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위기관리 원칙

  • 위기와 위기관리 속에는 사람이 있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위기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위기를 일으키는 것도 사람이고, 그 위기를 힘겹게 수습해 나가는 것도 사람이다. 위기를 둘러싸고 그것을 더 큰 재앙으로 키우는 것 역시 사람들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답은 한결 분명해진다. 사람이 없는 곳에는 위기도 없다. 이것은 위기관리에서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렇기에 위기관리를 제대로 해내고 싶은 기업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원칙은 사실 위기관리 매뉴얼의 뼈대에도 새겨져 있다. 잘 만들어진 매뉴얼이 던지는 첫 질문은 언제나 ‘누가(who)’다. 누가 이 사안을 판단하는가, 누가 회사를 대변하는가, 누가 피해를 입었고 누가 분노하고 있는가, 누가 영향력을 쥐고 있는가. 위기를 대비하는 일의 상당 부분도 결국 사람의 일로 채워진다. 임직원과 함께 땀 흘리는 훈련과 시뮬레이션이 그 한가운데 있고, 위기 유형별로 이해관계자와 영향력자, 곧 사람들을 미리 살피고 관계를 다져 두는 일이 그 나머지를 이룬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 히에로클레스의 통찰을 참고해 보자. 그는 ‘오이케이오시스(Oikeiosis)’, 우리말로 옮기면 ‘내 것으로 여김’ 정도가 될 개념을 동심원으로 설명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한가운데 두고, 그 바깥으로 가족과 이웃, 동료 시민, 그리고 마침내 온 인류로 이어지는 여러 겹의 원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가 권한 삶의 태도는 이러했다. 저 바깥쪽 원에 있는 사람들을 조금씩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마치 가까운 이처럼 여겨 보라는 것이다.

    이 동심원이 바로 위기 시 이해관계자 관리 지도다. 가장 안쪽에 경영진과 조직이 있고, 그 다음 원에 임직원이, 이어 협력사와 거래처가, 그리고 고객과 지역사회가, 맨 바깥에 더 넓은 사회와 여론이 겹겹이 놓인다. 위기를 맞은 기업이 해야 할 일도 히에로클레스의 조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 바깥 원의 사람들까지 안쪽으로 끌어당겨, 그들의 감정과 시선을 내 일처럼 헤아려 보는 것이다. 이 지도를 평온한 시절에 미리 그려 둔 기업과, 위기가 터진 뒤에야 ‘누가 있었더라’ 하고 뒤늦게 헤매는 기업의 걸음걸이는 첫날부터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사람’의 양면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는 ‘명상록’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니 그들을 가르치든지, 아니면 견뎌내라.” 짧지만 위기관리의 본질을 관통하는 말이다. 사람은 때로 참고 견뎌야 할 골칫거리이면서도, 결국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해법이라는 뜻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도 그렇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사람이고, 그 문제를 더 크게 키우는 것도 사람이지만, 끝내 그 문제를 풀어낼 열쇠를 쥔 것 또한 사람이다. 사람이 곧 문제이며, 동시에 사람이 곧 해법이다.

    반면 돈과 숫자만 들여다보거나,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좇거나, 자기 느낌과 확신에만 기대어 판단할 때, 정작 그 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들은 슬그머니 시야에서 사라진다. 준비도, 의사결정도, 대응도 사람을 향하고 있을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법이다.

    위기관리는 이렇듯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향한 일이다. 숫자 뒤에, 현상 뒤에, 그리고 나의 확신 뒤에 가려진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위기 속에 사람이 있고, 위기관리 속에도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데서 위기관리는 비로소 시작되고, 또 그렇게 마무리된다.

  • 왜 불완전한 사과도 효과가 있을까?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더피알=정용민|최근 기업 위기 현장에서 묘한 장면이 반복된다. 한참 늦었고, 표현도 군데군데 부적절하고, 책임 인정과 재발 방지 약속마저 어딘가 허전한 사과가, 그럼에도 논란을 비교적 빠르게 가라앉히는 장면이다. 원칙대로라면 불완전한 사과는 제대로 된 효과를 낼 수 없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자꾸 어긋난다. 이런 장면을 몇 번 목격한 실무자들은 이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런 의문은 최근 상황에서 당연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위험하다. 한 발만 더 나가면 “어차피 운과 분위기가 좌우한다면 사과는 적당히 형식만 갖춘 통과의례 아닌가”라는 냉소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실무자가 이미 사과를 그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냉소는 한 가지 결정적인 구분을 놓친 데서 비롯된다. 바로 ‘불완전한 사과’에도 전혀 다른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불완전한 사과는 겉으로는 다 비슷해 보이지만, 열어 보면 두 종류로 갈린다. 하나는 ‘구겨진 상자’다. 겉면이 찌그러지고 모양이 빠졌을 뿐, 그 안에는 책임 인정과 진심, 구체적인 시정이라는 알맹이가 멀쩡하게 들어 있는 사과다. 말이 좀 거칠었고, 타이밍이 늦었고, 전달이 어설펐던 정도다. 사람들은 구겨진 겉상자는 너그럽게 용서한다. 상자의 값어치는 겉모양이 아니라 그 안의 내용물에서 나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런 사과가 통하는 것은 당연하다. 완벽하진 않아도 제 몫은 하는, 이른바 ‘그럭저럭 괜찮은(good-enough) 사과’다. 우리가 ‘불완전한데도 효과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례의 상당수가, 실은 겉만 구겨졌을 뿐 알맹이는 온전했던 이 유형이다.

