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용민

  • 위기는 듣는 자에게 먼저 보인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 제논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귀가 둘, 입이 하나 있는 것은 더 많이 듣고 덜 말하라는 뜻이다.” 흔히 처세훈으로 알려진 말이다. 그러나 위기관리의 눈으로 다시 읽으면 이것은 정보 수집의 원칙이다. 듣는 양이 말하는 양의 두 배는 되어야 상황이 보인다는, 지극히 실전적인 가르침이다.

    위기의 신호는 언제나 ‘소리’로 먼저 온다. 현장의 불평, 고객의 항의, 협력사의 머뭇거림, 퇴사자의 뒷말, 온라인의 수군거림. 위기가 터지고 나서 돌아보면 그 소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울리고 있었다. 문제는 신호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듣는 귀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기를 맞은 기업들이 내놓는 단골 해명은 다시 들어볼 필요가 있다. “전혀 몰랐다. 이런 위기는 처음이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당황했다.” 신호를 듣지 않고 무시해 온 회사가 이렇게 말한다면, 둘 중 하나다. 정말 몰랐다면 그 회사는 멍청한 것이다. 그토록 오래 울리던 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이라면 영리한 것이다. 책임을 ‘갑작스러운 불운’에 떠넘기는 연기이니까. 어느 쪽이든 부끄러운 고백이다. 듣는 귀가 없었거나, 들은 것을 감추었거나.

    이 부끄러움은 위기가 터진 뒤에도 반복된다. 기업은 이번에도 듣는 대신 말부터 하려 든다. 해명하고, 반박하고, 설명하려 한다. 입이 귀를 앞지르는 순간 대응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지난 편에서 위기 속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무엇에 아파하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듣지 않은 채 내놓는 말은, 과녁 없이 쏘는 화살과 같다.

    그렇다면 왜 못 듣는가. 리더의 성품이 나빠서가 아니다. 조직에는 구조적인 난청이 있다. 나쁜 소식은 위로 올라갈수록 걸러지고 다듬어진다. 현장의 거친 경고가 보고서 몇 장을 거치면 ‘관리 가능한 이슈’로 순화된다. 보고 라인이 필터가 되고, 리더는 어느새 듣기 좋은 소리에만 둘러싸인다. 그래서 경청은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체계의 문제다. 마음먹는다고 들리는 것이 아니라, 장치를 만들어야 들린다.

    경청 체계라고 해서 거창할 것은 없다. 가공되지 않은 현장의 소리가 경영진에게 닿는 통로 하나. 내부의 불편한 제보가 불이익 없이 올라오는 길 하나. 고객 불만과 온라인 여론을 정기적으로 수집해 보고하는 절차 하나. 이런 장치들이 곧 그 회사의 조기경보 시스템이다. 값비싼 모니터링 도구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듣기 싫은 소리를 환영하는 문화다. 나쁜 소식을 가장 먼저 가져온 직원이 칭찬받는 회사와 혼나는 회사. 위기 앞에서 두 회사의 운명은 갈린다.

    듣기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그는 ‘명상록’에 이렇게 적었다. “말하는 사람에게 온 마음을 기울여, 그 사람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라.” 듣기는 수동적인 수신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라는 뜻이다. 위기 상황에서 유가족의 말, 분노한 고객의 말을 ‘처리’의 대상으로 접수하는 기업과, 그 말 속으로 ‘들어가서’ 듣는 기업은 전혀 다른 대응을 내놓는다. 대응의 실마리는 언제나 상대의 말 속에 있다.

    입은 위기를 키우고, 귀는 위기를 줄인다. 제논의 비율을 기억하자. 두 배로 듣고, 절반만 말하라. 평시에는 그 귀가 위기의 신호를 먼저 잡아내고, 위기 시에는 그 귀가 대응의 방향을 알려 준다. 위기는 듣는 자에게 먼저 보인다.

  • 우리 같은 조그만 회사도 위기관리를?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저희 회사는 지방에서 사업을 하는 조그만 중소기업입니다. 직원도 100명이 채 안 되고요. 지역에서는 오래된 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유명하거나 큰 기업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기업에게 위기관리 체계와 역량을 계속 강조하시던데, 저희 같은 규모의 회사도 그렇게 해야 할까요?”

    먼저 대표님이 ‘위기관리’라는 개념을 어떻게 그리고 계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아마도 대기업의 홍보실과 두꺼운 매뉴얼, 별도의 예산과 조직 같은 것을 떠올리고 계실 겁니다. 만약 위기관리가 그런 것이라면, 대표님 회사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점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표님 회사에 필요한 위기관리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질문 속에 이미 답의 실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대표님은 “지역에서 오래된 회사로 알려져 있다”고 하셨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수십 년 걸쳐 지역에서 쌓아 온 그 신뢰가, 대표님 회사가 가진 가장 값진 자산입니다. 유명하지 않다는 것과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오래 공들여 쌓은 신뢰일수록, 한번 금이 가면 회복에 몇 배 시간이 걸립니다. 대기업의 명성은 광고로도 사지만, 지역의 오래된 신뢰는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위기관리란 무엇일까요. 거창하게 볼 것이 없습니다. 그 오래된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는 일, 그것이 대표님께 필요한 위기관리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대표님은 이미 그 일을 매일 하고 계십니다. 현장의 안전을 살피고, 거래처와의 약속을 지키고, 직원들의 사기를 챙기고, 자금이 막히지 않도록 신경 쓰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위기관리입니다. 대표님은 이미 이 회사의 위기관리 책임자이신 셈이지요.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일을 ‘무의식적으로, 마주치는 대로’ 하고 계실 뿐입니다. 위기관리라고 부를 만한 것은, 그 일을 ‘의식적으로, 미리’ 하는 것입니다. 그 작은 차이가 위기의 순간에는 생각보다 큰 격차를 만듭니다.

    지금까지 큰 탈 없이 회사를 잘 이끌어 오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위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운이 좋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위기가 아예 없는 회사는 세상에 없습니다. 다만 그 위기가 아직 대표님을 찾아오지 않았을 뿐이지요. ‘지금까지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겠지’라는 생각이야말로, 작은 회사를 가장 위태롭게 만드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제가 권해 드리는 것은 거창한 준비가 아닙니다. 우리 회사에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한두 가지를 평온한 지금 미리 떠올려 보시는 것, 그때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지를 마음속에 그려 두시는 것, 그리고 회사의 앞날을 쥔 몇몇 사람과 평소 신뢰를 두텁게 해 두시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돈이 드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한 번 먹는 일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위기관리는 회사를 크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오래 지켜 온 것을 지키는 일입니다. 대표님 회사는 유명하지 않아서 위기관리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오래 신뢰받아 왔기에 더더욱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규모가 작다는 것은 위기관리를 건너뛰어도 되는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더 조심히 지켜야 할 이유인 것이지요.

