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임직원

  • 위기관리에서 책임이란 무엇인가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이 글은 스트래티지샐러드 「위기관리 용어 사전」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 보기

    위기관리에서 말하는 책임은 한 종류가 아닙니다. 맡은 일을 해내야 하는 수행책임(responsibility), 그 결과에 대해 답하고 감당해야 하는 결과책임(accountability), 그리고 법이 묻는 법적 책임(liability)이 각각 다르게 작동합니다. 세 가지는 같은 사람에게 함께 오지 않으며, 하나를 이행했다고 나머지가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위기 대응에서 절차를 다 밟았는데도 신뢰가 회복되지 않는 상황은 대개 이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책임은 한 종류가 아닙니다

    영어에는 우리말 「책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여럿 있습니다. 그중 위기관리에서 반드시 나누어야 하는 것이 responsibility와 accountability입니다. 우리말로는 둘 다 책임으로 옮겨지지만 실제로 가리키는 대상은 다릅니다.

    수행책임(responsibility)은 맡은 일을 해내야 하는 의무입니다. 누가 그 일을 하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안전 점검을 맡은 담당자, 품질을 검수하는 부서, 협력사를 관리하는 라인이 각각 나누어 지고 있는 책임입니다. 아래로 위임할 수 있고 여러 사람에게 나눌 수 있습니다.

    결과책임(accountability)은 그 결과에 대해 이해관계자에게 답하고 그 평가를 감당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누가 이 사태에 답하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나눌 수 없고 아래로 넘길 수도 없으며, 직접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성립합니다.

    여기에 법적 책임(liability)이 더해집니다. 법원과 수사기관이 판단하는 배상과 처벌의 문제입니다.

    두 책임을 구분해서 보는 시각은 조직 이론과 거버넌스 연구에서 오래 다루어져 왔습니다. 영국의 행정학자 리처드 멀건(Richard Mulgan)은 accountability를 다른 사람에게 답하고 그 판단을 받아야 하는 외부적 관계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판단해 처리하는 내부적 의무인 responsibility와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구분수행책임결과책임법적 책임
    묻는 것누가 그 일을 했는가누가 이 사태에 답하는가누가 법을 어겼는가
    작동 시점위기 발생 이전위기 발생 이후사후 판단
    나눌 수 있는가나눌 수 있음나눌 수 없음법이 정함
    판단하는 주체회사 내부이해관계자와 공중법원과 수사기관
    표. 위기관리에서 구분해야 하는 세 가지 책임 — 스트래티지샐러드

    일은 아래로, 답변은 위로

    두 책임은 방향이 서로 반대입니다.

    수행책임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갑니다. 조직이 일을 나누어 맡기는 방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책임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갑니다. 현장에서 발생한 일이라도 최종적으로 답해야 할 사람은 위에 있습니다.

    일은 여럿이 나누어도, 답변은 한 사람이 합니다. 그 한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는가는 사안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달라집니다.

    위기 대응이 실패하는 지점은 두 방향이 같아지는 순간입니다. 일도 아래로 내려보내고 답변까지 아래로 내려보내는 경우입니다. 사고가 나면 현장 책임자를 앞에 세우고 담당 임원을 문책해 사안을 종결하려는 대응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흔히 꼬리 자르기라고 부르는 것의 구조입니다.

    답변을 아래로 내리면 다음 위기를 모르게 됩니다

    꼬리 자르기의 문제는 도의적인 데 그치지 않습니다. 조직의 작동 방식을 망가뜨립니다.

    회사가 위기를 미리 아는 경로는 현장에서 올라오는 보고입니다. 이상 징후를 처음 보는 사람은 언제나 현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났을 때 답변의 부담이 현장으로 내려간 전례가 생기면, 다음번에 이상 징후를 발견한 직원은 그것을 올리지 않습니다. 올리는 순간 자신이 그 사안의 답변자가 된다는 것을 학습하기 때문입니다.

    조직 심리학자 에이미 에드먼드슨(Amy Edmondson)이 병원 조직을 관찰하면서 확인한 것도 같은 현상입니다. 오류 보고 건수가 많은 팀이 실제로 오류가 많은 팀이 아니라, 보고해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고 믿는 팀이었습니다. 보고가 적은 조직은 안전한 조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조직입니다.

    결과책임을 아래로 내리면 수행책임의 기반까지 무너집니다. 보고가 끊긴 조직은 위기를 예방할 수 없고, 경영진의 판단은 틀린 사실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위기관리의 전제에서 위험 신호가 불이익 없이 위로 올라오는 경로를 확인 항목으로 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실무자를 지키는 일이 다음 위기를 아는 방법입니다.

    법적으로 이겨도 책임은 남습니다

    세 가지 책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실무에서 자주 놓치는 부분입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직접 관여하지도 않은 사안에서 결과책임이 발생하는 경우는 흔합니다. 협력사 사업장에서 일어난 중대재해, 가맹점에서 발생한 위생 사고, 인수하기 전에 벌어진 피인수기업의 부정행위가 그렇습니다. 법적으로는 방어할 수 있고 인과적으로도 연결되지 않지만, 공중은 그 회사에 답을 요구합니다.

    이때 위법 사항이 없다는 해명을 앞세우면 상황은 대개 나빠집니다. 법적 책임에 대한 답을 결과책임에 대한 답으로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공중이 물은 것은 처벌받을 일인가가 아니라 이 회사가 이 일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입니다.

    법적 방어에 성공한 기업이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는 상황은 대응이 부실해서 생기지 않습니다. 답해야 할 질문과 답한 내용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생깁니다.

    세 가지를 따로 다루어야 합니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회사가 분리해서 판단해야 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누가 그 일을 했는가는 내부 조사가 밝힐 문제입니다. 무엇을 법적으로 인정할 것인가는 법무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누가 이 사태에 답할 것인가는 커뮤니케이션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세 가지를 같은 자리에서 함께 처리하면 두 방향의 사고가 발생합니다. 내부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법적 책임을 인정해 버리거나, 반대로 법적 방어 논리가 대외 메시지를 지배해 답해야 할 질문에 답하지 못하게 됩니다. 실제 위기 상황에서 자주 발생하는 실패는 후자 쪽입니다.

    책임을 정확히 이행하려면 먼저 책임을 정확히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중 국내 기업이 가장 자주 놓치는 것이 답하는 책임입니다.

    근거로 삼은 표준과 자료
    상법 제382조 제2항 · 제382조의3
    민법 제681조 · 제683조
    Richard Mulgan, 「Accountability」: An Ever-Expanding Concept?, Public Administration (2000) — responsibility와 accountability의 구분
    Amy C. Edmondson, Learning from Mistakes Is Easier Said Than Done, Journal of Applied Behavioral Science (1996) — 오류 보고와 심리적 안전에 관한 병원 조직 연구
    위 개념들을 기업 위기관리 관점에서 두 책임의 방향으로 정리하고 세 가지 책임의 분리 운용으로 구성한 부분은 스트래티지샐러드의 정리입니다.

