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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보대행사에 대하여..

    대행사에서 밥을 벌었던 경력을 바탕으로 답변드립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신 것 같아서 제가 그냥 올립니다. ^^

    문1) 홍보 대행사 분들의 이직률이 높은 데 이유가 있는지요. 능력, 경력이 올라감에 따라 더 조건이 좋은 곳으로 이직을 많이 하시는 건지..

    답1) 요즘에는 일반기업들도 이직률이 높습니다. 옛날보다는 능력에 따른 이직이 일반화 되었다고 봅니다.

    대행사 이직의 경우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제일 많은 사례는 클라이언트 또는 대행사 내부와의 부적응(여러 가지 근본 원인)으로 따른 대행사로 이직, 어느정도 경력이 되고 능력을 인정받은 후 더 나은 회사로 이직, PR업무 자체가 적성에 맞지 않아 다른 업종으로 이직 등으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AE에 따라 그 원인이 이 중에 하나가 되겠지요. 딱히 어느 원인이 많다고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2) 직원분들의 연령대가 타 업계에 비해 매우 낮은데 한국내 홍보대행사 자체의 역사가 짧아서 그런지요, 아님 직원분들의 타업종으로의 역이동이 많아서 그런지요.

    답2) 대행사 업무중의 대부분이 언론관계 및 퍼블리시티인데 이게 기자들과의 면대면이 주이기 때문에 나이먹은 분들은 점점 하기가 싫어 지게되지요. 또한 대행사 경영자측에서 보면 젊은 AE들이 해야 할 일을 나이먹은 AE가 월급 많이 받아가며 하는 게 보기 좋지가 않지요.

    따라서 바람직한 AE는 기존의 업무에 자신만의 전문분야를 개척해서 컨설턴트 업무로 진화를 해야 하는겁니다. 이 진화에 실패한 AE들은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입지를 잃는것이지요.

    물론 어느정도 훌륭한 경력이 되면 앞에 이야기 한데로 스카웃의 대상이 되어 인하우스로 옮기게 되기 때문에 대행사 분들이 젊기도 하지요.

    문3) 대행사 내에서의 비전은 어떻는지요. 밑의 사람들이 바라보고 능력에 따라 올라갈 직위가 질과 양적으로 체계적으로 되어 있는지, 아님 몇년 안가서 자의반 타의 반에 따라서 옮길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되는지.

    답3)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비전은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닌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비전은 내 자신속안에 있는것이지요.

    비전이 있는 AE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많은 훌륭한 선배들이 이를 입증합니다.

    문4) 일전에 한 유명 홍보대행사 이사 분께 연봉이 어느 정도 업계 수준이냐고 문의 했는데 열정이 없으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대기업 정도의 연봉을 받는 것은 생각하면 안될 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에는 낮아도 옮길 수록 능력에 따른 네고가 가능하다고도 하시는데 그건 대부분의 외국계 회사들도 그런거구요.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감이 안오는데 대졸 초봉과 경력 3년차가 대략 어느정도인가요.

    답4) 열정만 가지고 뛰어들어도 위험한 곳입니다. 열정과 지적인 기반이 균형을 맞추어 높아야지요. 초봉에 대해서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대행사는 철저히 시장가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막바로 대행사에 입사하는 신입 AE는 아직 Market Price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존재입니다. 초봉 네고라는 것이 이래서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회사만 훌륭한 회사라면 일단 들어가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면 됩니다. 그럼 당연히 Market Price가 부여되고 다른사람들이 보는 가격이 거의 비슷하게 인정을 받게 되면 그 때에는 자신에게 옵션이 많아 지게 됩니다.

    똑같은 3년차의 경우에도 AE에 따라 연봉에 있어서 1.5배에서 두배가량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물론 같은 회사에서 말입니다.

    이게 대행사에서 일하는 맛입니다.