    다른 하나는 ‘빈 상자’다. 겉포장은 번드르르하고 리본까지 묶였는데, 막상 열어 보면 비어 있다. 책임은 슬그머니 회피하고, 가해자의 해명과 자존심이 사과보다 앞서며, 시정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려진다. 알맹이가 없는 사과다. 원칙대로라면 이런 사과는 절대 통해선 안 된다. 그런데도 가끔 논란이 가라앉는다. 바로 여기서 실무자의 착시가 시작된다. 빈 상자를 건넸는데 상대가 화를 풀었으니, ‘빈 상자도 괜찮구나’라고 잘못 배우는 것이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모든 오해의 뿌리다. 그래서 현장 실무자들이 사과에 대해 흔히 품는 일곱 가지 오해를, 이 구분을 기준으로 하나씩 짚어 보고자 한다.

    “사과문 한 장 잘 내면 기사도 줄고 댓글도 식는다. 결국 사과란 이 소란을 멈추는 일 아닌가?”

    사과를 불 끄는 소화기로만 본다. 그러나 불에는 두 종류가 있다. 활활 타오르는 겉불과, 그 아래 숯처럼 남아 오래 가는 속불이다. 어설픈 사과로도 겉불, 즉 기사와 댓글의 불길은 잡을 수 있다. 문제는 속불이다. 훼손된 신뢰라는 속불은 겉이 잠잠해진 뒤에도 재 속에서 빨갛게 살아 있다. 소화기로 겉불만 끄고 ‘불 껐다’며 돌아서는 기업은, 며칠 뒤 같은 자리에서 다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사과의 진짜 임무는 겉불 진화가 아니라 속불 진화다.

    “지난번 그 회사도 사과는 엉망이었는데 결국 잠잠해졌잖아. 사과의 완성도가 그렇게 중요한가?”

    가장 위험한 오해다. 빈 상자를 건넸는데도 상황이 잠잠해졌다면, 그것은 사과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운’이 대신 해 준 것이다. 시간이 흘렀거나, 더 큰 뉴스가 터졌거나, 충성 고객이 많았거나, 회사가 워낙 커서 버틸 체력이 있었을 뿐이다. 이는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나갔는데 마침 처마 밑으로만 걸어 비를 피했다고 해서, ‘우산은 필요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격이다.

    게다가 사과는 운 옆에 가만히 앉은 들러리가 아니다. 제대로 된 사과는 그 운을 직접 만들어낸다. 좋은 사과는 언론이 기사를 거두게 하고, 충성 고객을 붙들며, 비판자에게 빌미를 주지 않는다. 반대로 빈 상자 사과는 스스로 악운을 부른다. 사과 자체가 또 다른 기삿거리가 되고, 조롱의 소재가 되며, 비판자에게 새 탄약을 쥐여 준다. 빈 상자가 통했다면 운이 좋았던 것이고, 구겨진 상자가 통했다면 그 안의 알맹이가 운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타이밍을 잘 잡아 그럴듯하게 연출해서 한 방에 터뜨리면 분위기가 확 바뀐다.”

    빈 상자를 화려한 포장으로 덮으려는 발상이다. 그러나 연출된 사과는 잠깐의 침묵은 살 수 있어도 신뢰는 사지 못한다. 요즘 대중은 사과의 무대 조명을 보면서 그 뒤의 계산까지 함께 읽는다. 공들인 연출일수록, 그 속내가 들통나는 순간의 역풍은 더 사납다. 사과는 남을 향해 쏘아 올리는 한 발의 폭죽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회사인가’를 스스로 써 내려가는 선언문이다. 폭죽은 터지는 순간 가장 화려하고, 곧바로 차갑게 식는다.

    “사과문을 더 절절하게, 눈물 한 방울 쏙 빠지게 다듬자.”

    진정성은 문장을 다듬어 짜낸다고 생기지 않는다. 진정성은 말이 아니라, 그 말 앞에 놓인 행동에서 새어 나온다. 피해를 실제로 복구했는지, 보상이 구체적인지, 재발을 막을 조치가 손에 잡히는지가 먼저다. 옳은 행동이 9할이고 그에 대한 말은 1할이다. 행동이라는 9할을 비운 채 말이라는 1할만 화려하게 꾸미는 사과는, 알맹이 없이 리본만 예쁜 빈 상자일 뿐이다. 사과문의 미사여구를 손보기 전에, 보상안의 빈칸부터 채워야 한다.