  • 위기관리의 전제란 무엇인가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이 글은 스트래티지샐러드 「위기관리 용어 사전」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 보기

    위기관리의 전제란 기업이 선의의 행위자로 행동하고 있고, 경영진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충실의무를, 직원이 성실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다는 조건을 말합니다. 위기관리의 원칙과 프로세스, 그리고 컨설턴트가 내놓는 조언과 전략은 모두 이 조건 위에서 설계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조건은 법령이 정한 의무를 지켰다는 뜻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해 왔다는 뜻입니다.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 사안에 위기관리의 원칙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 그것은 관리가 아니라 은폐가 됩니다.

    선의는 착함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의는 도덕적 선함이 아닙니다. 두 가지 조건으로 정의되는 기능적인 상태입니다.

    첫째는 해악을 기획하지 않는 것입니다. 위기를 의도적으로 설계하거나,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 선택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둘째는 문제를 인지한 시점부터 즉시 바로잡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선의는 이 둘이 결합할 때만 성립합니다. 의도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선의가 아닙니다.

    이 정의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위기의 발생 여부는 그 회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기준이 되는 것은 위기 앞에서 선의의 행위자로 움직였는가입니다.

    전제는 세 층위로 나뉩니다

    선의는 회사 전체의 지위이지만, 회사라는 법인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경영진의 결정과 직원의 실행을 통해서만 움직입니다. 그래서 전제도 하나의 덩어리로 확인할 수 없고, 세 층위에서 나누어 확인해야 합니다.

    세 주체는 각각 다른 의무를 지고 있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 각각 다른 항목에서 확인됩니다.

    주체전제위기가 발생했을 때 확인되는 것
    기업선의의 행위자로 행동함해악을 기획하지 않았는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준과 절차를 갖추어 두었는가
    위험 신호가 위로 올라오는 경로를 만들고 불이익 없이 쓰이게 했는가
    직원을 방패로 세우지 않고 보호했는가
    경영진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충실의무평시의 의사결정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충실하게 처리되었는가
    사적인 말과 행동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았는가
    감지되거나 보고된 위기 요소를 적시에 처리했는가
    결정의 정보와 대안과 이유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가
    직원성실의무맡겨진 분야와 영역의 업무를 기준대로 처리했는가
    현장에서 알게 된 사실을 제때 회사에 전달했는가
    표. 위기관리의 세 가지 전제와 확인 항목 — 스트래티지샐러드

    여기에서 말하는 회사의 이익에는 평판이 포함됩니다. 재무적으로는 이득이 되는 결정이 회사의 이름을 깎는다면, 그것은 회사의 이익을 위한 결정이 아닙니다. 경영진 개인의 말과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적인 자리에서의 발언이나 처신이라도 회사의 자산을 깎는 순간 사적인 일로 남지 않습니다.

    세 층은 서로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경영진이 아무리 신중해도 현장의 사실이 올라오지 않으면 그 신중함은 틀린 사실 위에서 작동하고, 직원이 아무리 성실해도 회사가 기준과 절차를 갖추어 두지 않았다면 개인의 성실로 메울 수 있는 범위를 넘습니다.

    특히 위기의 상당수는 특별한 사건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조금씩 밀리고 생략된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회사가 직원을 방패로 세우거나 책임을 아래로 내려보내는 순간, 그 직원은 우리 편이 아니라 회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해관계자가 되고 동시에 가장 유력한 제보자가 됩니다.

    법이 정한 선은 바닥이지 천장이 아닙니다

    위의 세 가지 전제는 각각 법에 대응하는 최소한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업에는 준법통제기준을 마련하라는 상법 조항이 있고, 경영진에게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충실의무가 있으며, 직원에게는 신의성실 원칙에서 도출되는 성실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켰다는 사실만으로 전제가 갖추어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위기의 성패를 가르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법원이 아니라 공중이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사안이 위기가 되는 경우는 흔합니다. 절차를 다 지켰고 위법도 없었는데 여론이 돌아서는 상황입니다. 이때 위법 사항이 없다는 해명을 앞세우면 위기는 대개 더 커집니다. 공중이 묻고 있는 것은 적법했느냐가 아니라 마땅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함의 범위는 회사마다 다르고 사안마다 다릅니다. 그 회사가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신뢰의 크기, 사업이 다루는 위험의 성격, 이해관계자가 대신 감수하고 있는 위험의 크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법령은 그 가운데 사회가 최소한으로 합의해 문서로 옮겨 놓은 부분일 뿐입니다. 법적 방어선을 위기관리의 목표선으로 삼으면, 지키기는 하겠지만 그 자리에서 신뢰가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전제를 지키는 일이 곧 위기관리입니다

    전제가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이 터졌다면, 그것은 위기 사안이 아니라 스스로 불러들인 경영의 실패입니다. 경영의 실패에는 위기관리의 원칙과 도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 전제가 지켜지고 있는 회사에서는 위기가 잘 발생하지 않습니다. 위기관리의 본령이 발생 가능한 위기를 미리 예상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해 두는 것이므로, 전제를 지키는 일 자체가 이미 위기관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준비는 위기가 닥친 뒤에 급히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운이 따르지 않아 위기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과가 갈리는 것은 그때입니다. 전제를 지켜 온 회사에는 설명할 것이 남아 있고, 지키지 않은 회사에는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기 상황에서 회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평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해 왔다는 사실을 정확하고 충분하게 입증하는 커뮤니케이션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하는 실행입니다. 실행 없는 입증은 변명이 되고, 입증 없는 실행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두 가지가 함께 성공할 때 위기관리가 완성됩니다.

    근거로 삼은 표준과 자료
    상법 제382조 제2항 · 제382조의3 · 제542조의13
    민법 제2조 · 제681조
    이사의 충실의무 조항은 2025년 개정으로 그 대상이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되었습니다. 본문에 인용한 조항은 전제의 최소선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며, 위기관리가 요구하는 수준은 그보다 넓습니다.

  • 회사가 언론에 관심이 없는데요?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한 기업의 질문

    “저희 회사는 언론관계에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홍보실 직원들도 기자 전화를 피하고, 기자들은 또 반대로 홍보실이 일을 못한다고 하고 하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심지어 회사에서는 언론기사도 직원들에게 공유하지 말라고 하는 정도입니다. 이런 기반에서 위기관리가 가능할까요?”

