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한 기업의 질문
“저희 대표님께서 조만간 가시화될 특정 이슈에 대비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만들고, 그에 따라서 대응하자 하셨습니다. 그 후 실무그룹이 여러 시나리오들을 개발하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실무자들은 이런 시나리오가 실제로 효과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합니다. 어떤가요?”
컨설턴트의 답변
효과가 있습니다. 시나리오 기반의 대응은 대응의 안정성과 전략성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만듭니다. 이미 가 본 길을 걷는 것과 처음 가는 길을 걷는 것은 다르지요. 가 본 길에서는 갈림길이 어디쯤 나오는지, 어디가 미끄러운지를 압니다. 걸음이 흔들리지 않고, 다음 걸음을 미리 계산할 여유도 생깁니다. 시나리오 작업은 위기가 오기 전에 그 길을 미리 한 번 걸어 보는 일입니다. 대표님의 판단은 옳습니다.
문제는 그 효과를 키우겠다며 수십, 수백 가지 시나리오를 개발해 두는 것이 과연 유효한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시나리오 작업을 직접 해 본 실무자들은 압니다. 시나리오의 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단순한 문서 작업일 뿐이라는 것을요.
수백 개의 시나리오에 수천 개의 변수가 붙고, 거기에 수만 가지 대응 방안이 곱해진다고 생각해 보시지요. 위기 시 의사결정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두꺼운 시나리오집을 펼쳐 지금 상황이 몇 번째 변형인지 찾는 사이, 골든타임은 흘러갑니다. 실제 위기는 준비된 시나리오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지도 않습니다. 어느 것과도 정확히 맞지 않는 상황 앞에서 조금씩 다른 대응 방안들이 저마다 근거를 내세우며 부딪힙니다. 결국 그 방대한 문서는 위기에 더 큰 혼란을 보탤 뿐입니다.
시나리오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안의 향방을 가르는 핵심 변수를 분석해 정리하는 일입니다. 그런 변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둘째, 전체적인 시각에서 회사의 대응 입장(포지션)과 핵심 대응안을 개발하는 일입니다. 변수가 어느 쪽으로 움직이든 회사가 지켜야 할 입장부터 세워 두는 것입니다. 이 뼈대가 서 있으면 시나리오는 그 위에 얹히는 몇 갈래의 가지로 충분합니다.
적절하고 유효한 시나리오의 수와 형태에도 기준이 있습니다. 최고경영자가 가만히 앉아 5분 정도면 전체 흐름을 기억해 낼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CEO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나리오는 위기 시 의사결정 테이블에 올라오지 못하니까요. 실무단에서는 각 시나리오에 연결된 전략과 대응 방식을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구체성이면 충분합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기업이 이 적정선에서 멈추지 못합니다. 빠뜨린 경우의 수가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 나중에 왜 이 상황은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질책을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시나리오를 자꾸 늘립니다. 시나리오의 개수가 준비의 증거처럼 여겨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불어난 문서는 조직의 불안을 달래 줄 수는 있어도, 위기를 관리해 주지는 못합니다.
실무그룹에서는 시나리오를 더 만드는 일보다 기존의 것들을 보다 다듬는 일에 힘을 쏟으시길 바랍니다. 핵심 변수와 회사의 입장, 핵심 대응안부터 정리해 보시지요. 그 결과를 대표님께서 5분 안에 떠올리실 수 있다면, 그 시나리오는 이미 제 몫을 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이코노믹리뷰에 연재한 [기업이 묻고 위기관리 컨설턴트가 답하다] 칼럼입니다. 원문: 이코노믹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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