의미가 있다.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부서별로 위기관리 역할과 책임의 배분이 되어있지 않은 경우다. 위기 시 최고의사결정권을 가진 정확한 주체가 명기되어 있지 않는 경우다. 위기가 발생한 뒤 부서별로 각자 위기관리 역할과 책임을 가지고 난상토론을 하는 경우다. 더욱 위험한 것은 각 부서가 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로 각자 무언가를 하는 경우다. 각 부서별로 대응이 중복되고 충돌하는 경우가 생긴다.

여러 부서가 무언가는 하고 있는데, 딱히 누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난상토론만 이어지는 경우라면, 이미 이번 위기관리는 성공할 가능성이 적다 생각해야 한다. 각자 역할은 없이 축구공을 따라 우르르 몰려 다니기만 하는 동네 축구팀이 포지션에 따라 훈련된 프로 축구팀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상상해 보면 된다. 확실한 건 우리와 맞서는 위기는 항상 프로라는 사실이다.

필자소개

정용민은 국내 최초로 설립된 위기관리 전문 컨설팅사 스트래티지샐러드의 대표 컨설턴트다. 200여 이상의 국내 대기업 및 유명 중견기업 클라이언트들에게 지난 20년간 위기관리 컨설팅과 코칭, 자문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기업 위기관리 전문서적 [소셜미디어시대의 위기관리], [기업위기, 시스템으로 이겨라], [1%, 원퍼센트], [기업의 입]을 집필했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컨설턴트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컨설턴트
2009년 국내 최초의 기업 위기관리 컨설팅사 스트래티지샐러드를 창업했습니다. 약 30년간 국내외 300여 개 기업과 조직의 위기, 이슈관리를 자문해 왔으며 위기관리 분야 저서 다섯 권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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