    컨설턴트의 답변

    솔직하게 답을 드리면, 그 기반에서 위기관리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위기가 왔을 때 회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원리는 단순합니다. 평시에 언론관계가 없는 기업은, 위기 시에도 언론의 지원이나 동의 없이 그 상황을 홀로 견뎌야 합니다. 우리 입장을 한 번 들어봐 줄 기자도,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써 줄 데스크도 없는 채로 말이지요. 급해진 기업들은 그때 가서야 언론관계를 ‘사오려’ 합니다. 광고를 급히 집행하고, 처음 보는 기자들에게 식사 자리를 청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합니다. 관계라는 것은 필요할 때 사오는 물건이 아니라, 필요 없을 때 쌓아 두는 저축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딱히 언론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정부, 기관, NGO, 노조, 거래처, 고객. 그 누구도 평시 관리 수준 이상으로, 그보다 더 나은 수준으로 위기 시에 협조해 주지 않습니다. 입장을 바꿔 보시면 금방 이해가 될 겁니다. 평소 연락 한 번 없던 사람이 곤경에 빠졌다며 갑자기 도움을 청해 온다면, 누가 얼마나 마음을 내시겠습니까. 위기 시 이해관계자의 협조는 평시 관계의 잔고 안에서만 인출됩니다.

    그런데 질문 중에 사실 더 우려스러운 대목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언론기사를 직원들에게 공유하지 말라고 한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조직 전체가 회사의 기준에 따라 정무감각과 여론 읽는 역량을 기를 통로를 스스로 차단하는 셈입니다. 부정기사라도 회사의 공식입장을 담아 내부에 공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직원들이 ‘회사는 이 사안을 이렇게 본다’는 기준을 갖게 되지요. 긍정적인 기사는 또 어떻습니까. 직원들의 사기를 올리고, 회사의 핵심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하는 훌륭한 교재입니다.

    기사를 차단한다고 해서 직원들이 회사 소식을 모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공식 통로가 닫히면 직원들은 사적인 경로로 온갖 회사 정보를 취합니다. 단체 대화방에서, 익명 게시판에서, 소문으로 말이지요. 거기에는 회사의 입장도, 사실 확인도 없습니다. 조직 전체가 같은 사실을 같은 기준으로 이해한다는 얼라인먼트(alignment)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위기가 터지면 이 구조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직원들이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밖에서 주워듣고, 저마다 다른 말을 밖으로 옮기는 것이죠.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평시에 하는 것을 보면, 위기 시에 할 수 있는 것이 보입니다. 평시에 언론과 등을 돌린 회사가 위기 때 언론의 이해를 얻을 수는 없고, 평시에 직원과 정보를 나누지 않은 회사가 위기 때 직원들의 한목소리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그 기반은, 위기관리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우려스러운 체계입니다. 위기가 오기 전에, 닫아 둔 문부터 하나씩 열어 두시기 바랍니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이코노믹리뷰에 연재한 [기업이 묻고 위기관리 컨설턴트가 답하다] 칼럼입니다. 원문: 이코노믹리뷰

  • 이해관계자란 무엇인가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이 글은 스트래티지샐러드 「위기관리 용어 사전」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 보기

    이해관계자는 회사의 목표 달성에 영향을 미치거나 회사의 활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집단과 개인을 말합니다. 임직원, 주주와 투자자, 고객, 협력사, 지역사회, 규제기관이 대표적입니다. 위기관리에서 이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위기의 성패를 판정하는 주체가 회사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해관계자의 무게가 같지는 않습니다

    경영 분야에서는 이해관계자를 두 층으로 나누어 봅니다. 하나는 그 집단의 참여가 끊기면 회사가 사업을 계속할 수 없는 집단입니다. 임직원, 주주와 투자자, 고객, 협력사, 그리고 사업 인허가를 쥐고 있는 규제기관이 여기에 속합니다.

    다른 하나는 회사와 주고받는 영향은 분명하지만 거래 관계로 직접 묶여 있지는 않은 집단입니다. 언론, 시민단체, 업계 단체, 일반 여론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 구분이 실무에서 갖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앞의 집단은 관계가 끊어지면 사업이 멈춥니다. 뒤의 집단은 관계가 나빠져도 사업이 곧바로 멈추지는 않지만, 앞의 집단의 판단을 바꿔 놓습니다. 위기 시 언론 대응을 하는 이유도 언론 자체가 목적이어서가 아니라, 언론을 통해 고객과 임직원과 규제기관이 상황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공중과 이해관계자는 다른 기준으로 나눈 개념입니다

    두 용어는 자주 섞여 쓰이지만 나누는 기준이 다릅니다. 이해관계자는 회사와의 관계 자체를 기준으로 한 개념이고, 공중은 특정 이슈에 대한 반응을 기준으로 한 개념입니다.

    구분이해관계자공중
    나누는 기준회사와 이해가 걸려 있는 관계특정 이슈를 인식하고 반응하는 상태
    형성 방식사업 구조에 따라 회사가 미리 규정함이슈가 생기면 스스로 형성되어 회사를 주목함
    사전 특정명단으로 정리 가능함사전 명단화가 어려움
    위기 시 성격위기가 끝난 뒤에도 관계가 남는 대상위기 국면의 여론 압력을 만드는 대상
    대응 방식평시 관계 구축과 개별 커뮤니케이션이슈 모니터링과 공개 커뮤니케이션
    표. 이해관계자와 공중의 구분 — 스트래티지샐러드

    실무에서 기억할 점은 이것입니다. 한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집단은 원래부터 회사의 이해관계자였을 수도 있고, 회사와 아무 거래가 없던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앞의 경우는 관계 회복의 문제이고, 뒤의 경우는 여론 대응의 문제입니다. 이 둘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면 양쪽 모두 실패합니다.

    이해관계자는 위기마다 다시 그려야 합니다

    회사에는 상시 이해관계자 목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발생하면 그 목록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제품 사고라면 소비자와 유통 채널과 식약 당국이 앞으로 나오고, 인사 이슈라면 임직원과 노동 당국과 채용 시장이 앞으로 나옵니다. 회계 이슈라면 투자자와 감독기관과 신용평가사가 앞으로 나옵니다.

    위기 발생 직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이 재배열입니다. 이번 위기에서 누구의 판단이 회사의 손실 규모를 결정하는가. 이 질문에 답이 나오면 메시지의 순서와 형식이 결정됩니다.

    위기의 정의는 회사가 아니라 이해관계자가 내립니다

    회사가 이것은 위기가 아니라고 판단해도, 이해관계자가 위기로 인식하면 위기입니다. 반대로 회사 내부에서 심각하게 보는 사안이 이해관계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위기의 크기를 재는 자는 회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실무에서 자주 발생하는 오류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판단, 기술적으로 근거가 부족하다는 판단, 경쟁사도 같다는 판단은 모두 회사 내부의 기준입니다. 이해관계자가 그 기준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판단은 위기 대응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부 구성원이 첫 번째 이해관계자입니다

    위기가 발생하면 회사는 대개 외부부터 봅니다. 그러나 회사의 설명을 가장 먼저 검증하는 사람들은 임직원입니다. 회사 발표가 내부에서 납득되지 않으면 그 내용은 반드시 밖으로 흘러 나갑니다. 내부 커뮤니케이션이 위기관리의 부속 절차가 아니라 앞 단계인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해관계자 관리가 아닌 것

    이해관계자 목록을 문서로 보유하는 것은 관리가 아닙니다. 관리는 평시에 각 이해관계자와 실제 접점을 유지하고, 그들이 회사의 무엇을 신뢰하고 무엇을 의심하는지 파악해 두는 활동입니다. 위기가 발생한 뒤에 처음 연락하는 이해관계자에게 회사의 설명은 거의 전달되지 않습니다.