    문5) 많은 홍보대행사 분들이 비전공자 분들이 많으신데 그런 경우에 대부분의 대행사들이 내부 교육프로그램은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비전공의 경우 더 많은 시너지를 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내실있는 컨설팅을 위해서는 적지않은 전공지식을 자유로히 내 칼과 같이 휘둘러야 하지 않을 까요.

    답5) 신입 또는 몇년차 이하의 AE들이 컨설팅 서비스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더구나 비전공자면 더 심한 것이지요. 전공자고 비전공자고 대행사 입사후 몇년동안은 직무전수를 꼼꼼히 받고 직접 몸으로 부딪혀 하나하나 검증을 해서 내것으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물론 대행사 내부에 충분한 교육시스템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클 AE는 스스로 큽니다. 스스로 학습의 동기부여가 되어야 성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행사 사장님들의 교육에 대한 투자 또한 점차 증가하고 있어서 너무 암울하지만은 않습니다.

    정리하면…PR대행사는 분명 젊은 커뮤니케이터에게 매력적인 곳입니다. 또한 Junior로서 여러가지 산업과 기업들을 다루어 보면서 자신의 적성을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물론 월급과 경력까지 쌓으면서 말입니다. 어디서나 어느 업종에서나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속안에서 비전을 찾아 이를 현실화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행사에 대한 훌륭한 인재들의 많은 도전을 추천합니다.

  • PR 대행사의 서비스論

    일반적으로 서비스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공짜, 무료, 선심”등의 뜻으로 사용되는 예가 많은 듯 합니다. 허름한 밥집에 가도 아주머니가 시키지도 않은 계란후라이를 하나 접시에 담아주면서 “이건 서비스야!”하시는 걸 보니 말입니다.

    대행사가 파는 서비스는 물론 공짜가 아니지요. Retainer fee라는 돈을 지불하는 유가(有價)의 서비스입니다. 고가(高價)의 서비스이기도 하지요.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 PR서비스는 비싼 서비스입니다. 한달에 5-600만원정도 이상인 월 Retainer fee도 년간 베이스로 보면 6-7000만원짜리고 거기에 직접경비와 프로젝트등을 더해서 평균적으로 한 클라이언트가 대행사에 지불하는 돈은 어림잡아 일년에 1억남짓합니다.

    일부 대행사 사장님들께서는 이 retainer fee라는 것은 대행사와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를 유지 말 그대로 retain하는 데 드는 비용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신걸로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로 해석하셔서 “어쨋거나 시간이 지나면 달마다 회사통장에 입금되는 공(空)돈”으로 retainer fee를 보시면 안됩니다.

    retainer fee에도 그 가치에 맞는 서비스의 세부내역이 분명 있습니다. 일종의 retainer service package라는 것인데…모니터링을 포함, 보도자료, 기자응대 및 자료전달, 미디어리스트 개발 및 업데이트, 월간 모니터링 및 활동보고서등등의 기본적인 서비스 묶음이지요.

    한국인들은 항상 계약서를 하나의 요식행위로 생각하는데 분명 계약서에는 대행사가 클라이언트에게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들이 조목조목 적혀 있습니다. 각각의 서비스를 제공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주제가 될 수 없지요. 문제는 그 각각의 서비스가 과연 retainer fee만큼의 가치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입니다.

    에이전시와 클라이언트간의 controversy는 여기서 생겨나는 법이지요. 제가 대행사와 인하우스에 머무르면서 느끼는 것인데 대행사는 “over service”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인하우스는 똑같은 서비스를 보고 “under service”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대행사에서 지내다가 인하우스로 들어온 제가 이렇게 생각될 정도면 본래 인하우스에 계신분들은 어떨까요? 아마 그 느낌은 더욱 강할 듯 합니다.

    비지니스도 어떻게 보면 커뮤니케이션인데.. 현재 PR대행사들은 얼마나 커뮤니케이션을 잘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잘하시는 곳도 계시겠지만..)