    “급할 것 없다. 충분히 검토하고 완벽하게 다듬어서 내보내자.”

    지연된 사과가 그럭저럭 넘어간 사례를 보고 타이밍을 사소하게 여긴다. 그러나 사과에서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가 또렷한 메시지다. 사과가 늦어진 만큼 사람들은 ‘버티다가 떠밀렸구나’, ‘계산하느라 늦었구나’라고 읽는다. 식어 버린 음식은 원래 맛과 다르다. 늦었는데도 통한 듯 보였다면, 그건 식은 음식을 손님이 배가 고파 그냥 먹어 준 것일 뿐이다. 적시성은 사과의 곁가지가 아니라 재료의 일부다.

    “우리가 이만큼 고개를 숙였으면 됐지, 뭘 더 바라나?”

    완전한 사과와 빈 상자를 가르는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누구를 바라보는가’이다. 제대로 된 사과는 상처받은 상대를 바라본다. 그가 무엇에 아팠고 무엇을 듣고 싶은지에서 출발한다. 빈 상자 사과는 거울을 바라본다. ‘사과하는 나’의 입장, 억울함, 체면이 한가운데 놓인다. 최고의사결정자의 개인적 속내나 서운함이 사과문에 끼어드는 순간,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두 번째 상처가 된다. 사과라는 선물의 주인은 건네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다.

    “책임을 인정하면 소송에서 불리하다. 표현은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가자.”

    빈 상자가 만들어지는 가장 흔한 통로가 바로 이 법적 방어 논리다. 법적 위험을 챙기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책임을 요리조리 피한 모호한 사과는 받는 사람에게 ‘사과가 아니라 변명’으로 읽히고, 줄이려던 여론의 불길을 오히려 키운다. 법정에서 한방으로 이기려다 광장에서 열방을 먼저 얻어 맞는 셈이다. 법무의 방패와 평판의 회복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손에 함께 쥐고 균형을 잡아야 할 두 개의 공이다.

    결국 사과의 값어치는 날씨에 비유하면 분명해진다. 날씨는 못 바꿔도 외투는 챙길 수 있다. 햇볕이 좋았다고, 폭풍이 너무 거셌다고 외투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똑같은 날씨라면 외투를 챙긴 쪽이 늘 덜 고생한다. 사과는 위기라는 궂은 날씨 속에서 기업이 챙길 수 있는 유일한 외투다.

    그래서 사과는 보험을 닮았다. 우리는 보험의 가치를 ‘어차피 올해 집에 불 안 났잖아’로 따지지 않는다. 운이 좋으면 빈 상자로도 한 번은 넘어간다. 그러나 운이 나쁜 날을 대비하는 것, 그것이 사과가 존재하는 이유다.

    불완전한 사과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실패’가 아니다. 빈 상자가 운 좋게 통해 버리는 ‘성공’이다. 그 한 번의 요행이 조직에 가장 나쁜 교훈을 새기기 때문이다. “사과는 알맹이 없이 겉만 그럴듯하면 된다, 나머지는 분위기가 해결해 준다.” 이 학습이 쌓이면, 기업은 위기에서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능력, 곧 ‘제대로 사과하는 힘’을 스스로 녹슬게 만든다. 그렇게 능력이 텅 빈 자리에 정작 운 나쁜 위기가 찾아오는 날, 기업의 손에는 운도 사과도 없이 빈 상자 하나만 남는다.

    게다가 빈 상자 사과가 남긴 신뢰의 빈자리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외상값처럼 장부에 차곡차곡 적힌다. 그리고 다음 위기 때 ‘그때도 그러더니’라는 이자까지 얹어 한꺼번에 청구된다. 빈 상자로 불을 껐다고 믿는 기업은, 실은 불을 끈 것이 아니라 다음 화재의 불씨를 곳간에 쌓아 둔 것이다. 불완전한 사과가 통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이, 기업이 가장 비싼 청구서에 외상으로 서명하는 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2. 위기 앞에서 분노를 내려놓는 세 가지 방법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위기 현장에서 경영진으로 부터 가장 자주 목격하는 감정이 있다. 분노다. 위기 대응 회의실에서 고성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 전화기 너머로 전달되는 날선 분노, 침묵 속에 응축된 차가운 분노. 형태는 달라도 본질은 같다. 통제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경영진의 저항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기업 위기는 대체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가.