    우호적인 이해관계자만 관리 대상으로 삼는 것도 관리가 아닙니다. 위기 시 회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쪽은 대개 평시에 회사와 거리가 있던 집단입니다.

    이해관계자를 정리할 때 확인할 것

    이번 사안에서 회사의 손실 규모를 실제로 결정하는 쪽이 누구인지 먼저 적어 보십시오. 목록의 맨 위에 놓이는 이름이 바뀌면 메시지의 순서도 바뀝니다.

    그다음 그 집단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와 모르는 정보를 나누어 보십시오. 회사가 설명해야 할 것은 회사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그들이 모르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 집단에 회사의 메시지가 도달하는 경로가 실제로 확보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경로가 없으면 아무리 정확한 설명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회사가 아닌 곳에서 정보를 얻고 있다면 그 출처가 어디인지 확인해 보십시오. 회사보다 먼저 도달한 설명이 판단의 기준선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위기가 끝난 뒤에도 관계가 계속되어야 하는 집단이 누구인지 짚어 보십시오. 그 집단에게는 지금의 대응이 관계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습니다.

    더 읽어 보실 자료

    위기 시 이해관계자 우선순위는 어떻게 정하는가: 정리된 이해관계자에 순서를 매기는 작업입니다.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 이해관계자에게 회사의 설명이 가 닿는 축입니다.
    이슈관리와 위기관리는 어떻게 다른가: 공중이 형성되기 전에 다루는 영역입니다.
    위기관리 시 포지션이란 무엇인가: 이해관계자 앞에 세우는 회사의 입장입니다.

  • 살아 있는 위기관리 매뉴얼이란 무엇인가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이 글은 스트래티지샐러드 「위기관리 용어 사전」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 보기

    살아 있는 위기관리 매뉴얼은 조직 구성원이 그 내용을 알고 있고, 정기적으로 고쳐지고 있으며, 훈련·시뮬레이션을 통해 실제로 검증되고 있는 매뉴얼을 말합니다. 문서의 두께나 완성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매뉴얼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매뉴얼이 작동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보유와 활용은 다릅니다

    위기관리 매뉴얼은 없어도 문제고 있어도 문제인 계륵 같은 존재입니다. 없는 상태에서 위기가 터지면 매뉴얼도 없이 대응했다는 비판이 따라옵니다. 있는 상태에서 위기가 터지면 매뉴얼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거나 매뉴얼이 낡아서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따라옵니다.

    여기서 보유라는 말에 주목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보유가 곧 활용이나 참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홍보실을 포함해 유관 부서를 통틀어 매뉴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사람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위기관리 매뉴얼의 유효 기간은 제작 후 딱 여섯 달뿐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위기가 터진 뒤에야 매뉴얼을 펼치기 시작하는 것은, 비행기가 추락하는 중에 기장이 매뉴얼을 처음 여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언제나 누가입니다

    준비의 중심은 무엇이 아닙니다. 누가와 어떻게입니다. 매뉴얼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은 늘 누가입니다.

    위기관리를 준비하자고 하면 곧바로 팀을 짜자, 매뉴얼을 만들자, 훈련·시뮬레이션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부 무엇에 대한 논의입니다. 그러다 예산 앞에서 막힙니다. 순서를 바꾸어야 합니다. 누가 판단하고 누가 실행하는지가 정해지면 무엇은 그 뒤에 자연히 따라옵니다.

    결국 위기관리는 매뉴얼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합니다. 위기관리에 실패한 사례를 들여다보면 매뉴얼 자체보다 그것을 관리하고 개선하는 사람이 더 근본적인 문제였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현실성은 문장이 아니라 자원에서 나옵니다

    매뉴얼이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현실성이 무엇인지는 잘 정의되지 않습니다.

    매뉴얼이 반영해야 할 현실성은 실행에 쓸 수 있는 유무형 자산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산, 인력, 장비, 설비, 협력 체계입니다. 고층 건물 화재에 고가 사다리와 헬리콥터를 쓰라고 적어 두었는데 그것을 가진 조직이 없다면, 그 매뉴얼은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매뉴얼에 위기 시 특정 공간을 확보하고 설비를 갖춘다고 적고 그 책임을 총무팀으로 지정했다고 해 보십시오. 소집 명령 뒤 한두 시간 안에 모든 설비를 갖추라는 구절을 읽은 총무팀장의 첫 반응은 정해져 있습니다. 예산은, 누가, 어떻게입니다. 이 질문에 답이 없으면 그 조항은 문장으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반면 위기 국면의 판단이 현실적인가 아닌가는 상황에 따라 갈리는 문제입니다. 그것까지 매뉴얼에 적어 넣으려 하면 분량만 늘고 실효는 없습니다.

    업데이트는 문서 작업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업데이트되지 않은 매뉴얼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무자 입장에서 업데이트는 고역입니다. 직제 개편은 수시로 일어나고 담당자는 계속 바뀝니다. 새로 온 사람은 매뉴얼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리 책임이 있는 임원도 점차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이 악순환이 반복되면 매뉴얼은 생명력을 잃습니다. 몇 달 뒤에 다시 들춰 보면 고서적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알려지지 않은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매뉴얼의 내용을 구성원에게 알리고, 이해시키고, 피드백을 받아 고치는 일이 쌓일 때 매뉴얼은 조직 안에서 생명력을 얻습니다. 매뉴얼을 살리는 방법은 결국 끊임없는 내부 커뮤니케이션뿐입니다.

    훈련·시뮬레이션이 매뉴얼을 고칩니다

    훈련·시뮬레이션은 두 개의 사업이 아니라 하나의 묶음입니다. 실무에서 따로 떨어져 굴러가는 법이 없습니다.

    둘은 검증하는 대상이 다릅니다. 훈련은 사람의 역량을 봅니다. 대변인이 질문 앞에서 어떻게 답하는지, 실무자가 초기 정보를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확인합니다. 시뮬레이션은 체계의 작동을 봅니다. 보고가 제시간에 올라가는지, 소집이 실제로 되는지, 결정이 어디서 막히는지를 확인합니다.