    우선 retainer fee가 항상 불만족스럽다고 PR대행사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이 회사에 PR서비스를 시작한지가 어언 몇년이 지났는데 그 이전하고 지금하고 retainer fee가 몇% 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 계약 갱신때는 얼마로 올려달라. 이런말들이 인하우스에게 전해지고는 하지요.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Retainer fee는 분명 외부 사업체에게 지불하는 cost입니다. 사내에 있는 직원들이 근무 연차에 따라 월급이나 연봉이 상향조정 되듯이 시간이 갈 수록 자연히 오르는 그런 성격이 아닙니다.

    직원들의 연봉도 협상을 합니다. 각자 자기의 업적을 잘 포장하고 디자인해서 상급자들과 기나긴 면담과 네고 프로세스를 거친 후 단 몇 % 오른 금액을 지급받습니다. 그렇게 보면 대행사는 자신들의 업적을 어떻게 인하우스와 커뮤니케이션하고 있을까요?

    PR의 효과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PR이 효과적이라는 거 우리 모두다 아는 사실인데 뭐 그걸 입증해야 하나? PR이 없었다면 이 회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상상해 보실렵니까? 나를 봐서라도 내얼굴을 봐서라도 얼마 올려주시길…등등이 일반적인 접근이지요. 논리적인 deal과 negotiation이 참으로 부족한 듯 합니다.

    대행사에는 quality control manager 또는 client management manager등의 직책과 역할이 필요할 듯 합니다. 어떻게 클라이언트에게 만족감을 주고 제대로 관리를 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 어떤 수준의 품질을 제공해야 하는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하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클라이언트 관리라고하면 클라이언트를 접대하고 등등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분들도 계실 텐데 그건 아닙니다.

    Top Manager들 중 하나가 자신의 대행사 클라이언트들을 각각 분기별로 만나 식사를 하면서라도 자신의 대행사 담당 AE들이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지 또한 제공되는 서비스의 품질에 만족하고 있는지, 어떠한 개선점이 있는건 아닌지 등등을 직접 듣고 개선점을 마련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기적인 feeback 시스템은 건강한 클라이언트관리를 가능하게 하고 장기간의 파트너쉽을 구축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일년내내 공유된 service & performance관(觀)을 가지고 가는 셈이지요.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 인하우스와 에이전시는 참으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갭을 메우는 대행사만이 “서비스가 완벽하다”는 호평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전 대행사 선배들로부터 “에이전트의 첫번째 행동요령은 ‘침소봉대’”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안바빠도 바쁘다. 힘안들어도 힘들다. 작아도 크다. 적어도 많다..등등 무슨이유인지는 몰라도 에이전트는 바쁘고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이미지를 인하우스에게 주어야 한다는 주문이었지요. (상당히 비지니스적인 발상입니다.)

    좋습니다. 비록 이 행동요령이 약간 윤리적이지는 못하다손 치더라도 이런 모습을 프로페셔널하게 보여줄 수 있으면 그야 다행입니다. 문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관계적인 서비스 품질 증진 방안

    -클라이언트에게 하루에 한번 캐쥬얼 전화하기 (아무 목적이 없어도 업무진행인사 등)
    -이메일로 소솔한 정보들을 물어다 주기
    -인하우스 경영자들이나 key person들이 기사화 되었을 경우에는 해당 기사를 아름답게 인쇄하고 액자화해서 개인적으로 선물하기
    -인하우스 PR담당 이외에도 다른 주변 업무 담당자들과도 친하기 (예, 마케팅, 기획, 영업 팀장급들)
    -정기적으로 인하우스와 소주먹기 (AE의 개인적 피드백)
    -월간모니터링 및 활동보고서는 직접 인하우스를 방문해 손으로 전달하기 (프리젠테이션을 하면 더 좋음)