  • 위기관리, ‘준비’란 무엇인가

    위기관리, ‘준비’란 무엇인가

    [blog exclusive]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여러 기업들이 위기관리를 공부한다. 강의를 듣고, 컨설팅을 받는다. 그러다 꼭 한 곳에서 멈칫한다. ‘준비’라는 단계다.

    준비. 말은 쉽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면 막막하다. 처음도 끝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엇을 준비하느냐를 물으면 의견이 갈린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준비인지 정해진 것도 없다. 얼마나 걸리는지,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누가 하느냐, 어디까지 관여하느냐도 현장에선 아주 현실적인 물음이다. 여기에 예산이 걸리고, 내부 정치가 얹힌다. 그래서 준비는 회사마다 제각각의 모습으로 어정쩡하게 자리 잡는다.

    막히는 이유는 대개 같다. ‘무엇을’ 갖출지부터 따지기 때문이다.

    위기관리를 준비하자고 하면 곧바로 팀을 짜자고 한다. 매뉴얼을 만들자고 한다. 트레이닝을 하자, 시뮬레이션을 돌리자고 한다. 전부 ‘무엇을’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다 막힌다. 이건 필요하고 저건 필요 없고. 예산은 한정돼 있고. 그렇게 준비는 더 나아가지 못한다. 흔한 풍경이다.

    순서를 바꿔야 한다. 준비의 중심은 ‘무엇’이 아니다. ‘누가(who)’와 ‘어떻게(how)’다. 이 둘이 준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무엇’은 그 뒤에 자연히 따라온다.

    누가 관리하는가?

    준비는 여기서 시작된다. 모든 위기관리 체계의 공통 전제이자 첫 핵심이 ‘누가’다. 매뉴얼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은 늘 ‘누가’다.

    CEO는 이 그림을 쥐고 있어야 한다. 누가 우리 회사의 위기를 관리하는가?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이 그림이 있어야 다음 준비가 굴러간다. 그 과정을 관리하고 감독할 수 있다. 준비된 것을 유지하고, 보수하고, 업데이트할 수 있다.

    ‘누가 우리 회사의 위기를 관리할 것인가?’ 철학적 질문이 아니다. 지극히 실전적인 질문이다.

    위기관리 위원회를 둔다. 그 아래 위기관리팀을 붙인다. 핵심 대응 인력을 선별해 팀을 짠다. 구성원 하나하나에 정확한 역할과 책임을 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내에 공식적으로 공유한다. 그 조직과 사람들에게 권한을 준다. 임파워먼트다.

    권한은 공짜가 아니다. 권한을 받은 조직은 그 정당성과 생산성을 CEO에게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증명하지 못하는 권한은 거둬들여진다. 이 긴장이 살아 있어야 ‘누가’가 제대로 작동한다.

    어떻게 관리하는가?

    ‘누가’가 서면 다음은 이 물음이다. 위기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이걸 조직 안에서 하나씩 합의로 만들어 간다.

    품질 위기가 터졌다고 하자. 우리는 이 위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어떻게 정의하는가? 무엇을 우선하는가? 어떻게 끝내는가? 이런 ‘어떻게’를 위기관리 조직을 중심으로 미리 생각해 둔다.

    이 과정에서 회사의 철학이 정리된다. 미션과 비전, 가치와 방향이 구체적인 언어로 손에 잡힌다. 이런 평시 자산이 없는 회사가 위기 앞에서 무너진다. 대응의 근거를 찾지 못해서다. 그러니 준비 없이 임기응변에 매달리다 재앙으로 간다.

    방향을 미리 잡아 보는 것. 머릿속으로 위기를 한 번 겪어 보는 것. 그것이 ‘어떻게’의 준비다.

    무엇으로 관리하는가?

    ‘누가’와 ‘어떻게’가 익으면, 그제야 ‘무엇’이 보인다. 필요한 것들의 목록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조직 간 실시간 소통을 위한 비상연락망. 대책을 세우고 지시를 내릴 워룸. 정해진 방향을 정리한 매뉴얼. 분석과 벤치마킹을 위한 사례집. 여기에 트레이닝과 시뮬레이션, 드릴과 진단이 붙는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의 준비다.

    얼핏 단순한 순서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아니다. 이건 우선순위와 중요도의 순서다. 누가, 어떤 생각으로 위기를 보고, 무엇을 들고 관리할 것인가. 그 무게의 순서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는가?

    앞의 준비가 제대로 됐는지는 몇 마디 질문으로 드러난다.

    첫째. “CEO가 자리에 없거나 유고일 때, 귀사는 위기를 관리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다면 누가 조직을 이끌고 최종 결정을 내립니까?” 이 질문 하나면 그 회사의 ‘누가’가 얼마나 단단한지 드러난다.

    둘째. “최근 귀사가 주목하고 분석한 경쟁사, 동종업계, 타업계의 위기 사례는 무엇입니까?” 이건 ‘어떻게’를 묻는 질문이다. 준비 안 된 회사는 남의 사례를 모른다. 알아도 조각으로 안다. 잘못 아는 경우도 많다. 이 답이 부실하면 ‘누가’도 부실하다는 뜻이다.

    매뉴얼이 있느냐, 얼마나 구체적이냐, 업데이트는 됐느냐. 이런 걸 굳이 묻지 않아도 된다. 앞의 몇 질문이면 그 회사의 준비 수준이 측정된다.

    근데 그건 그렇고… 왜?

    앞에서처럼 ‘누가’와 ‘어떻게’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회사가 많다면, 왜 그럴까? 준비하는 방법을 몰라서일까? 이유는 하나다. 순서의 문제도, 지식의 문제도, 예산의 문제도 아니다. ‘왜(why)’가 없어서다.

    지금까지 누가, 어떻게, 무엇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셋을 처음부터 움직이게 하는 힘은 따로 있다. 바로 ‘왜(why)’다.

    인간에겐 본능이 있다. 위협 앞에서는 싸우거나 도망친다. 싸움-도피 반응(fight or flight)이다. 그런데 이 본능은 위협을 위협으로 느껴야 켜진다. 목숨이 걸렸다고 느껴야 몸이 움직인다.

    기업 구성원은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목숨을 위협한다고까지 느끼지 않는다. 현장에서 보면 딱 이 정도다. 골치 아프다. 귀찮다. 그뿐이다. 그러니 싸우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 평시에 위기를 준비할 마음이 생길 리 없다.

    이 본능을 켜는 것이 ‘왜’의 힘이다. ‘왜’가 살아 있고 큰 회사는, 준비의 절반을 이미 마친 셈이다. ‘왜’가 ‘누가’와 ‘어떻게’를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준비를 어렵다 생각할 시간에 먼저 ‘왜’를 생각하라. 강한 동기를 만들어라. CEO와 전 구성원이 위기를 두려워해 보라. 무서워해 보라. 목숨이 위태로운 것처럼 처절하게 싫어해 보라. 그러면 준비로 가는 길이 열린다. 의외로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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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리더는 대변인 뒤에 서는가?