    한쪽만 하면 반쪽이 됩니다. 훈련만 하면 사람은 늘었는데 그 사람이 설 자리가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뮬레이션만 하면 체계는 그려졌는데 그 자리에 설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둘은 처음부터 하나의 팩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매뉴얼의 결함은 책상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대응 단계 구분이 애매하다거나 지휘 체계가 겹친다는 문제는 위기 국면에 처음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평시 훈련·시뮬레이션에서 드러나고 고쳐져야 합니다.

    위기 국면에 치명적 결함이 드러났다면, 그것은 매뉴얼을 잘못 썼기 때문이 아니라 훈련·시뮬레이션을 통해 고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뉴얼과 훈련·시뮬레이션은 별개가 아닙니다. 훈련·시뮬레이션은 매뉴얼을 검증하는 절차이고, 매뉴얼은 그 대본이 아니라 훈련·시뮬레이션이 고쳐 나가는 대상입니다. 이 순환이 돌지 않는 조직에서 매뉴얼은 캐비닛 안의 문서로 남습니다.

    죽은 매뉴얼과 살아 있는 매뉴얼

    구분죽은 매뉴얼살아 있는 매뉴얼
    인지존재를 아는 사람이 소수관련자 모두가 자기 역할을 알고 있음
    기준무엇을 할지가 먼저 적혀 있음누가 판단하고 누가 실행할지가 먼저 정해져 있음
    현실성가진 적 없는 자원을 전제함예산·인력·장비·협력 체계로 뒷받침됨
    갱신인사이동과 직제 개편이 반영되지 않음정기 점검 주기와 담당이 정해져 있음
    검증위기 때 처음 펼쳐짐훈련·시뮬레이션에서 결함이 드러나고 고쳐짐
    소통만든 부서만 알고 있음알리고 이해시키고 피드백을 받음
    표. 죽은 매뉴얼과 살아 있는 매뉴얼 — 스트래티지샐러드

    우리 매뉴얼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법

    첫째, 위기관리 책임자와 실무자에게 매뉴얼에서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문서를 찾아봐야 답할 수 있다면 그 매뉴얼은 아직 살아 있지 않습니다.

    둘째, 마지막 개정일을 확인하십시오. 그 이후에 있었던 인사이동과 직제 개편이 반영되어 있는지 함께 보십시오.

    셋째, 지난 일 년간 매뉴얼을 놓고 훈련·시뮬레이션을 한 적이 있는지, 그 결과로 매뉴얼이 실제로 고쳐졌는지 확인하십시오. 훈련·시뮬레이션은 했는데 매뉴얼이 그대로라면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넷째, 매뉴얼이 지정한 책임 부서에 필요한 예산과 자원이 실제로 배정되어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이 네 가지에 답하지 못하는 매뉴얼은 보유하고 있을 뿐 작동하지는 않는 문서입니다.

    더 읽어 보실 자료

    위기관리 매뉴얼이란 무엇인가: 매뉴얼의 정의와 구성입니다.
    위기관리 시뮬레이션이란 무엇인가: 매뉴얼을 검증하는 훈련·시뮬레이션입니다.
    미디어 트레이닝이란 무엇인가: 훈련·시뮬레이션에서 사람의 역량을 다루는 쪽입니다.
    위기관리 컨설턴트가 답하다

  • 위기 시 이해관계자 우선순위는 어떻게 정하는가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이 글은 스트래티지샐러드 「위기관리 용어 사전」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 보기

    이해관계자는 회사의 위기 상황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영향을 받거나, 위기의 전개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을 뜻합니다. 임직원, 언론, 규제기관, 투자자, 거래처, 지역사회가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위기 상황에서 이들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으므로 대응의 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그 앞자리에 놓이는 것이 원점입니다.

    최우선 이해관계자는 원점입니다

    어떤 기업 위기에나 이해관계자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파하는 사람, 손해나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화를 내는 사람, 억울해하는 사람, 공격성을 드러내는 사람, 자신의 확산 역량을 과시하는 사람, 그리고 실제로 행동에 나서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그룹을 원점이라고 부릅니다. 때로는 한 사람이 원점이 되기도 합니다. 상황을 만들고, 그 상황을 부정적인 상태로 유지시키며, 나아가 악화시키거나 확산시킬 수 있는 힘이 이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대응의 앞자리에는 원점이 놓입니다. 규제기관이나 언론이 더 급해 보이는 국면에서도 이 순서는 유지되어야 합니다.

    원점을 뒤로 미루면 벌어지는 일

    원점이 언론이나 규제기관에 먼저 접촉하면 회사의 설명은 그때부터 해명이 됩니다. 먼저 말한 쪽의 서사가 기준이 되고, 회사는 그 서사를 반박하는 위치에 놓입니다.

    다른 이해관계자들이 회사를 평가하는 기준도 결국 원점을 어떻게 대했는가입니다. 규제기관도 언론도 그 지점을 봅니다. 사안의 사실관계보다 회사의 태도가 먼저 평가되는 국면이 여기서 만들어집니다.

    원점을 다룬다는 것은 그들의 관점에서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불만이나 피해가 신속히 줄어드는 방향으로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압박하거나 침묵시키는 접근과는 반대편에 있습니다.

    그다음은 영향력으로 판단합니다

    원점 대응이 자리를 잡으면, 나머지 이해관계자는 이 사안의 전개를 좌우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순서를 정합니다. 규제기관, 언론, 주요 거래처, 여론 형성자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각 이해관계자가 무엇을 기다리는지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규제기관은 법적 이행 여부를, 거래처는 공급과 계약의 지속 가능성을, 임직원은 자신의 자리와 회사의 방향을 봅니다. 같은 메시지를 모두에게 보내면 어느 쪽에도 닿지 않습니다.

    평시에 지도를 그려 두어야 합니다

    위기 상황에서 이해관계자를 처음부터 파악하려 하면 반드시 빠뜨립니다. 눈에 보이는 쪽만 대응하고, 조용히 지켜보던 쪽이 나중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평시에 위기 유형별로 이해관계자 지도를 그려 두어야 합니다. 안전사고에는 누가, 제품 문제에는 누가, 노사 사안에는 누가 관련되는지를 미리 목록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각 이해관계자를 담당할 부서와 접촉 경로도 함께 정합니다.

    실제로 이해관계자별 담당은 부서에 따라 나뉩니다. 언론은 홍보, 규제기관은 법무와 대관, 투자자는 IR, 고객은 고객서비스, 거래처는 영업, 임직원은 인사가 맡는 식입니다. 이 배분이 평시에 정해져 있어야 위기 첫날에 중복 접촉이나 공백이 생기지 않습니다.

    지도를 갖춘 조직과 갖추지 않은 조직은 위기 첫날의 움직임부터 다릅니다.