    기본적인 서비스 품질

    – 프로페셔널한 의상 및 look (남자: 깨끗하고 약간 비싸보이는 정장+구두+악세서리, 여자: 약간 고상해보이는 정장 +구두+ 악세서리, 그리고 남년 공히 프로의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한 브리프케이스):누가보아도 프로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준
    – 간결하고 상큼한 프리젠테이션 능력 및 언어 구사력
    – PR은 문서로도 말한다.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뚝뚝 떨어지는 보고서, 제안서, 스테이셔너리 등등
    – 프로페셔널리즘은 고급을 의미한다. 각종 프리젠테이션장비(빔프로젝터, 레이저포인터, 스크린, 음향기기 등등), 업무장비(노트북, 데스크탑, 전화, 프린터, 복사기, 디지털카메라, 스캐너류)등은 말쑥하고 고급이어야 한다. – 최소한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비치된 것들보다는 나아야 한다.
    – 전문성 및 여러가지 사실에 능통한 지식

    이상과 같은 서비스 품질이 전제되는 상황하에서 계약은 지속되고 더욱 발전강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퍼포먼스는 항상 최상이라는 것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럼 이글을 읽는 대행사분들은 또 한마디씩 하실 것 같습니다. “돈만 많이 줘봐라 그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한다!” 맞습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나 하는 해결점 없는 논쟁의 주제는 아닙니다. 간간히는 돈을 많이 주어도 하지 않는 대행사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상과 같은 서비스 품질에 대한 실천유무는 재정적인 원인에 기반하지 않고 경영자의 경영철학과 비전 그리고 정체성에 기반한다고 봅니다.

    이런 가치들을 공유하고 있지 않는 대행사들에게 대규모의 retainer fee는 차라리 마취제나 쥐약과 같습니다. 대행사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 시키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본글을 줄여보자면 현재 대행사들은 자신의 서비스와 역할 및 가치에 대한 논리적인 지원이 상당히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서비스품질의 향상에 있어서 경영철학, 비전 및 정체성에 기반한 사고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항상 대행사관련 글에서는 대행사 사장님들의 경각을 바라는 끝맺음을 하곤 하는데 이 서비스에 관한 이야기는 일선의 AE들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스스로 가능한 해결 및 발전방향을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멀리서 친정을 바라보면서 아쉬운 마음에 글을 올립니다.

  • “우리의 피는 자주색이다!” – 페덱스(Fed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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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피는 빨간색이 아니라 자주색이다!” – 페덱스

    정용민

    세계 210여개국을 대상으로 항공기 640여대와 4만 5천여대의 화물 차량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기업. 2002년도에는 매출 220억불(한화 약 28조원)을 기록. 계열사를 합쳐 직원만 19만명. 어느 대형 항공사이야기인가 하겠지만 이는 한 화물배달업체의 이야기다. 이름은 페덱스(Fedex).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라는 지방 도시에서 태어난 이 ‘배달회사’는 참으로 재미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직원만족 경영 때문에 직원들은 자신들의 피가 페덱스 로고의 색깔인 ‘자주색’인줄 안다니 말이다.

    전날 밤에 미국 LA에서 맡긴 소포를 태평양을 건너 바로 다음날 오전 한국 서울의 사무실에서 받을 수 있는 꿈같은 이야기를 페덱스는 매일 만들어 낸다. 고객이 자신이 발송한 화물이 현재 어디 있는지를 추적할 수 있게도 해준다. 만약  배달에 착오가 생기면 고객에게 요금을 돌려주는 웃기는(?) 회사도 페덱스다.

    각지에서 걸려오는 고객들의 전화를 2초 안에 받기 위해서 미국에만 16개 콜센터에 3500명이 대기시킨다. 비행기 고장 등 비상상황에 대비해 미국 전역에 24시간 비행기를 6대씩이나 덩그런히 비상 대기시킨다. 한가하게 대기만 하는 것만은 아니다. 몇 년 전 9·11테러가 발생하자 24시간 만에 위험을 무릅쓰고 수백톤에 이르는 구급약 등을 현장에 배달해 칭찬도 들었다.