    위기는 경영자가 분노할 ‘대상’이 아니다. 위기는 풀어야 할 ‘숙제’다. 숙제 앞에 앉은 학생이 화를 낸다고 문제가 풀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화를 내는 동안 시간이 흘러가고, 판단이 흐려지고, 골든타임이 소진된다. 위기관리에서 분노는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만 더 악화시킨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2000년 전에 이미 이것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는 저서 ‘화에 대하여(De Ira)’에서 이렇게 말했다. “분노는 일시적 광기다(Ira furor brevis est).” 분노한 상태의 인간은 이성을 잃은 상태라는 것이다. 눈빛이 흔들리고, 얼굴이 붉어지고, 말이 거칠어진다. 세네카는 이것이 광기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광기가 오래 지속되느냐, 잠깐 지속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위기 현장에서 분노한 경영진이 내린 결정들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필자는 수없이 목격했다. 그 분노가 없었더라면 하지 않았을 말들, 내리지 않았을 지시들, 취하지 않았을 행동들. 분노는 판단을 흐리고 조직을 흔든다. 경영자가 분노하는 순간 조직 전체가 그 분노의 파장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실무진은 옳은 판단보다 경영자의 분노를 잠재울 반응을 먼저 찾기 시작한다. 전략적 대응이 아니라 감정적 반응이 조직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더 위험한 것은 분노한 경영자가 그 분노를 정당하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세네카는 이것이 분노의 가장 교활한 속성이라고 했다. 분노는 스스로를 의로운 감정으로 위장한다.

    만약 위기 앞에서 경영자가 반드시 화를 내야 한다면, 그 화는 딱 하나의 방향으로만 향해야 한다. 이 위기를 평시에 대비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화, 그리고 준비의 중요성에 무관심했던 조직에 대한 화다. 그 화만이 생산적이다.

    그 화만이 다음 위기를 막는 에너지가 된다. 언론을 향한 화, 이해관계자를 향한 화, 상황 자체를 향한 화는 모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세네카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파도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분노의 처방은 하나다. 지금 내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리는 것. 분노는 의식되지 않을 때 가장 강하고, 의식되는 순간 힘을 잃기 시작한다.

    아,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구나. 이 짧은 자기 인식이 분노가 판단을 지배하는 것을 막는 첫 번째 방어선이다.

    위기는 숙제다. 숙제는 그냥 풀어야 한다. 분노는 그 숙제를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핵심요약

    1. 분노가 느껴지는 순간 즉각 반응하지 말고, 먼저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라.

    2.언론, 이해관계자, 상황 자체를 향한 분노는 내려놓고, 그 에너지를 통제 가능한 대응 실행에만 집중하라.

    3. 만약 화를 내야 한다면 이 위기를 평시에 대비하지 못한 자신과 조직을 향해 내고, 그 화를 다음 위기를 막는 준비의 동력으로 전환하라.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피플워치에 연재한 [정용민의 CEO 탐구생활] 칼럼입니다. 원문: 피플워치

  • 6. 기업 위기관리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CEO를 위한 스토익(Stoic) 위기관리 원칙

    첫째, 위기 대응 역량은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반복된 훈련으로 길러지는 기술이다.

    둘째, 예상되는 위기 상황을 평시에 실제처럼 반복하여 몸에 익혀라.

    셋째, 훈련을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조직의 일상적 규율로 정착시켜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 이렇게 적었다. “삶의 기술은 춤보다 레슬링에 가깝다. 정해진 안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일격에 맞서 늘 준비된 자세로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위기관리도 그렇다. 위기는 잘 짜인 안무처럼 순서대로 오지 않는다. 예고 없이, 변칙적으로, 가장 취약한 곳을 노리고 들어온다. 그래서 위기 대응은 대본을 암기하듯 되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훈련된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듯, 조직이 평소 길들여 둔 습관과 절차가 그 순간 작동해야 한다. 레슬러는 상대의 다음 동작을 일일이 예측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어떤 변칙이 들어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몸을 미리 단련해 두었기에 버티는 것이다.

    훈련되지 않은 기업이 위기를 맞으면 어떤 모습이 되는가. 오합지졸이라는 표현 그대로다. 누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모른 채 미루고, 사실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각각 입을 열고, 사과의 타이밍을 놓치고, 해서는 안 될 말을 기자 앞에서 내뱉는다. 돌이켜 보면 대단한 전략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들이 지켜지지 않았을 뿐이다. 정상적인 훈련을 한 번이라도 거친 조직이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사려 깊지 못한 실수와 황당한 대응이 위기를 더 키운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이 평시에 경험해야 할 위기관리 목적의 훈련은 무엇인가. 가장 일반적인 것이 미디어트레이닝이다. 그리고 이해관계자 커뮤니케이션 트레이닝, 위기관리 시뮬레이션, 대변인 트레이닝이 그 뒤를 잇는다. 나아가 고객, 정부, 기관, NGO, 지역 주민, 투자자, 노조 등 각 접점에서 벌어질 상황을 가정한 이해관계자 접점 시뮬레이션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안전 대피 훈련, 해킹 방어 훈련처럼 부서별 책임과 역할에 직결된 주제별 대응 훈련은 더욱 기본에 속한다. 이러한 훈련에 관심이 없거나, 기회가 없거나, 늘 부족한 상태로 위기를 맞는 기업은 그 대가를 고스란히 현장에서 치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에픽테토스는 “어려움이야말로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낸다”고 했다. 그는 레슬링 코치 비유를 하기도 했다. 신은 마치 거친 상대와 우리를 짝지어 주는 코치와 같아서, 그 힘겨운 상대를 통해 우리를 단련시킨다는 것이다. 단, 그는 분명히 덧붙였다. “그것은 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위기라는 거친 상대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면, 그 이전에 흘려 두어야 할 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훈련은 거창한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에픽테토스는 또 이렇게 권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너 자신을 훈련하라. 그리고 거기서부터 더 큰 것으로 나아가라.” 위기관리 훈련도 마찬가지다. 한 번의 대규모 모의훈련을 이벤트처럼 치르고 끝낼 일이 아니다. 작은 상황 대응부터 반복적으로 몸에 새겨 두는 것이 핵심이다. 반복된 훈련은 위기의 순간, 판단의 속도와 정확성으로 되돌아온다. 이미 여러 번 겪어 본 상황과, 그 자리에서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은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훈련의 진짜 목적은, 예기치 못한 일격이 들어왔을 때 조직이 공황에 빠지지 않고 기본을 지키도록 만드는 데 있다. 화려한 묘수가 위기를 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기본기를 갖춘 조직이 황당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위기의 절반은 관리된다.