    더 읽어 보실 자료

    원점관리란 무엇인가: 최우선 이해관계자를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위기 시 사과문은 무엇을 갖춰야 하는가: 우선순위가 문장으로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위기관리위원회란 무엇인가: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조직입니다.
    위기관리 원 포인트 레슨

  • 기업은 왜 위기관리를 외부에 맡기는가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이 글은 스트래티지샐러드 「위기관리 용어 사전」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 보기

    기업이 위기관리를 외부에 맡기는 이유는 인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위기 국면의 내부 판단은 이해관계와 감정에서 자유롭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시선을 하나 두어 판단의 균형을 잡는 것이 외부 자문의 본질입니다.

    내부만으로 어려운 이유

    첫째, 내부 구성원은 이해당사자입니다. 사안의 원인이 특정 부서에 있을 때, 그 부서와 함께 일해 온 사람이 냉정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책임 소재가 걸린 사안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둘째, 조직에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최고경영자의 판단이 문제의 원인일 때, 내부에서 그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외부 자문은 그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셋째, 안에서만 보게 됩니다. 위기관리에 실패하는 기업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위기를 내부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말해 줄 사람이 회의실에 없으면, 회사가 납득한 논리가 밖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넷째, 경험의 빈도가 다릅니다. 한 기업이 큰 위기를 겪는 것은 몇 년에 한 번입니다. 외부 자문은 여러 기업의 여러 위기를 동시에 봅니다. 우리에게 처음인 상황이 그들에게는 여러 번째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론을 맡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위기 국면의 회의실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최고경영자의 의중이 읽히는 순간 반대 의견이 사라집니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결과는 나빠집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반론을 맡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이 결정이 최악으로 흐르면 어떤 그림이 되는지, 상대편은 이 발표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굳이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입니다.

    내부 인사에게 이 역할을 맡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리와 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 자문이 이 역할을 대신 맡을 수 있다는 점이 실무에서는 생각보다 큰 가치를 가집니다.

    언제 외부 자문을 부릅니까

    가장 좋은 시점은 위기가 없을 때입니다. 위기요소를 진단하고 체계를 만들고 훈련하는 작업은 평온한 시기에만 가능합니다.

    위기가 이미 발생한 뒤라면, 사안의 성격이 다음에 해당할 때 외부 자문이 필요합니다. 최고경영자나 오너가 관련된 경우, 사안이 여러 부서에 걸쳐 있어 내부 조율이 어려운 경우, 전례가 없어 판단 기준 자체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입니다.

    반대로 담당 부서가 명확하고 전례가 있는 사안은 내부에서 처리하는 편이 빠릅니다. 모든 위기에 외부 자문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외부에 맡겨도 대신할 수 없는 것

    결정은 회사가 합니다. 외부 자문은 선택지와 각 선택의 결과를 정리해 줄 수 있지만, 무엇을 감당할지는 회사가 정합니다.

    사과와 책임 인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임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해관계자들은 회사가 스스로 판단해 말했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조직의 체질은 외부가 바꾸지 못합니다. 문제를 보고했을 때 비난받는 문화, 부서 간에 정보가 흐르지 않는 구조, 위기요소를 말하면 불이익을 받는 분위기는 외부 자문이 있어도 그대로 남습니다. 이런 조직은 위기를 감지하는 단계에서 이미 실패합니다.

    더 읽어 보실 자료

    위기관리 컨설팅이란 무엇인가: 외부에 맡기는 일의 내용입니다.
    위기관리 컨설턴트는 무슨 일을 하는가: 맡기는 상대의 성격입니다.
    위기관리위원회란 무엇인가: 외부 자문이 참여하는 자리입니다.
    CEO 위기관리 가이드 50

  • 위기관리는 모든 기업에게 필요할까?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더피알=정용민|위기관리 컨설턴트에게 “모든 기업에 위기관리와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이 반드시 필요한가”라고 물으면, 대답은 대개 정해져 있다. “그렇다. 예외는 없다.” 그러나 현장은 이 대답과는 약간 다르다. 지방 기업과 중소기업의 대표들은 이 말을 들으면 고개를 돌린다. 그들에게 위기관리란 대기업의 사정이고, 전국적 명성을 가진 회사의 숙제일 뿐이다. 그들은 위기관리를 몰라서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해 관심을 두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위기관리는 잃을 것이 많은 대기업만의 것일까.

    위기관리를 두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나란히 놓아 보면 그 격차가 선명하다. 대기업에는 위기가 오기 전부터 상비군이 있다. 전담 홍보실과 법무팀, 대외협력 조직이 상시로 돌아가고, 수백 페이지짜리 위기관리 매뉴얼과 상황별 대응 시나리오가 서랍에 준비되어 있다. 정기적으로 모의 훈련과 미디어 트레이닝을 돌리고, 외부의 로펌과 PR 회사, 모니터링 업체와도 평소에 계약을 맺어 둔다. 위기가 터지면 즉시 가동되는 하나의 시스템이 이미 서 있다.

    중소기업의 사정은 다르다. 대표 한 사람이 홍보실이자 법무팀이고, 총무이자 대외협력 담당이다. 문서로 정리된 매뉴얼은 없고, 대부분의 판단이 대표의 머릿속과 즉흥에 기댄다. 위기를 걸러 줄 견제 장치도, 대신 말해 줄 창구도 없다. 외부 전문가는 위기가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검색창에 이름을 쳐 넣기 시작한다.

    차이는 조직과 문서에만 있지 않다. 의사결정의 구조가 다르다. 대기업의 위기 대응은 여러 사람의 검토와 견제를 거치며 다듬어지지만, 중소기업에서는 대표 한 사람의 판단이 그대로 회사의 대응이 된다. 잘못된 결정을 걸러 줄 장치가 없으니, 대표의 감정 섞인 한마디나 즉흥적 지시가 곧바로 밖으로 나가 버린다.

    노출의 성격도 다르다. 대기업은 늘 대중과 언론의 감시 아래 있지만, 그만큼 위기에 반응하는 근육도 단련되어 있다. 반면 평소 조명 밖에 있던 중소기업은 어느 날 갑자기 카메라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 빛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이 격차만 보면 ‘중소기업에 대기업식 위기관리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 맞다. 대기업이 24시간 대기하는 소방서를 갖췄다면, 중소기업에 똑같은 소방서를 지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그렇다면 소방서를 지을 수 없는 회사는, 위기관리를 아예 접어도 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위기관리가 대기업만의 것이라는 그 생각은 절반은 맞다.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그 중에서도 언론과 대중을 향한 커뮤니케이션의 투자 규모는 그 기업이 가진 명성 자산의 크기에 비례한다. 전국적 또는 글로벌 접점을 가진 대기업과 공개된 이미지가 거의 없는 지방 중소기업이 똑같은 수준의 상시 조직과 예산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잃을 명성이 클수록 그것을 지키는 데 더 많은 자원을 쓰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배분이다.