    97년 여름, 경쟁사인 UPS의 직원들이 장기파업에 돌입해 급한 화물들이 구름같이 페덱스로 몰려들었다. 이때 페덱스의 직원들은 ‘나의 피는 자주색(페덱스사의 로고 색깔)’이라며 매일 밤늦게까지 자발적으로 우편물을 분류했다. ‘다음날까지 무조건 배달’이라는 페덱스와 고객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고객을 신(神)같이 받들어 모시는 회사. 그렇다고 직원들만 애꿎게 희생하는 회사도 아닌 곳. 고객도 직원도 회사도 함께 상생(win-win)하는 모습.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 다 이유가 있다.

    페덱스에서는 파트타임직원도 CEO가 될 수 있다고?

    1976년 데이비드 브론젝이라는 이름의 한 청년은 최하위급 배달직원(쿠리어)으로 페덱스에 첫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는 24년 후인 2000년, 페덱스 그룹의 계열사인 페덱스 익스프레스의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같은 회사의 데이브 레브홀츠 부사장은 6만명의 임직원을 지휘하는 페덱스의 핵심인재. 그러나 그도 76년에는 페덱스 사업장에서 트럭을 세차하고 비행기에 짐을 싣던 파트타임 직원이었다. 페덱스 고위 임원들 중에는 쿠리어 출신이 무척 많기 때문에 이들의 성공담은 페덱스에서는 별 이야깃 거리도 되지 못한다.

    한번 페덱스 맨은 영원한 페덱스 맨?

    페덱스에서 한국의 상무정도의 직급 경영진은 약 3백50명. 이 중 85%는 내부에서 승진했다. 중간관리자들까지 합치면 외부 채용 비율은 겨우 3~7% 정도다. 금융, IT 등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직종이 아니면 페덱스 맨이 우선이다.

    인력개발을 위해서 간부급인 매니저는 물론 쿠리어 같은 하위 직급들도 지역본부별로 마련된 프로그램에 따라 끊임없이 교육을 받는다. 따라서 페덱스 인력의 3~5%는 매일 교육 중인 셈이다. 고객에게 잘 봉사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내부에서 커온 직원이며, 그런 직원에게 회사가 잘해줘야 이익도 많아진다는 것이 페덱스의 일관된 생각이다.

    하위직급에겐 훌륭한 직장, 상급자에게는 고달픈 시험장?

    직원 존중의 전통 때문에 페덱스는 미국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기업으로 꼽힌다. 페덱스는 미국 기업으로선 드물게 무해고 정책을 자랑한다. 업무 평가가 나쁜 직원이라도 냉정하게 내보내지 않는다. 대신 직무향상 계획(Performance Planning)을 통해 회생의 기회를 준다. 상급자는 어떻게 든 하급자를 끌고 가야 한다. 상급자가 리더쉽을 발휘하라는 이야기다.

    매년 한 차례 전직원을 대상으로 회사와 임원, 간부들을 평가한다. 이 조사에서 만약 2년 연속 기준 점수 이하를 받은 임원이나 간부는 스스로 군말 없이 짐을 싸야 한다. 그래서 하위 직급 직원들 중에는 리더십에 따른 책임을 지기 싫어 일부러 간부가 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대신 이러한 혹독한 리더십 수련을 거치고 페덱스의 임원을 지낸 인재는 리더십에 관한 한 다른 미국 기업에서도 능력을 인정 받기 때문에 스카우트의 표적이 된다

    페덱스의 경영진은 직원을 존중하고 공정하게 대우하여 회사에서 상실감과 슬픔을 느끼지 않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최고 경영자의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경영자는 직원들과 항상 친밀하게 접촉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것이 상하간 커뮤니케이션이 자유로운 현재의 기업문화를 낳게 했다.

    항상 기업들은 ‘고객만족’을 말한다. 어느 기업은 ‘고객만족’을 넘어 ‘고객감동’ ‘고객행복’, 심지어는 우스개 소리로 ‘고객기절’까지도 추구한다고 한다. 미국의 성공한 기업들은 곧 고객들을 만족시키고 감동시키는데 성공한 기업들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보면 항상 비슷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고객을 만족 시키기 위해 먼저 직원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직원이 자신의 일터와 업무 그리고 마음 편한 환경에 만족하도록 회사는 성심을 다한다. 행복한 직원들은 고객들을 행복하게 대하게 되고 자신이 무엇을 해서 자신의 고객을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행동에 옮기게 된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원리를 믿는 것 같다.