    [blog exclusive]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거의 모든 국가와 기업에는 대변인이 있다. 조직의 얼굴이라는 리더를 두고도, 굳이 그 앞에 다른 입을 세운다. 리더가 말을 못해서가 아니다. 말을 잘하는 리더일수록 대변인 뒤에 서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대변인 제도의 뿌리를 따라가 보면 답이 보인다. 미국에서 백악관 대변인이라는 공식 직책이 처음 생긴 것은 1929년이다. 언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행정부의 메시지를 한 창구로 모아 내보낼 필요가 생겼다.

    여기에 깔린 전제가 있다. 최고 권력자도 언제든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불완전하다. 아무리 뛰어난 리더도 예외가 아니다. 대변인 제도는 이 단순한 사실 위에 세워졌다. 리더도 사람인 이상 반드시 실수한다는 전제 위에, 그 실수를 미리 걸러내려 만든 장치다.

    대변인은 조직의 말을 다듬는 사람

    대변인 제도가 실제로 하는 일은 세 가지다.

    첫째, 검증이다. 메시지가 밖으로 나가기 전에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법적·정무적 리스크를 걸러낸다. 리더 혼자 던지는 말에는 이 관문이 없다.

    둘째, 일원화다. 조직의 입을 하나로 모은다. 여러 입이 제각각 말하면 메시지는 흩어지고, 받는 쪽은 혼란스럽다. 창구가 하나여야 조직의 메시지에 힘이 실린다.

    셋째, 완충이다. 리더와 즉각적인 여론 사이에 시간과 사람을 둔다. 그 사이에서 조직은 한 번 더 생각하고, 필요하면 고친다. 완충이 없으면 리더의 실수는 곧바로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된다.

    메시지가 나가기 전에 분석하고, 전략을 세우고, 여러 부서가 표현을 맞추고, 최종적으로 검증한다. 조직의 집단지성이 합의한 메시지가 단일한 창구를 통해 나간다. 대변인 제도의 본질은 이 과정 전체다. 대변인은 리더의 말을 막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의 말을 다듬는 사람이다.

    직접 던지는 말에는 관문이 없다

    최근 일부 리더들은 이 관문을 통째로 건너뛴다. 개인 소셜미디어로 사소한 생각을 실시간으로 던진다. 빠르고, 꾸밈없고, 중간의 왜곡이 없다. 지지층은 열광한다. 직접 소통의 매력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매력이 앞의 세 관문을 모두 무너뜨린다는 데 있다. 검증이 없으니 틀린 사실이 그대로 나간다. 일원화가 없으니 리더의 말과 조직의 공식 입장이 어긋난다. 완충이 없으니 실수는 즉시 박제된다. 지우거나 정정해도 이미 늦다. 캡처들이 계속 남는다.

    직접 소통, 그럴듯하지만 위태롭다

    직접 소통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정리하면 대체로 네 가지다.

    진정성(authenticity). 다듬어진 보도자료보다 리더의 날것이 더 믿음직하다는 생각이다.

    속도. 위기의 순간에 대변인을 거칠 시간이 없다는 시각이다.

    왜곡 제거. 언론이라는 중간 필터가 메시지를 비튼다는 것이다.

    결속. 지지층과 직접 이어져 자기 서사의 주도권을 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고잉 다이렉트(going direct)’ 전략은 최근 몇 년 사이 강력한 흐름이 되었다.

    하나씩 되짚어 보자.

    진정성부터 보자. 날것이 곧 진정성은 아니다. 검증되지 않은 날것은 그냥 사고(事故)일 뿐이다. 틀린 사실을 진솔하게 말한다고 그 사실이 참이 되지는 않는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꾸밈없음이 아니라 믿을 수 있음이다. 그 둘은 다르다.

    속도를 보자. 조직과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말이 아니라 맞는 말이다. 대변인을 거치는 몇 시간이 아까워 던진 한마디가, 이후 몇 달의 수습을 부른다. 빨라서 이기는 경우보다, 빨라서 무너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왜곡 제거를 보자. 언론이라는 필터를 없애면 왜곡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필터가 없으면 리더 자신의 실수가 그대로 통과할 뿐이다. 중간의 왜곡을 없앤 대가로, 원본의 결함을 걸러 줄 장치까지 함께 잃는다.

    결속을 보자. 지지층과 직접 이어지는 것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직접성은 우호적인 청중에게만 통한다. 같은 메시지를 반대 진영과 규제 당국, 투자자와 언론이 동시에 본다. 지지층을 결속시킨 바로 그 한마디가, 나머지 모두에게는 공격의 빌미가 된다. 하나의 청중을 위해 던진 말이 여러 청중 앞에서 폭탄이 된다.

    네 가지 이득은 모두 실재한다. 문제는 그 이득이 하나같이 ‘잘 될 때’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잘못될 때의 손실은 그 이득을 전부 합친 것보다 크다. 진정성으로 얻은 신뢰는 실언 한 번에 무너지고, 속도로 아낀 몇 시간은 몇 달의 위기로 돌아온다. 이득은 선형으로 쌓이지만, 손실은 한순간에 터진다. 이 비대칭(asymmetry)이 핵심이다.

    누구를 위한 직접 커뮤니케이션인가

    여기까지는 실수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람은 불완전하니 관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더 무거운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의도의 문제다.

    공직자와 기업 총수의 말에는 애초에 사적 영역이 좁다. 공직자는 공익을 실현할 법적 의무를 진다. 기업 총수는 회사에 대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duty of care), 그리고 회사의 이익에 충실할 의무(duty of loyalty)를 진다. 이른바 선관의무와 충실의무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이들의 공적 발언은 개인의 표현이 아니라, 위임받은 목적의 수행이다. 자기 것이 아닌 말을 대신 맡아 하는 자리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매디슨은 헌법을 설계하며 이렇게 썼다. “인간이 천사라면 정부는 필요 없다.” 그가 견제 장치를 만든 이유는 단순히 사람이 실수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사람은 권력을 쥐면 사익을 좇고 야심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야심이 야심을 견제하게 하라”고 했다. 자리에 맡겨진 목적과, 그 자리에 앉은 개인의 욕심은 늘 어긋날 수 있다. 그 어긋남을 걸러 줄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변인 제도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대변인을 거친다는 것은 ‘이 말이 조직의 목적에 부합하는가’를 조직이 한 번 확인한다는 뜻이다. 관문을 건너뛴다는 것은 그 확인을 회피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회피에는 대개 이유가 있다.