    위기는 대체로 그 회사의 몸집에 맞춰 온다. 사업의 범위와 영향력을 넘어서는 위기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작은 회사에는 작은 위기가, 큰 회사에는 큰 위기가 온다. 이 구조 위에서 보면 규모에 맞춘 대비가 상식이고, 대기업식 위기관리 체계를 모든 기업에 강요하는 것은 분명한 과잉이다. 다만 규모에 비례하는 것은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이지 ‘위기관리’ 그 자체는 아니다. 안전과 법규, 현금흐름과 핵심 인물의 리스크를 미리 관리하는 일은 회사 규모와 무관하게 거의 모든 기업에 해당한다.

    최악의 위기는 그 회사의 규모와 범위, 영향력을 훌쩍 뛰어넘는 형태로 폭발한다. 몇 년 전, 한 지방 산업단지의 배터리 공장에서 큰불이 나 다수의 근로자가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그때까지 그 회사의 이름을 아는 국민은 거의 없었지만, 사고는 순식간에 전국의 헤드라인을 뒤덮었다. 최근에도 직원의 사망 사고 뒤 대표가 사과에 나섰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오가던 정황이 드러나 전국적 지탄을 받은 지역 기업이 있었다. 이런 위기는 ‘위기는 몸집에 맞춰 온다’는 상식을 단숨에 배신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우리는 그럴 리 없다’는 마음이다. 규모를 초과하는 위기의 확률은 낮지만 결코 제로는 아니다. 대기업은 몸집을 넘어서는 위기를 맞아도 자본과 신뢰, 시간이라는 여력으로 버텨 낸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그런 위기 단 한 번에 사업 자체가 통째로 사라진다. 잃을 것의 절대 크기는 작아도, 그 한 번의 손실률은 100%가 되기 쉽다. ‘잃을 것이 적다’가 아니라 ‘한 번 맞으면 남은 전부를 잃는다’가 실상이다.

    ‘우리는 이미지도 명성도 없으니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대중적 명성이 없을 뿐, 지방 중소기업도 반드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매출을 좌우하는 소수의 핵심 거래처, 오래 쌓아 온 지역사회의 평판, 인허가와 감독 관청과의 관계, 은행 여신, 그리고 직원과 그 가족의 생계다. 이를 ‘관계 자본’이라 부른다. 위기는 바로 이 소수의 집중된 관계 안에서 터진다. 명성 자산이 없다고 잃을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은 자산의 종류를 잘못 읽는 것이다.

    게다가 ‘무명(無名)이라 안전하다’는 전제 자체도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리뷰 앱과 지역 커뮤니티, 짧은 영상 한 편의 시대에는 평생 대중 이미지를 관리해 본 적 없는 지방 소상공인을 하루아침에 전국적 공개 위기에 노출시킨다. 오히려 평시 쌓아 둔 신뢰가 없는 기업일수록, 단 한 번의 확산 앞에서 더 쉽게 무너진다.

    이미 지방과 중소기업 대표들이 위기관리에 무관심하다는 현실은, 그들에게 위기관리가 필요 없다는 근거처럼 보인다. ‘대기업식 거대한 체계는 필요 없다’는 판단까지는 옳다. 그러나 거기서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로 건너뛰는 순간, 옳은 전제가 틀린 결론으로 뒤집힌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 없는 것은 위기관리라는 준비가 아니라, ‘우리는 예외’라는 무관심이다. 과도한 위기관리가 필요 없는 기업은 있을 수 있어도, 무관심해도 되는 기업은 없다. 무관심은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아니라 ‘준비하지 않기로 내린 결정’이다. 그리고 그 결정의 대가는, 아무 관심이 없는 기업에게 가장 가혹하게 돌아온다.

    답은 ‘필요하냐 아니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무엇을, 누구를 향해, 얼마나’라는 비례의 문제다. 중소기업에 필요한 것은 대기업식 미디어 워룸도, 두꺼운 매뉴얼도 아니다. 큰돈과 인력을 들이지 않고도 갖출 수 있는 네 가지면 충분하다.

    첫째, 최소한의 예방이다. 여기서 예방이란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하고 있는 업무 위에 ‘위기의 눈’ 하나를 얹는 일이다. 현장 안전 점검에서 반복된 지적 사항을 더는 미루지 않는 것, 인허가와 신고, 환경과 노무처럼 ‘설마 문제 되겠어’ 하고 넘겨 온 기본 규정을 다시 확인하는 것, 그리고 자금 흐름에 최소한의 여력을 남겨 두는 것이다. 위기는 종종 사고 그 자체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자금 경색으로 회사를 무너뜨린다.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핵심 인물 리스크다. 오너 한 사람, 혹은 대체 불가능한 기술자 한 사람에게 회사가 과도하게 기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사고나 구설, 갑작스러운 이탈이 그대로 회사의 위기가 된다. 그 의존을 조금씩 분산해 두는 것도 훌륭한 예방이다.

    둘째, 소수 핵심 이해관계자와의 평시 관계다. 종이 한 장을 꺼내, 우리 회사의 생사를 실제로 쥐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적어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대개 그 수는 다섯을 넘지 않는다. 매출의 큰 몫을 차지하는 한두 거래처, 오래 관계를 맺어 온 지역사회와 감독 관청, 자금을 대는 주거래 은행, 그리고 회사를 함께 굴리는 직원들이다. 이 좁은 명단이 곧 위기 시 우리를 살리거나 무너뜨릴 사람들이다.

    평시에 이들과 신뢰를 쌓아 둔 회사는, 위기가 닥쳐도 ‘설명할 창구’와 ‘한 번 더 기다려 줄 여지’를 얻는다. 반대로 평소 소원했던 관계는 위기의 순간 가장 먼저 등을 돌린다.

    셋째, 최악의 시나리오 한두 개를 미리 그려 보는 일이다. 거창한 예측이 아니다. 우리 업종에서 다른 회사가 실제로 겪었던 사고를 가져와, ‘그 일이 우리에게 똑같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를 한 번 대입해 보는 것이다. 학생이 기출문제를 풀어 보듯, 남의 위기는 우리의 가장 좋은 예상 문제다. 그렇게 두어 개의 상황을 정해 두었다면, 그때 누가 회사를 대표해 말할지, 무엇을 가장 먼저 할지, 반대로 무엇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지를 종이 한 장에 적어 두면 된다.

    말하는 창구를 하나로 모으고, 사실을 먼저 확인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을 가장 앞에 두는 것. 이 몇 줄의 약속이 실제 위기의 첫 순간을 좌우한다.

    넷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겐 그런 일이 없다’는 마음을 버리는 일이다. 이것은 돈도 조직도 필요 없는, 가장 값싸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준비다. 확률이 낮다는 것과 아예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이 태도 하나가 앞의 세 가지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스위치가 된다. 그 마음이 닫혀 있으면 어떤 예방도, 어떤 관계도, 어떤 시나리오도 시작되지 않는다.

