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이 글은 스트래티지샐러드 「위기관리 용어 사전」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 보기
결과책임(accountability)은 아래로 넘길 수 없다는 말이 최고경영자가 모든 사안에 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답변의 자리는 사안의 성격과 규모, 피해의 크기, 그리고 이해관계자가 누구를 향해 묻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정해진 자리보다 낮은 사람이 답하면 질문이 종결되지 않고, 필요 이상으로 높은 사람이 일찍 답하면 사안의 크기를 회사가 스스로 키우게 됩니다. 답변 주체를 정하는 일은 가장 높은 사람을 세우는 문제이기보다 정확한 자리를 찾는 문제입니다.
넘길 수 없다는 말의 뜻
결과책임이 위임되지 않는다는 표현이 실무에서 자주 오해됩니다. 사고가 나면 무조건 대표이사가 나서야 한다는 뜻으로 읽히는 경우입니다.
정확한 의미는 다릅니다. 아래로 넘긴다고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답변의 자리는 특정 지점에서 시작하되, 그 자리에서 답이 충분하지 않으면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위로 올라갑니다. 위로만 열려 있는 구조입니다.
부문에서 발생한 사안의 첫 답변자는 부문장일 수 있습니다. 그 답변이 질문을 감당하지 못하면 다음 답변자는 현장 팀장이 아니라 경영진입니다. 아래에는 갈 곳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를 구분해 두어야 합니다. 누가 사과할 것인가와 누가 답할 것인가는 다른 결정입니다. 사과는 회사가 시점과 형식을 정해 한 번 내놓는 것이고, 답변은 제기된 질문이 이어지는 동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은 뒤쪽입니다.
자리를 정하는 네 가지 기준
실무에서 답변 주체를 판단할 때 다음 네 가지를 함께 봅니다.
첫째, 문제가 된 판단이 어느 자리에서 이루어졌는가. 현장의 실행 오류라면 현장 책임자, 정책이나 투자나 구조의 문제라면 경영진, 지배구조나 조직 문화의 문제라면 최고경영자입니다. 답변자는 그 결정에 대해 권한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권한이 없던 사람은 질문에 답할 재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둘째, 피해를 되돌릴 수 있는가. 인명 피해는 원인이 현장의 단순 오류라 하더라도 답변의 자리를 자동으로 위로 올립니다. 되돌릴 수 없는 피해 앞에서 이해관계자가 묻는 것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에서 그치지 않고 이 회사는 어떤 회사인가로 넘어가며,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자리는 위에 있습니다.
셋째, 사안이 어디까지 걸쳐 있는가. 한 사업장에서 끝나는 국지적 사안인지, 여러 사업장과 전사에 걸친 구조적 사안인지에 따라 자리가 달라집니다. 반복해서 발생한 사안은 단발 사안보다 한 단계 위로 올라갑니다. 재발은 개별 사고가 아니라 관리 체계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이해관계자가 누구를 향해 묻고 있는가. 감독기관이나 국회가 특정 직위를 지목한 상황에서 그보다 아래에서 나온 답변은 기능하지 않습니다. 질문의 수신자를 회사가 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리가 낮으면 답이 되지 않습니다
흔히 대리 사과라고 부르는 대응이 있습니다. 사고 부문의 장이나 계열사 대표를 첫 답변자로 두고 최고경영자는 뒤에 남는 방식입니다.
이 대응이 반복해서 실패하는 이유는 사과하는 사람의 직위가 낮아서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기된 질문이 전사 차원의 결정이나 관리 체계를 향하고 있는데 부문 단위의 답변자가 배치되면, 그 사람은 질문에 답할 권한도 정보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답변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답할 수 없는 자리에 배치된 것입니다.
그 결과 질문은 종결되지 않고, 왜 저 사람이 나왔는가라는 질문이 하나 더 늘어납니다.
낮은 자리에서 답변이 이루어지면 회사가 이 사안을 그 정도 크기로 판단하고 있다는 신호도 함께 전달됩니다. 사안의 크기에 대한 회사의 인식과 이해관계자의 인식이 어긋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사안 자체보다 그 인식 차이가 문제가 됩니다.
자리가 높으면 다음이 없습니다
반대 방향의 실패도 있습니다. 사안의 크기에 비해 높은 자리에서 답변이 일찍 이루어지는 경우입니다.
최고경영자가 초기부터 답변자로 배치되면 두 가지가 발생합니다. 하나는 상향할 여지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후 사안이 확대되거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 질문의 층위가 올라갔을 때, 회사가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의 자리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회사가 이 사안을 최고 수준의 위기로 규정했다는 신호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통제 가능한 범위의 사안이 이 신호 하나로 확대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무에서는 두 가지를 함께 놓고 판단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답하지 않으면 늦는가, 지금 여기서 답하면 다음에 무엇이 남는가. 답변의 자리는 한 번 올라가면 내려오지 않습니다.
자리는 사건 이전에 정해 두어야 합니다
답변 주체를 사안이 터진 뒤에 정하면 늦습니다. 판단에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의 공백이 회사가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는 인상으로 읽힙니다.
실무적으로는 위기 유형별로 답변 자리를 미리 배정해 두는 방식을 씁니다. 어떤 유형의 사안에서 누가 첫 답변자이고,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자리가 위로 올라가는지를 사전에 정해 두는 것입니다. 조건은 앞의 네 가지 기준을 사용합니다. 인명 피해 발생, 복수 사업장 확산, 감독기관의 직위 지목, 동일 사안의 재발이 대표적인 상향 조건입니다.
여기에 답변자의 준비 상태가 함께 관리되어야 합니다. 자리만 정해 두고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이 질문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배정은 의미가 없습니다. 스트래티지샐러드가 경영진과 대변인을 대상으로 미디어 트레이닝과 대변인 트레이닝을 별도로 운영하는 것도 답변의 자리가 층위별로 다르고, 각 층위가 받게 되는 질문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답변의 자리를 정하는 일은 위기 대응의 첫 결정입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대체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근거로 삼은 표준과 자료
상법 제382조 제2항 · 제393조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9호 — 경영책임자등의 정의
Mark Bovens, Analysing and Assessing Accountability: A Conceptual Framework, European Law Journal (2007) — 답변 주체와 상대(forum)의 관계 규정
Ruth W. Grant & Robert O. Keohane, Accountability and Abuses of Power in World Politics,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2005)
답변 자리의 상향 구조와 네 가지 판단 기준, 자리가 낮을 때와 높을 때의 실패 구분은 스트래티지샐러드의 정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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