    춤추는 자는 정해진 음악이 멈추면 길을 잃는다. 그러나 단련된 레슬러는 상대가 어떤 변칙을 걸어와도 무너지지 않는다. 기업 위기관리에도 훈련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평시에 흘린 땀이, 위기의 순간 조직을 지탱하는 훌륭한 근력이 된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피플워치에 연재한 [정용민의 CEO 탐구생활] 칼럼입니다. 원문: 피플워치

  • 7. 미루는 사이, 골든타임은 흐른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CEO를 위한 스토익(Stoic) 위기관리 원칙

    첫째, 위기는 무지가 아니라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둘째, 진짜 골든타임은 위기가 터진 뒤가 아니라 그 이전 평시에 흐르고 있다.

    셋째, 방관,방치,방목을 멈추고, 미루어 둔 숙제를 오늘 시작하라

    세네카는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하는 것이다” 인생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짧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는 한마디를 더 덧붙인다. “우리가 미루는 사이, 삶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이 통찰은 2천 년의 시차를 건너 오늘날 기업 위기관리의 한복판에 그대로 꽂힌다.

    많은 경영진이 ‘골든타임’을 위기가 터진 직후의 몇 시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진짜 골든타임은 그 이전에,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평시에 이미 흐르고 있다. 위기를 막고 대비할 시간은 위기가 발생하기 한참 전부터 매일같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을 우리는 무엇으로 보내고 있는가. 대부분은 ‘미루기’로 보낸다. 세네카의 말처럼, 오늘을 잃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은 ‘내일이면 되겠지’ 하는 기대다.

    위기는 왜 발생하는가. 흔히 세 가지 ‘방’ 때문이라고 말한다. 방관, 방치, 그리고 방목이다. 위험의 신호를 보고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는 방관, 알면서도 손대지 않고 내버려 두는 방치, 아무런 관리 없이 그저 풀어놓는 방목이다. 주목할 점은 이 셋 중 어느 것도 ‘몰라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기는 무지(無知) 때문이 아니라 무관심(無關心) 때문에 발생한다. 답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미루어 둔 것이다.

    이것은 밀린 숙제와 같다. 해야 할 숙제가 무엇인지 학생도 안다. 다만 하지 않을 뿐이다. 심지어 가장 효과적인 시험 공부인 기출문제 풀이, 즉 다른 기업이 먼저 겪은 위기를 들여다보고 벤치마킹하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위기가 정말 무섭냐고 물으면, 솔직한 속내는 ‘무섭다’가 아니라 ‘귀찮고 골치 아프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아니라 성가심. 바로 이 심리가 기업으로 하여금 준비도, 예측도 없이 골든타임을 흘려보내게 만든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미루는 마음을 가장 날카롭게 경계했다. 에픽테토스는 제자들을 다그쳤다. “언제까지 너 자신에게 최선을 요구하기를 미룰 것인가. 너는 이제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그 시작으로 삼으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시 같은 말을 남겼다. “만 년을 살 것처럼 굴지 말라.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동안, 지금 선한 사람이 되라” 미루지 말고 지금 하라는 것, 그것이 그들이 평생 붙들었던 한 문장이다.

    기업 위기관리도 마찬가지다. 미루어 둔 숙제는 위기라는 시험 당일에 반드시 심각한 성적표로 돌아온다. 그제야 부랴부랴 펜을 들어 보지만, 골든타임은 이미 다 흘러간 뒤다. 위기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위기를 자꾸 뒤로 미루는 그 마음이 무서운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기업의 골든타임은 조용히 흐르고 있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피플워치에 연재한 [정용민의 CEO 탐구생활] 칼럼입니다. 원문: 피플워치

    관련 개념 · 위기관리 골든타임이란 무엇인가

  • 자극 없는 자극은 소멸한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한 기업의 질문

    “최근 한 업계의 담합 사실이 적발되어 크게 논란이 되는 상황을 모니터링 중인데요. 그 담합 제품을 받아 오래 사업해 온 곳에서 언론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담합 기업들에게 손해배상을 받아야겠다는 거죠. 저희가 볼 때는 그 회사들이 그런 자극에 대응해도 실익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시나요?”