    모든 기업이 대기업처럼 위기관리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외는 없다’는 만능 필수론은 과장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필요 없다’는 무관심 역시 똑같이 위험한 과장이다. 진짜 답은 두 극단 사이에 있다. 규모에 맞는 최소한의 대비, 그리고 ‘그럴 리 없다’는 마음의 폐기다. 그것은 소방서를 지으라는 요구가 아니라, 소화기 한 대를 곁에 두라는 부탁이다. 위기관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거대한 시스템의 부재가 아니라, 준비하지 않기로 한 그 무관심이다. 지방의 아주 작은 회사라도, 그 한 가지만큼은 예외일 수 없다.

  • 창구일원화란 무엇인가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이 글은 스트래티지샐러드 「위기관리 용어 사전」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 보기

    창구일원화는 위기 상황에서 외부로 나가는 모든 메시지를 지정된 하나의 창구와 책임자를 통해서만 내보내는 원칙을 말합니다. 목적은 커뮤니케이션의 통제가 아니라 일관성 확보입니다. 같은 사안에 대해 회사가 여러 목소리를 내는 순간, 그 불일치 자체가 새로운 기사가 됩니다.

    어디까지가 창구일원화의 범위인가

    언론 대응만 해당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범위는 그보다 넓습니다. 실무에서는 다음을 모두 포함합니다.

    언론의 취재 문의와 인터뷰 요청, 회사가 운영하는 공식 소셜미디어 채널의 위기 관련 게시물, 투자자와 주주의 문의, 규제기관과 정부부처의 공식 문의, 거래처와 유통 채널의 문의, 소비자와 시민단체의 항의 및 입장 요청, 그리고 임직원 대상 내부 공지까지입니다.

    내부 공지가 포함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임직원에게 보낸 메시지는 하루 안에 밖으로 나갑니다. 내부용과 외부용의 내용이 다르면 그 차이가 곧 문제가 됩니다.

    개인적인 발언이라는 구분은 없습니다

    창구일원화가 발령되면 임직원 개인이 언론이나 소셜미디어, 지인을 통해 위기 관련 내용을 말하거나 게시하는 것은 금지됩니다.

    이 원칙이 엄격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기자와 말을 섞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하는 모든 발언은 회사의 공식 메시지로 받아들여집니다. 개인적인 생각이라거나 아는 범위에서 말한다는 구분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받는 쪽에서는 회사 사람이 한 말일 뿐입니다.

    그래서 실무 지침은 단순하게 정합니다. 문의를 받으면 답하지 말고 상대의 성명과 소속, 연락처를 파악해 담당 부서로 전달할 것. 이 한 줄이 전 임직원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창구를 좁힐수록 정보는 더 필요해집니다

    창구일원화를 실패하게 만드는 가장 흔한 원인은 정보 부족입니다. 창구는 좁혔는데 그 창구에 정보를 주지 않으면, 담당자는 답할 것이 없어 침묵하게 되고 결국 다른 경로가 열립니다.

    창구를 하나로 모으는 결정에는 그 창구에 사실관계를 신속히 전달하는 체계가 따라와야 합니다. 현장에서 확인된 내용이 담당 부서에 도달하는 경로가 없으면 창구일원화는 형식으로만 남습니다.

    대변인 지정과 함께 작동합니다

    창구일원화가 부서 차원의 원칙이라면, 대변인 지정은 사람 차원의 결정입니다. 어느 부서로 문의를 모을지와 그 부서에서 누가 얼굴을 내놓을지는 함께 정해져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정해진 조직은 실제 상황에서 멈춥니다. 창구는 있는데 말할 사람이 없거나, 말할 사람은 있는데 문의가 여러 부서로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더 읽어 보실 자료

    대변인이란 무엇인가: 창구를 맡는 사람의 역할입니다.
    예상질의응답팩이란 무엇인가: 창구가 준비해 두는 답변 자산입니다.
    홀딩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 창구가 내보내는 첫 발화입니다.
    정용민의 미디어 트레이닝

  • 우리 같은 조그만 회사도 위기관리를?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저희 회사는 지방에서 사업을 하는 조그만 중소기업입니다. 직원도 100명이 채 안 되고요. 지역에서는 오래된 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유명하거나 큰 기업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기업에게 위기관리 체계와 역량을 계속 강조하시던데, 저희 같은 규모의 회사도 그렇게 해야 할까요?”

    먼저 대표님이 ‘위기관리’라는 개념을 어떻게 그리고 계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아마도 대기업의 홍보실과 두꺼운 매뉴얼, 별도의 예산과 조직 같은 것을 떠올리고 계실 겁니다. 만약 위기관리가 그런 것이라면, 대표님 회사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점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표님 회사에 필요한 위기관리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질문 속에 이미 답의 실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대표님은 “지역에서 오래된 회사로 알려져 있다”고 하셨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수십 년 걸쳐 지역에서 쌓아 온 그 신뢰가, 대표님 회사가 가진 가장 값진 자산입니다. 유명하지 않다는 것과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오래 공들여 쌓은 신뢰일수록, 한번 금이 가면 회복에 몇 배 시간이 걸립니다. 대기업의 명성은 광고로도 사지만, 지역의 오래된 신뢰는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위기관리란 무엇일까요. 거창하게 볼 것이 없습니다. 그 오래된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는 일, 그것이 대표님께 필요한 위기관리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대표님은 이미 그 일을 매일 하고 계십니다. 현장의 안전을 살피고, 거래처와의 약속을 지키고, 직원들의 사기를 챙기고, 자금이 막히지 않도록 신경 쓰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위기관리입니다. 대표님은 이미 이 회사의 위기관리 책임자이신 셈이지요.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일을 ‘무의식적으로, 마주치는 대로’ 하고 계실 뿐입니다. 위기관리라고 부를 만한 것은, 그 일을 ‘의식적으로, 미리’ 하는 것입니다. 그 작은 차이가 위기의 순간에는 생각보다 큰 격차를 만듭니다.

    지금까지 큰 탈 없이 회사를 잘 이끌어 오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위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운이 좋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위기가 아예 없는 회사는 세상에 없습니다. 다만 그 위기가 아직 대표님을 찾아오지 않았을 뿐이지요. ‘지금까지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겠지’라는 생각이야말로, 작은 회사를 가장 위태롭게 만드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제가 권해 드리는 것은 거창한 준비가 아닙니다. 우리 회사에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한두 가지를 평온한 지금 미리 떠올려 보시는 것, 그때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지를 마음속에 그려 두시는 것, 그리고 회사의 앞날을 쥔 몇몇 사람과 평소 신뢰를 두텁게 해 두시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돈이 드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한 번 먹는 일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위기관리는 회사를 크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오래 지켜 온 것을 지키는 일입니다. 대표님 회사는 유명하지 않아서 위기관리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오래 신뢰받아 왔기에 더더욱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규모가 작다는 것은 위기관리를 건너뛰어도 되는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더 조심히 지켜야 할 이유인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