    던져지는 말들을 보면 짐작이 된다. 조직의 공식 입장과 어긋나는 말. 개인의 감정과 과시, 정치적 야심이 앞선 말. 조직에 이득이 없거나 오히려 손해인데도 반복되는 말. 이런 말들은 조직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의심이 시작된다. 리더가 굳이 관문을 건너뛰는 이유는, 그 말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할 말이기 때문은 아닌가? 직접 소통이라는 방식 자체가, 사적 목적을 걸러지지 않게 통과시키는 통로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핵심은 커뮤니케이션 구조다. 직접 소통이라는 방식은 사적 목적을 걸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걸러지지 않으니, 사심이 있어도 그대로 나가고, 없어도 의심을 받는다.

    리더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다. 지금 이 말은 조직을 위한 것인가, 국가를 위한 말인가, 기업을 위한 말인가. 아니면 나를 위한 말인가. 이 자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말은 애초에 나가지 말아야 할 말이다.

    참는 것도 리더의 능력이다

    리더가 대변인 뒤에 서는 것은 무능이 아니다. 절제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리더가 아니라, 해야 할 말만 골라 내보내는 리더가 조직을 지킨다.

    직접 던지는 한마디는 통쾌하다. 그러나 그 통쾌함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리더 개인이 아니라 조직 전체다. 국가의 신뢰이고, 기업의 평판이다. 대변인이라는 낡아 보이는 제도가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리더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실수하고, 때로는 사심을 따른다. 그 둘을 미리 걸러 줄 관문 하나가, 조직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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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EO에게도 표현의 자유는?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저희 대표께서는 항상 자신이 하고 싶은 말도 못하면 되겠냐 한탄을 하십니다. 표현의 자유가 있는데, 그런 권리를 행사하면 왜 안되냐는 거죠. 홍보실에서는 계속 불안합니다. 기자들과의 자리는 만들지 않으면 되는데, 개인적으로 하시는 소셜미디어가 문제지요. CEO의 표현의 자유 어떻게 봐야 할까요?”

    홍보실의 그런 불안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대표님의 한탄도 이해는 됩니다. 다만 이 문제를 ‘표현의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로 따지기 시작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대표께도, 저에게도,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걸 부정할 사람은 없지요.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말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 말한 뒤의 책임까지 없어진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누구도 대표님의 입을 막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활을 떠난 화살과 같습니다. 쏠 자유는 있어도, 그 화살이 날아가 일으킨 일까지 없던 일이 되지는 않지요. 원치 않는 오해를 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법적인 다툼으로까지 번집니다. ‘말할 자유’는 있어도 ‘그 말의 결과에서 도망칠 자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 이것이 표현의 자유의 진짜 얼굴입니다.

    여기에 CEO라는 자리의 특별함이 더해집니다. 대표님은 회사를 ‘내 회사’라고 느끼시겠지만, 조금 냉정하게 보면 회사와 주주로부터 경영을 ‘맡은’ 사람입니다. 남의 소중한 것을 대신 맡아 지키는 자리라는 뜻이지요. 이런 사람을 법에서는 ‘수임자’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피듀시어리(fiduciary)’라고 하는데, 말은 거창해도 뜻은 단순합니다. 나를 믿고 맡긴 사람들의 이익을 내 기분보다 앞에 두어야 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갈등이 생깁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는 ‘개인’과, 맡은 것을 지켜야 하는 ‘수임자’가 한 사람 안에서 부딪히는 것이지요.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제 기분대로 핸들을 꺾을 수 없듯, 회사를 맡은 사람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을 다 가지려 하니 늘 갈등과 스트레스가 따라오는 것이죠. 결국 어느 하나는 택하셔야 합니다. 자유로운 개인으로 사실지, 책임 있는 수임자로 사실지.

    그렇다면 CEO의 표현의 자유는 어디에서 풀어야 할까요. 바로 회사 이야기 안에서입니다. 회사의 비전과 미션, 지켜야 할 가치와 원칙, 우리의 성과와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조직문화까지. 대표님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쏟아부어도 좋을 주제가 회사 안에 이미 넘쳐납니다. 사실 이것들만 부지런히 이야기해도 하루가 모자란 것이 CEO입니다. 표현의 욕구는 바로 그 넓은 운동장에서 마음껏 푸시면 됩니다.

    사회적으로 구설에 오른 CEO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분들의 ‘하고 싶은 말’은 예외 없이 ‘그만한 책임’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은 ‘대놓고 하면 안 될 말’만이 아닙니다. CEO가 한 말 가운데 조금이라도 ‘적절하지 않은 말’은, 그게 무엇이든 문제가 됩니다. 그 기준은 개인의 상식이 아니라 맡은 자리의 무게에 맞춰지니까요.

    정 표현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 싶으시다면, 그건 은퇴 후에 한 사람의 개인으로 돌아가 마음껏 찾으시면 됩니다. 그 자리에 계신 동안만큼은, 하고 싶은 말보다 지켜야 할 책임이 늘 반걸음 앞선다는 것. 이것이 CEO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답일 것입니다.

  • 기업 위기관리에서 맷집이란?

    [Blog Exclusive]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권투를 아는 사람이라면 ‘맷집’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겉보기에 우람하고 화려한 펀치를 뽐내는 선수가 한 방에 무너지는가 하면, 크게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온갖 타격을 견디며 끝까지 링 위에 서 있는 선수가 있다. 후자를 두고 맷집이 좋다고 말한다. 기업 위기관리에서 이 맷집은 위기를 맞은 기업에게 가장 절실하면서도 가장 저평가된 역량이다.

    위기관리 시 기업의 맷집이란 이런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다 했음에도 불운하게 위기를 맞은 기업이, 그 위기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부화뇌동 없이 견뎌내는 조직적 내구력. 위기를 사전에 회피하는 예방역량과는 달리 맷집은 위기가 이미 도래한 국면, 즉 펀치가 이미 날아든 순간에 조직이 무너지지 않고 기능을 유지하며 그 국면을 통과해 내는 힘이다.

    일부 기업은 맷집을 오해한다. 맷집을 그저 버티기, 침묵하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소극적 태도로 여긴다. 맷집은 방관이 아니다. 통제 가능한 영역에서 능동적으로 대응하되 외부 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힘이다.

    맷집을 덩치나 명성과 혼동하는 오해도 있다. 규모가 크고 브랜드가 강하면 어떤 위기도 견딜 수 있으리라 믿지만, 겉보기에 강한 상대일수록 한 방에 무너지는 경우가 오히려 잦다.

    맷집이 타고나는 것이라는 오해도 흔하다. 맷집은 기질이 아니라 위기 이전에 길러 두는 역량이다. 평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해 온 기업만이 위기 국면에서 그 힘을 꺼내 쓸 수 있다.

    맷집은 서구의 조직 이론과 철학, 그리고 스포츠 과학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는 개념이다. 좀 더 들여다 보자.