    컨설턴트의 답변

    위기관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짚어야 할, 아주 근본적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만으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사실입니다. 위기는 말로 풀리지 않습니다. 실제 행동과 커뮤니케이션이 함께 갈 때, 비로소 위기관리, 더 정확히 말하면 데미지 컨트롤(damage control)정도가 겨우 가능해질 뿐이지요.

    애초에 사후 위기관리에는 ‘성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위기가 발생한 그 순간, 위기관리는 이미 절반 이상 실패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피해를 줄이기 위한 데미지 컨트롤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데미지 컨트롤 안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해낼 수 있는 몫은 생각보다 훨씬 제한적입니다.

    질문하신 다른 업계 상황도 본질은 같습니다. 담합이 적발된 회사들을 향해 거래처들이 손해배상을 외치며 대대적인 언론전을 펼치고 있다 하더라도, 그 회사들이 커뮤니케이션으로 맞대응 해 얻을 실익은 없습니다. 효과도 없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말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담합이라는 행위와 그로 인한 실제 피해, 그 자체가 본질인 사안에 말의 응수를 더하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드실 겁니다. 그렇다면 회사들은 ‘그저 침묵한 채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먼저 ‘침묵’입니다. 대응 실익이 없는 상황에서는,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때 ‘낫다’는 것은 옳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설프게 커뮤니케이션에 나서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조금이라도 낫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침묵이란 언론이나 매체를 통해 공중을 향해 메시지를 내보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공개 대응은 실익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잠잠해지려던 언론의 관심과 거래처의 분노를 계속 자극할 뿐입니다.

    자극 없는 자극은 소멸합니다. 상대가 던진 자극에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자극은 갈 곳을 잃고 스스로 사그라듭니다. 그런데 ‘대응’이라는 명분으로 맞자극을 더하는 순간, 최초 자극을 시도했던 거래처는 더 큰 명분과 에너지를 얻어 그 공세를 더 오래, 더 강하게 키워 나가게 됩니다. 불은 끄겠다고 휘저을수록 더 거세지는 법이지요. 도전에 일일이 응전하지 않는 것, 그것 역시 하나의 전략, 곧 전략적 침묵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전략적 침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공개적으로 말을 아끼는 그 시간에도, 거래처와의 수면 아래 협의와 논의는 멈추면 안 됩니다. 겉으로 조용한 기업이 물밑에서는 오히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공개 대응을 멈추는 것과 문제 해결을 멈추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진짜 위기관리는 늘 조용한 수면 아래에서 이루어집니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이코노믹리뷰에 연재한 [기업이 묻고 위기관리 컨설턴트가 답하다] 칼럼입니다.

  • 보여지는 게 중요하다고요?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한 기업의 질문

    “어떻게 보여지는지가 실제로 중요합니까? 아니면 무엇을 제대로 하는지가 중요합니까? 윗분들은 항상 남들이 어떻게 볼지에 대해 과도하게 고민할 시간에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를 살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저희가 볼 때 이게 평시와는 다른 위기상황에서는 좀 의미가 다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컨설턴트의 답변

    모든 말씀들이 다 맞습니다. 무엇을 제대로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 경영의 본질에서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임원분의 질문 의미도 정확합니다. 위기 상황에서는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상당히 많이 달라집니다.

    위기란 무엇입니까? 무언가를 제대로 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 위기입니다.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위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위기 상황에서 “무엇을 제대로 하는 것”은 이미 전제가 흔들린 상태입니다. 디폴트, 즉 기본값이 이미 부실해진 상황인 것이죠. 그 부실의 문제를 관리하는 전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를 예측하고 설계하는 것이 바로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역할입니다.

    아무리 잘해도 그대로 보여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로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으로 보여지면 더욱 심각한 상황인 것이죠. 이것은 단순한 오해의 문제가 아닙니다.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이 정교하게 설계되지 않았을 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남들의 시각에 연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보다 선제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보여질 것인지를 설계하고 그것을 실행에 연결시키라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대한 예측 능력은 사실 공감 능력과 같습니다. 이해관계자의 시각에서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의 출발점입니다.

    중세의 마녀사냥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어떻게 보여질지에 대한 인식이나 노력이 부족했던 사람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마녀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사냥감이 된 사람의 비율이 대다수는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마녀사냥의 재물이 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마녀처럼 굴지 않는 것이면서, 동시에 마녀처럼 보여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훈은 지금 기업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위기 상황에서 기업이 실제로 올바른 일을 하고 있어도, 그것이 이해관계자들에게 올바르게 보여지지 않는다면 그 노력은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반대로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를 먼저 설계하면, 실행의 방향과 우선순위도 자연스럽게 정렬됩니다. 무엇을 먼저 하고, 어떤 방식으로 하고, 누구에게 어떤 언어로 전달할 것인지가 구체화됩니다.