    무너지지 않는 조직의 과학

    미시간대학의 칼 웨익(Karl Weick)과 캐슬린 서트클리프(Kathleen Sutcliffe)는 원자력 발전소, 항공모함, 응급의료처럼 사소한 오류가 곧 대형 재난으로 이어지는 고위험 환경의 조직을 연구해 왔다. 이들이 정립한 ‘고신뢰조직(High Reliability Organization)’ 이론은 조직이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어떻게 붕괴하지 않는가를 다룬다.

    이 이론의 핵심에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있다. 웨익과 서트클리프는 회복탄력성을 세 가지로 나눈다. 역경 속에서도 긴장을 흡수하고 기능을 보존하는 능력, 충격적 사건으로부터 정상으로 복귀하는 능력, 이전 사건으로부터 학습하고 성장하는 능력이다. 이들은 회복탄력성을 단순히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그 순간에 견뎌내는 힘까지 포함한다.

    최고의 고신뢰조직은 오류가 닥친 뒤에야 반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소에 지식과 기술적 숙련, 자원에 대한 장악력을 미리 확장해 둠으로써 불가피한 위기에 대비한다.

    이렇듯 맷집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위기 이전에 길러지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하는 기업이 곧 자신의 맷집을 미리 단련하는 기업이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 평정

    맷집이 조직의 물리적 내구력만을 뜻한다면 절반의 개념에 그친다. 나머지 절반은 마음에 있다.

    고대 스토아 철학에는 ’평정(euthymia)’이라는 개념이 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불안에 시달리던 친구 세레누스를 위해 쓴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De Tranquillitate Animi)』에서 이 그리스어 euthymia를 라틴어 ’트란퀼리타스(tranquillitas)’로 옮기며, 그리스인들이 ‘영혼의 안녕’이라 부르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안정성을 논했다.

    세네카가 말한 평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적인 부동성이 아니라, 운명의 부침에 흔들리지 않는 평형된 마음이다. 세네카는 이를 폭풍이 막 지나간 뒤에도 잔물결이 이는 바다에 비유했다. 완전한 무풍이 아니라, 큰 파도에 뒤집히지 않는 안정된 항해가 평정의 본질이다. 위기의 급류 속에서 속도를 늦추되 방향만은 잃지 않는 태도, 이른바 아다지오(adagio)와 전략적 조향(strategic steering)이 바로 이것이다.

    이 평정을 실천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또 다른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통제의 이분법’이다.

    에픽테토스는 우리 힘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을 구분했다. 판단과 반응, 선택은 힘 안에 있으나,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 자체는 힘 밖에 있다는 것이다. 위기관리에 대입하면 명료해진다. 기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적시에 했다는 것은 통제 가능한 영역에서 소임을 다했다는 뜻이며, 불운하게 맞은 위기는 통제 불가능한 외부의 몫이다.

    맷집이란 통제 가능한 영역에서 소임을 완수한 것을 전제로, 통제 불가능한 외부 충격 앞에서 부화뇌동을 다스리는 역량이다. 스토아 철학에서 외부적인 것이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에 대한 태도와 대응은 여전히 중요하다.

    잘 맞는 것도 기술이다

    격투기가 말하는 맷집의 구조는 앞의 두 개념들과 그대로 맞물린다.

    권투에서 펀치를 견디는 힘은 단일한 능력이 아니다.

    첫째는 목 근력이다. 스포츠 생체역학 연구는 목의 강성이 충격 시 머리 가속도를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변수 중 하나임을 보여준다. 목 근육이 충격흡수기 역할을 하여 타격이 유발하는 머리의 회전과 가속을 버텨내는 것이다. 목 근육이 충격을 흡수해 뇌로의 전달을 막듯, 조직의 회복탄력성은 국소적 오류가 시스템 전체의 실패로 번지는 것을 막는다. 목 근력이 훈련으로 길러진다는 사실은 맷집이 배양 가능한 역량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해 준다.

    둘째는 기술이다. 최고의 수비형 복서들은 펀치를 완전히 피할 수 없을 때 머리를 펀치와 같은 방향으로 흘려보내 충격을 줄인다. 이른바 ‘롤링 위드 더 펀치’다. 이 기술의 요체는 예측이다. 언제 맞을지를 미리 읽고 그 방향으로 몸을 흘린다. 통제할 수 없는 펀치의 도래를 정면으로 맞받지 않고, 통제 가능한 자신의 반응을 조정해 충격을 무해화하는 것이다. 위기를 정면으로 받아치다 자멸하는 기업과, 흘려보내며 국면을 넘기는 기업의 차이가 여기서 갈린다.

    셋째는 평정이다. 격투기 전문가들은 진정한 맷집이 턱 강도만이 아니라 타격을 흡수하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정신적 강인함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목이 강해도 정신이 흔들리면 무너진다. 조직 역량이 충분해도 내부의 부화뇌동이 통제되지 않으면 위기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유리턱은 왜 무너지는가?

    미국의 위기관리 전문가 에릭 데젠홀(Eric Dezenhall)이 쓴 책의 제목이 『글래스 조(Glass Jaw)』다. ‘글래스 조’, 곧 유리턱은 권투에서 겉보기에 강해 보이나 펀치 한 방을 견디지 못하는 선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데젠홀은 오늘날 논란의 표적이 된 기업과 개인이 이 유리턱과 같다고 본다. 그는 스캔들의 세계에서는 약자가 강하고 강자가 약하며, 온라인 여론 동원이 무력한 자를 강력하게 만든다고 분석한다. 디지털 시대에 논란은 순식간에 퍼져 한때 강력했던 조직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는 소셜미디어에서 날아든 펀치를 그대로 맞받아 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데젠홀이 왜 강자가 유리턱이 되어 무너지는가를 진단했다면, 남는 과제는 어떻게 맷집을 길러 무너지지 않을 것인가를 처방하는 일이다. 회복탄력성과 평정과 흘리기, 이 세 가지가 그 처방이 된다. 펀치를 맞받아 치지 말라는 데젠홀의 경고도 결국 충격을 흘려보내라는 맷집의 논리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맷집은 위기관리 성공의 비결

    기업의 맷집이란, 통제 가능한 영역에서 마땅한 소임을 적시에 완수한 기업이, 통제 불가능한 외부 충격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 평정을 유지한 채 부화뇌동을 다스리며, 조직 기능을 보존하고 국면을 통과해 학습으로 전환하는 힘이다.

    위기를 완벽히 회피할 수 있는 기업은 없다. 그러나 마땅한 소임을 다하고 흔들림 없이 견뎌내는 기업은 있다. 그 기업의 성공 비결이 곧 맷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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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기와 위기관리 속에는 사람이 있다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위기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위기를 일으키는 것도 사람이고, 그 위기를 힘겹게 수습해 나가는 것도 사람이다. 위기를 둘러싸고 그것을 더 큰 재앙으로 키우는 것 역시 사람들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답은 한결 분명해진다. 사람이 없는 곳에는 위기도 없다. 이것은 위기관리에서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렇기에 위기관리를 제대로 해내고 싶은 기업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원칙은 사실 위기관리 매뉴얼의 뼈대에도 새겨져 있다. 잘 만들어진 매뉴얼이 던지는 첫 질문은 언제나 ‘누가(who)’다. 누가 이 사안을 판단하는가, 누가 회사를 대변하는가, 누가 피해를 입었고 누가 분노하고 있는가, 누가 영향력을 쥐고 있는가. 위기를 대비하는 일의 상당 부분도 결국 사람의 일로 채워진다. 임직원과 함께 땀 흘리는 훈련과 시뮬레이션이 그 한가운데 있고, 위기 유형별로 이해관계자와 영향력자, 곧 사람들을 미리 살피고 관계를 다져 두는 일이 그 나머지를 이룬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 히에로클레스의 통찰을 참고해 보자. 그는 ‘오이케이오시스(Oikeiosis)’, 우리말로 옮기면 ‘내 것으로 여김’ 정도가 될 개념을 동심원으로 설명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한가운데 두고, 그 바깥으로 가족과 이웃, 동료 시민, 그리고 마침내 온 인류로 이어지는 여러 겹의 원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가 권한 삶의 태도는 이러했다. 저 바깥쪽 원에 있는 사람들을 조금씩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마치 가까운 이처럼 여겨 보라는 것이다.

    이 동심원이 바로 위기 시 이해관계자 관리 지도다. 가장 안쪽에 경영진과 조직이 있고, 그 다음 원에 임직원이, 이어 협력사와 거래처가, 그리고 고객과 지역사회가, 맨 바깥에 더 넓은 사회와 여론이 겹겹이 놓인다. 위기를 맞은 기업이 해야 할 일도 히에로클레스의 조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 바깥 원의 사람들까지 안쪽으로 끌어당겨, 그들의 감정과 시선을 내 일처럼 헤아려 보는 것이다. 이 지도를 평온한 시절에 미리 그려 둔 기업과, 위기가 터진 뒤에야 ‘누가 있었더라’ 하고 뒤늦게 헤매는 기업의 걸음걸이는 첫날부터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사람’의 양면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는 ‘명상록’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니 그들을 가르치든지, 아니면 견뎌내라.” 짧지만 위기관리의 본질을 관통하는 말이다. 사람은 때로 참고 견뎌야 할 골칫거리이면서도, 결국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해법이라는 뜻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도 그렇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사람이고, 그 문제를 더 크게 키우는 것도 사람이지만, 끝내 그 문제를 풀어낼 열쇠를 쥔 것 또한 사람이다. 사람이 곧 문제이며, 동시에 사람이 곧 해법이다.

    반면 돈과 숫자만 들여다보거나,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좇거나, 자기 느낌과 확신에만 기대어 판단할 때, 정작 그 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들은 슬그머니 시야에서 사라진다. 준비도, 의사결정도, 대응도 사람을 향하고 있을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법이다.

    위기관리는 이렇듯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향한 일이다. 숫자 뒤에, 현상 뒤에, 그리고 나의 확신 뒤에 가려진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위기 속에 사람이 있고, 위기관리 속에도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데서 위기관리는 비로소 시작되고, 또 그렇게 마무리된다.

  • 왜 불완전한 사과도 효과가 있을까?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더피알=정용민|최근 기업 위기 현장에서 묘한 장면이 반복된다. 한참 늦었고, 표현도 군데군데 부적절하고, 책임 인정과 재발 방지 약속마저 어딘가 허전한 사과가, 그럼에도 논란을 비교적 빠르게 가라앉히는 장면이다. 원칙대로라면 불완전한 사과는 제대로 된 효과를 낼 수 없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자꾸 어긋난다. 이런 장면을 몇 번 목격한 실무자들은 이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런 의문은 최근 상황에서 당연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위험하다. 한 발만 더 나가면 “어차피 운과 분위기가 좌우한다면 사과는 적당히 형식만 갖춘 통과의례 아닌가”라는 냉소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실무자가 이미 사과를 그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냉소는 한 가지 결정적인 구분을 놓친 데서 비롯된다. 바로 ‘불완전한 사과’에도 전혀 다른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불완전한 사과는 겉으로는 다 비슷해 보이지만, 열어 보면 두 종류로 갈린다. 하나는 ‘구겨진 상자’다. 겉면이 찌그러지고 모양이 빠졌을 뿐, 그 안에는 책임 인정과 진심, 구체적인 시정이라는 알맹이가 멀쩡하게 들어 있는 사과다. 말이 좀 거칠었고, 타이밍이 늦었고, 전달이 어설펐던 정도다. 사람들은 구겨진 겉상자는 너그럽게 용서한다. 상자의 값어치는 겉모양이 아니라 그 안의 내용물에서 나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런 사과가 통하는 것은 당연하다. 완벽하진 않아도 제 몫은 하는, 이른바 ‘그럭저럭 괜찮은(good-enough) 사과’다. 우리가 ‘불완전한데도 효과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례의 상당수가, 실은 겉만 구겨졌을 뿐 알맹이는 온전했던 이 유형이다.

    다른 하나는 ‘빈 상자’다. 겉포장은 번드르르하고 리본까지 묶였는데, 막상 열어 보면 비어 있다. 책임은 슬그머니 회피하고, 가해자의 해명과 자존심이 사과보다 앞서며, 시정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려진다. 알맹이가 없는 사과다. 원칙대로라면 이런 사과는 절대 통해선 안 된다. 그런데도 가끔 논란이 가라앉는다. 바로 여기서 실무자의 착시가 시작된다. 빈 상자를 건넸는데 상대가 화를 풀었으니, ‘빈 상자도 괜찮구나’라고 잘못 배우는 것이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모든 오해의 뿌리다. 그래서 현장 실무자들이 사과에 대해 흔히 품는 일곱 가지 오해를, 이 구분을 기준으로 하나씩 짚어 보고자 한다.

    “사과문 한 장 잘 내면 기사도 줄고 댓글도 식는다. 결국 사과란 이 소란을 멈추는 일 아닌가?”

    사과를 불 끄는 소화기로만 본다. 그러나 불에는 두 종류가 있다. 활활 타오르는 겉불과, 그 아래 숯처럼 남아 오래 가는 속불이다. 어설픈 사과로도 겉불, 즉 기사와 댓글의 불길은 잡을 수 있다. 문제는 속불이다. 훼손된 신뢰라는 속불은 겉이 잠잠해진 뒤에도 재 속에서 빨갛게 살아 있다. 소화기로 겉불만 끄고 ‘불 껐다’며 돌아서는 기업은, 며칠 뒤 같은 자리에서 다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사과의 진짜 임무는 겉불 진화가 아니라 속불 진화다.

    “지난번 그 회사도 사과는 엉망이었는데 결국 잠잠해졌잖아. 사과의 완성도가 그렇게 중요한가?”