    최근 기업 위기관리에서 어떻게 보여지는가의 문제는 시작이자 끝입니다. 위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해관계자들은 이미 그 기업을 보고 있습니다. 그 시선은 기업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그 시선을 방치할 것인지, 아니면 선제적으로 설계할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아주 중요한 선택이지요.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이코노믹리뷰에 연재한 [기업이 묻고 위기관리 컨설턴트가 답하다] 칼럼입니다.

  • 경영이냐? 관계냐? 그것이 문제?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한 기업의 질문

    “저는 투자사업부서 임원인데요. 홍보실에 불만이 많습니다. 일부 온라인매체에 익명 소스발로 저희 투자내용 관련 루머들을 기사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때마다 저는 강력하게 대응하자 하는데, 홍보실은 관계도 중요하다며 대응에 수동적입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컨설턴트의 답변

    사업부와 홍보실, 사실 둘 다 틀린 말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익명 소스발 루머 기사에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사업부의 주장도 이해가 됩니다. 언론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홍보실의 입장도 현실적입니다. 문제는 이 두 입장이 충돌할 때마다 매번 같은 논쟁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복 자체가 이미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이런 상황이 자꾸 발생한다면, 그것은 사업부와 홍보실 중 누가 옳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최고경영진이 명확한 방향성과 원칙을 세우지 않았다는 신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익명 소스를 통해 반복적으로 시장 루머가 기사화되고, 그것이 실제 투자 사업에 타격을 주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어떻게 됩니까.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 루머로 인한 손실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손실이 확정된 이후에는 회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응의 기준은 손실이 실제로 발생하는 시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손실 가능성이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원칙에 따라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부적으로 먼저 합의되어야 할 방향입니다.

    그 합의의 핵심은 일관성입니다. 이럴 때는 대응하고, 저럴 때는 모른 척하고, 이 매체는 건드리지 않고, 저 매체에는 강하게 나가는 식의 비일관성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일관성 없는 대응은 언론에게 잘못된 신호를 줍니다. “이 회사는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는 인식이 생기면, 루머성 기사는 더 빈번해질 수 있습니다.

    원칙은 단순하고 명확해야 합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사실과 다른 내용이 기사화된다면, 홍보실이 일차적으로 정확한 사실관계를 반영시키기 위해 움직입니다. 해당 매체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다음 단계는 법적 대응입니다. 소송의 대상과 규모 역시 일관된 기준으로 적용합니다. 예외를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의 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원칙을 홍보실이 혼자 세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업부가 밀어붙인다고 해서 관철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최고경영진의 영역입니다. 최고경영진이 원칙과 방향에 먼저 합의하고, 대응 수위를 사전에 설정해 두어야 합니다. 그 위에서 사업부와 홍보실이 같은 방향으로 정렬될 수 있습니다.

    홍보실이 말하는 “관계”도 사실 이 원칙 안에서 관리되어야 합니다. 관계를 이유로 원칙을 흔드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마찰을 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루머성 기사를 허용하는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반복적으로 회사에 데미지를 끼치는 매체와의 관계는, 경영적 시각에서 냉정하게 재정의되어야 합니다.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피해를 감수한다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이코노믹리뷰에 연재한 [기업이 묻고 위기관리 컨설턴트가 답하다] 칼럼입니다.

  • 사과문을 꽤 잘 썼네요?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한 기업의 질문

    “최근 사회적 관심의 중심에 있는 한 기업 대표가 발표한 사과문을 보았습니다. 사과의 이유, 공감, 해법, 개선책 등 사과문의 정석을 보는 듯했습니다. 사과문이 이렇게 제대로 만들어져 발표되었으니, 이제 어느 정도 위기관리가 마무리 수준에 들었다고 보아도 되겠지요?”

    컨설턴트의 답변

    기업 위기관리에서 가장 흔히 오해되는 주제가, ‘사과가 곧 위기관리’라는 개념입니다. 이런 단순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추측하는 것은 이전 여러 기업이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려 하고, 사과문을 발표해도 그 품질이나 구성이 확연하게 떨어졌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 이유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합니다. 사람들이 그런 기업을 목격해 오다가, 어느새 부터 신속하게 먼저 사과하고, 멋지게 사과문을 만들어 발표하는 곳들이 나타나자 ‘사과’가 곧 위기관리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일부에서는 기업의 사과 커뮤니케이션을 인간 개인의 사과 커뮤니케이션과 동질의 것으로 보면서, 인간적 사과를 기업의 사과 형식에 그대로 대입하려 해서 그런 생각이 만들어지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주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인간 개인의 사과와 기업의 사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주제입니다.

    인간 개인이 하는 사과와 기업이 ‘해야만’ 하는 사과는 고민의 차원이 다릅니다. 앞의 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당위나 윤리에 기반한다면, 뒤의 것은 실익과 전략에 상당부분 기반합니다. 기업의 위기관리가 전략적이며 정치적 행위라는 이유가 그 기반 때문입니다. 무리하게 인간적 사과와 기업의 사과를 혼동하면 여러 추가적 문제가 생길 뿐입니다.