    가장 위험한 오해다. 빈 상자를 건넸는데도 상황이 잠잠해졌다면, 그것은 사과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운’이 대신 해 준 것이다. 시간이 흘렀거나, 더 큰 뉴스가 터졌거나, 충성 고객이 많았거나, 회사가 워낙 커서 버틸 체력이 있었을 뿐이다. 이는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나갔는데 마침 처마 밑으로만 걸어 비를 피했다고 해서, ‘우산은 필요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격이다.

    게다가 사과는 운 옆에 가만히 앉은 들러리가 아니다. 제대로 된 사과는 그 운을 직접 만들어낸다. 좋은 사과는 언론이 기사를 거두게 하고, 충성 고객을 붙들며, 비판자에게 빌미를 주지 않는다. 반대로 빈 상자 사과는 스스로 악운을 부른다. 사과 자체가 또 다른 기삿거리가 되고, 조롱의 소재가 되며, 비판자에게 새 탄약을 쥐여 준다. 빈 상자가 통했다면 운이 좋았던 것이고, 구겨진 상자가 통했다면 그 안의 알맹이가 운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타이밍을 잘 잡아 그럴듯하게 연출해서 한 방에 터뜨리면 분위기가 확 바뀐다.”

    빈 상자를 화려한 포장으로 덮으려는 발상이다. 그러나 연출된 사과는 잠깐의 침묵은 살 수 있어도 신뢰는 사지 못한다. 요즘 대중은 사과의 무대 조명을 보면서 그 뒤의 계산까지 함께 읽는다. 공들인 연출일수록, 그 속내가 들통나는 순간의 역풍은 더 사납다. 사과는 남을 향해 쏘아 올리는 한 발의 폭죽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회사인가’를 스스로 써 내려가는 선언문이다. 폭죽은 터지는 순간 가장 화려하고, 곧바로 차갑게 식는다.

    “사과문을 더 절절하게, 눈물 한 방울 쏙 빠지게 다듬자.”

    진정성은 문장을 다듬어 짜낸다고 생기지 않는다. 진정성은 말이 아니라, 그 말 앞에 놓인 행동에서 새어 나온다. 피해를 실제로 복구했는지, 보상이 구체적인지, 재발을 막을 조치가 손에 잡히는지가 먼저다. 옳은 행동이 9할이고 그에 대한 말은 1할이다. 행동이라는 9할을 비운 채 말이라는 1할만 화려하게 꾸미는 사과는, 알맹이 없이 리본만 예쁜 빈 상자일 뿐이다. 사과문의 미사여구를 손보기 전에, 보상안의 빈칸부터 채워야 한다.

    “급할 것 없다. 충분히 검토하고 완벽하게 다듬어서 내보내자.”

    지연된 사과가 그럭저럭 넘어간 사례를 보고 타이밍을 사소하게 여긴다. 그러나 사과에서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가 또렷한 메시지다. 사과가 늦어진 만큼 사람들은 ‘버티다가 떠밀렸구나’, ‘계산하느라 늦었구나’라고 읽는다. 식어 버린 음식은 원래 맛과 다르다. 늦었는데도 통한 듯 보였다면, 그건 식은 음식을 손님이 배가 고파 그냥 먹어 준 것일 뿐이다. 적시성은 사과의 곁가지가 아니라 재료의 일부다.

    “우리가 이만큼 고개를 숙였으면 됐지, 뭘 더 바라나?”

    완전한 사과와 빈 상자를 가르는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누구를 바라보는가’이다. 제대로 된 사과는 상처받은 상대를 바라본다. 그가 무엇에 아팠고 무엇을 듣고 싶은지에서 출발한다. 빈 상자 사과는 거울을 바라본다. ‘사과하는 나’의 입장, 억울함, 체면이 한가운데 놓인다. 최고의사결정자의 개인적 속내나 서운함이 사과문에 끼어드는 순간,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두 번째 상처가 된다. 사과라는 선물의 주인은 건네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다.

    “책임을 인정하면 소송에서 불리하다. 표현은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가자.”

    빈 상자가 만들어지는 가장 흔한 통로가 바로 이 법적 방어 논리다. 법적 위험을 챙기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책임을 요리조리 피한 모호한 사과는 받는 사람에게 ‘사과가 아니라 변명’으로 읽히고, 줄이려던 여론의 불길을 오히려 키운다. 법정에서 한방으로 이기려다 광장에서 열방을 먼저 얻어 맞는 셈이다. 법무의 방패와 평판의 회복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손에 함께 쥐고 균형을 잡아야 할 두 개의 공이다.

    결국 사과의 값어치는 날씨에 비유하면 분명해진다. 날씨는 못 바꿔도 외투는 챙길 수 있다. 햇볕이 좋았다고, 폭풍이 너무 거셌다고 외투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똑같은 날씨라면 외투를 챙긴 쪽이 늘 덜 고생한다. 사과는 위기라는 궂은 날씨 속에서 기업이 챙길 수 있는 유일한 외투다.

    그래서 사과는 보험을 닮았다. 우리는 보험의 가치를 ‘어차피 올해 집에 불 안 났잖아’로 따지지 않는다. 운이 좋으면 빈 상자로도 한 번은 넘어간다. 그러나 운이 나쁜 날을 대비하는 것, 그것이 사과가 존재하는 이유다.

    불완전한 사과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실패’가 아니다. 빈 상자가 운 좋게 통해 버리는 ‘성공’이다. 그 한 번의 요행이 조직에 가장 나쁜 교훈을 새기기 때문이다. “사과는 알맹이 없이 겉만 그럴듯하면 된다, 나머지는 분위기가 해결해 준다.” 이 학습이 쌓이면, 기업은 위기에서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능력, 곧 ‘제대로 사과하는 힘’을 스스로 녹슬게 만든다. 그렇게 능력이 텅 빈 자리에 정작 운 나쁜 위기가 찾아오는 날, 기업의 손에는 운도 사과도 없이 빈 상자 하나만 남는다.

    게다가 빈 상자 사과가 남긴 신뢰의 빈자리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외상값처럼 장부에 차곡차곡 적힌다. 그리고 다음 위기 때 ‘그때도 그러더니’라는 이자까지 얹어 한꺼번에 청구된다. 빈 상자로 불을 껐다고 믿는 기업은, 실은 불을 끈 것이 아니라 다음 화재의 불씨를 곳간에 쌓아 둔 것이다. 불완전한 사과가 통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이, 기업이 가장 비싼 청구서에 외상으로 서명하는 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직원의 실수로 벌어진 위기인데요?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이번 사건도 그렇습니다. 이건 엄연히 저희 직원이 직무상 실수를 해서 발생된 사건입니다. 그에 대해서 회사가 해당 직원에 대해서 책임을 물어 내부적으로 조치를 했고, 대표께서도 도의적으로 사과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계속 회사를 비판하는데요.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먼저 조금 냉정한 말씀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느끼시는 억울함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실수한 직원에게 책임을 물었고, 대표께서 도의적 사과까지 하셨는데도 비판이 이어지니 심하다 느끼실 만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번 위기의 책임은 실수한 그 직원 개인보다 오히려 회사 쪽이 더 큽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을 회사가 놓치고 있기에 비판이 잦아들지 않는 것이지요.