    다시 질문에서 언급된 잘 쓰여진 사과문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제대로 된 사과문은 일정 수준 이상의 기업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기업이 사과문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지요. 핵심은 제대로 된 사과문이 당면해 있는 위기상황을 사과자의 의도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과라는 커뮤니케이션만으로 해결될 상황인 것이냐는 확인도 필요합니다.

    성공적인 위기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행동(상황관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여러 행동에 대해 커뮤니케이션 하기 위해 사과문 같은 커뮤니케이션 관리가 따르는 것이죠. 제대로 된 행동, 대응, 상황관리를 계란의 노른자로 비유한다면, 그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관리는 계란의 흰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른자 없이 흰자만 있는 계란? 반대로 노른자만 있고 흰자가 없는 계란? 이 둘 중 어느 것이 좋은 계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렇듯 제대로 된 사과문은 제대로 된 초기 행동을 통한 상황관리와 ‘함께’ 할 때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과문이 곧 위기관리라는 생각은 그래서 잘 못이라는 것이죠.

    기업이 사과문을 잘 써야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특히나 AI가 발달하면서 “세상에는 멍청함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사과문 같이 당연함과 일반성이 곧 우수성으로 보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사과문이 제대로 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이후 상황이 어떻게 관리되어 가는가에 따라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창하게 흰자만 꽉 차 있는 계란인지, 노른자와 흰자가 함께 들어 있는 계란인지를 확인해 보아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관련 개념 · 위기 시 사과문은 무엇을 갖춰야 하는가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이코노믹리뷰에 연재한 [기업이 묻고 위기관리 컨설턴트가 답하다] 칼럼입니다.

  • 무조건 소통을?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한 기업의 질문

    “지금 이슈는 홍보실에서 볼 때 현상황에서 함부로 커뮤니케이션 하게 되면 여러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윗분들께서는 계속 소통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슈나 위기 발생 시에는 무조건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 하시네요.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요?”

    컨설턴트의 답변

    지난 십여 년간 여러 서적이나 교육 프로그램에서 ‘소통(疏通)’을 강조하는 트렌드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소통만이 살길이다. 소통으로 이슈나 위기를 관리해라. 소통이 전략이다 등 여러 주장과 조언이 생겨났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많은 기업 경영자들이 일종의 ‘소통강박’에 빠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소통을 강조하곤 합니다.

    소통의 의미를 사전에서 살펴보면, 소통이란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communication과 같은 의미랍니다. 얼핏 보면 아주 당연하고 쉬운 개념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는 ‘뜻’입니다. 그 ‘뜻’ 즉, 이슈나 위기 시 기업이 소통하고자 하는 ‘뜻’이 가장 어려운 소통의 장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슈나 위기관리를 위해 기업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에는 사과, 진정성, 해명, 억울함, 비장함, 개선 의지, 재발방지의지 등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업의 ‘뜻’을 접하는 대상들에게도 각자의 ‘뜻’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업의 ‘뜻’과 그 대상의 ‘뜻’이 다르거나 어긋나는 경우에는 ‘소통’이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소통이 곧 고통으로 변하는 이유이죠.

    그런 고통스러운 소통 시도가 반복되며, 새로운 오해가 생겨나며, 고통이 점점 더 심각 해 지는 실제 상황을 여러 번 목격하셨을 것입니다. 소통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소통은 되지 않는 것이 기본(default)이라 보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생각입니다. 특히 첨예한 분노, 경악, 실망, 오해, 추측, 억측, 공격성 등이 수면위로 떠 오르는 이슈나 위기 상황에서 소통이란 성공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슈나 위기관리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을 그래도 어느정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그럼 어떤 전제가 필요할까요? 당면한 이슈와 위기에 대한 기업의 입장이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의미에 기반해야 합니다. 그 입장자체가 소통 대상인 사람들의 시각과 정확하게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를 위해서는 해당 기업이 평시 사회적으로 올바른 의미에 기반한 행동을 하는 것에 익숙해 있어야 합니다. 기업문화나 철학이 실질적이고 완전해야 한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런 경우 불행하게 이슈나 위기에 휘말리더라도 기업이 소통을 통해 오해를 없애는 것이 보다 수월하게 됩니다. 소통 방식이나 기술 등은 그 다음이죠. 전략도 마찬가지고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현재 홍보실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주저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에는 상당한 전략적 판단이 기반해 있을 것이고요. 무조건 소통해야 한다는 원칙은 없습니다. 있을 수도 없습니다. 무조건이라는 전제가 들어 있다면 뭐든 의심해야 합니다. 소통하지 않는 것도 소통입니다. 전략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소통을 잠시 미루거나 상황을 보며 하지 않는 것도 보다 나은 결과를 위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일단 소통강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전략이 보입니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이코노믹리뷰에 연재한 [기업이 묻고 위기관리 컨설턴트가 답하다]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