    영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리즌(James Reason)이 제시한 ‘스위스 치즈 모델(Swiss Cheese Model)’이라는 유명한 사고 이론이 있습니다. 큰 사고가 터지면 사람들은 대개 실수한 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대형 사고는 결코 한 사람의 실수만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직에는 여러 겹의 방어선이 있습니다. 설계, 검수, 결재, 교육, 감독, 그리고 조직문화까지. 마치 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를 여러 장 겹쳐 놓은 것과 같지요. 평소에는 한 겹이 뚫려도 다음 겹이 막아 줍니다. 그런데 이 구멍들이 어느 순간 일직선으로 정렬되는 순간, 위험은 그대로 관통해 사고로 터지고 맙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고가 최일선 담당자의 손에서 터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검수와 결재, 교육과 문화라는 방어선을 ‘모두 통과한’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순간적 실수 뒤에는, 그 실수를 걸러내지 못한 여러 겹의 구멍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구멍들은 대개 경영진의 판단과 조직문화 속에 오래 잠복해 있던 ‘구조적 결함’입니다. 다시 말해 직원은 방아쇠를 당겼을 뿐, 그 총에 실탄을 채우고 안전장치를 풀어 둔 것은 회사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위기관리는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누가 실수했는가’를 찾는 데서가 아니라, ‘왜 우리의 방어선들이 한꺼번에 뚫렸는가’를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전자는 실수한 직원 한 사람을 징계하고 대표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끝나지만, 후자는 회사의 시스템 그 자체를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지금 공중이 비판을 거두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압니다. 이번 사건이 ‘어쩌다 한 직원이 저지른 일탈’로 정리되는 순간, 똑같은 사고가 언제든 다시 일어나리라는 것을 말이지요.

    이번 위기를 우연이나 개인의 일탈로 정의해 버리면, 문제의 핵심인 내부 체계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습니다. 구멍 뚫린 치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다음 사고는 예정된 수순이 되지요. 반대로 회사가 ‘이것은 우리 시스템의 문제였다’고 직시하고 그 방어선을 하나하나 손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비판은 잦아들고 신뢰는 회복의 길로 들어섭니다.

    직원의 실수를 감싸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실수를 개인의 것으로만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최일선의 실수를 걸러내는 것이 바로 회사의 체계이고, 그 체계를 만들고 지키는 것이 경영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억울함을 잠시 내려놓고 회사가 스스로 더 큰 책임을 지겠다고 나설 때, 그 위기는 비로소 반복의 고리를 끊고 관리되기 시작합니다.

  • 1. 신의 영역, 인간의 영역, 그리고 그 사이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위기가 닥친 기업의 회의실은 대개 아우성과 분노로 가득하다. 쏟아지는 비난 기사, 들끓는 소셜 미디어와 여론, 분노한 고객과 거래처, 몰려오는 기관들의 압박 앞에서 CEO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때 경험 부족한 CEO는 패착을 저지른다. 지금 이 순간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을 통제하려 드는 것이다. 여론과 언론의 입을 막으려 하고, 고객과 거래처를 힘으로 누르려 하고, 기관들을 마음대로로 움직이려 시도한다. 신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착각하고 뭐든 해 보려 하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의 거두 에픽테토스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는 일”을 꼽았다. 이 구분은 얼핏 ‘통제 가능’과 ‘통제 불능’의 단순한 이분법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업 위기 현장에서 이 원칙을 실제로 적용해 보면, 두 영역 사이에 세 번째가 반드시 존재함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잠재 통제 영역’이다. 즉시 바꿀 수는 없지만, 평시에 쌓아 둔 준비만큼 위기 시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이 그것이다. CEO가 상대해야 할 것은 결국 세 가지다. 지금 이 순간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는 외부 환경, CEO가 결단하면 즉시 바뀌는 내부 결정과 행동, 그리고 평소에 쌓아 둔 만큼만 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와 자산. 이 셋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모든 전략의 출발점이다.

    첫째, 통제 불가능한 것에 매달리는 집착을 끊자. 지금 이 순간 어떤 수를 써도 직접 바꿀 수 없는 것들은 신의 영역이다. 인간이 신의 권한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무능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다. 위기 상황에서 CEO가 이러한 대상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순간, 정작 자신이 완전히 통제해야 할 의사결정과 실행, 메시지와 내부 단속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신의 영역을 넘보다 인간의 영역마저 잃는 것이 위기관리 실패의 가장 전형적인 경로다.

    둘째, 지금 당장 통제 가능한 것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자. 위기 시 CEO가 즉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의사결정, 실행 조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조직 통제다. 이것들은 모두 CEO의 판단과 결단이 개입되는 영역이며, 지시하면 바로 바뀌는 것들이다. 통제 불가능한 여론과 비난은 거대한 장애물처럼 보이지만 외부 환경일 뿐이다. 그 장애물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전략은 지금 당장 통제 가능한 인간의 영역이다. 정교하게 관리된 내부의 통제 가능 요소들은 결국 외부 환경을 변화시킨다. 내부의 완벽한 대응이 외부의 비난을 잠재우는 길이 된다.

    셋째, 평시에 잠재 통제 영역을 꾸준히 확장하자. 언론과 탄탄한 신뢰를 구축하고, 준법 및 안전 체계를 고도화하며, 꾸준히 명성을 쌓는 행위가 그것이다. 잠재 통제 영역은 위기가 닥친 이후에는 넓힐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평시에만 가능한 투자이며, 위기 순간에는 이미 축적된 것만 쓸 수 있다. 반대로 평소 소홀했던 영역은 위기 시 통제 불능한 괴물이 된다. 언론 관계를 방치한 기업은 헤드라인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고, 준법과 안전 체계를 최소 비용으로만 유지해 온 조직은 작은 사고에도 전체 시스템이 흔들린다. 평판 관리를 방치한 기업은 단 한 번의 논란에 다년간의 브랜드 가치를 잃는다.

    CEO에게 필요한 것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다. 지금 당장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당장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평시에 내가 쌓아 두었거나 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의 답은 내려놓고, 두 번째 질문의 답에 집중하라. 세 번째 질문의 답은 오늘부터 투자를 시작하라. 위기는 준비된 자에게 돌파구를 허락한다.

    ※ 이 글은 정용민 대표가 피플워치에 연재한 [정용민의 CEO 탐구생활] 칼럼입니다. 원문: 피플워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