    페덱스는 이러한 측면에서 완벽하게 직원감동에 성공하여 고객감동을 이룬 기업이다. 일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310만개의 화물을 배달하면서도 항상 웃는 페덱스 직원들. 잘못 된 주소로 배달된 화물 하나를 가지고 직접 300km를 운전해가서 고객의 손에 쥐어준 한 페덱스 직원의 이야기 같은 것들이 그 증거다.
     

  • 커피를 갈아 금으로 만드는 기업- 스타벅스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성업하고 있는 세계적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Starbucks). 1987년 하워드 슐츠가 인수한 스타벅스는 당시 전국에 11개 점포와 종업원 100명을 두고 있었다. 16년이 지난 지금 스타벅스는 전세계 30개국 6300개 점포를 자랑한다. 종업원만 7만명이다. 700배 성장한 셈이다. 하워드 슐츠의 커피를 통한 혁신은 어떤 것이었을까? 여러분들도 스타벅스에 들어설 때 마다 커피 향에 섞여 있는 혁신의 향을 음미하길 바란다.

    스타벅스의 성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의 커피 문화를 알아야 한다. 맥스웰 스타일로 통하는 미국의 커피는 한마디로 싸고 부담 없는 음료다. 필자가 유학생활을 하던 90년대 뉴욕 한 동네의 조그마한 도넛가게에서 매일 사먹던 커피의 가격은 75센트. 우리나라돈 1000원가량의 단순한 먹거리였다. 미국인들은 그냥 허름한 가게에서 커피를 아무 생각 없이 사먹는 것이다.

    뉴욕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란 하워드 슐츠는 가난했지만 미식축구를 잘해 겨우 대학에 들어간다. 그러나 대학 시절 중반에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고학과 학자금 융자로 학교를 졸업한 뒤 제록스사 세일즈맨을 거쳐 스웨덴계 가정용품 회사에서 주방기기 판매로 능력을 인정 받아 부사장으로 승진한다.

    미국내 영업을 총괄 관리하던 중 시애틀의 한 소매상에서 커피 끓이는 용구를 다량 구입하는 데 눈길이 끌렸다. 어떤 회사인지 궁금해 알아본 것이 바로 스타벅스였다. 1971년에 시애틀에서 조그만 커피점으로 시작된 이 스타벅스를 하워드 슐츠는 1981년 처음 찾아 갔다. 고급원두커피에 매료된 그는 좋은 직장을 때려 치우고 이 스타벅스에서 마케팅 담당으로 이직한다.

    1983년 우연히 슐츠는 이탈리아의 고급 에스프레소 바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기존의 스타벅스를 고급 스타일의 원두커피 바로 변화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당연히 기존 경영진들이 그러한 변화를 좋아 할리가 없었다. “무사안일에 빠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면 내 인생은 끝”이라는 생각으로 스타벅스를 관둔 슐츠는 자기가 꿈꾸던 이태리 스타일 커피전문점 “일 지오르날레”를 연다.

    일 지오르날레에서 슐츠는 정통 이탈리안 커피숍의 느낌을 재현하고자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매장에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틀어 놓았고, 종업원은 나비넥타이를 매도록 하였다. 서서 즐길 수 있는 바(Bar)만 준비되어 있을 뿐, 의자는 없었다. 슐츠는 커피의 향을 해칠 수 있는 무지방 커피를 제공하지 않았다. 메뉴 또한 모두 이탈리아 말로 쓰여져 있었다. 실내장식도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이탈리아식으로 꾸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이와 같은 이탈리안 커피숍의 분위기가 시애틀에서는 잘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고객들은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오페라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고, 종업원마저 나비넥타이를 불편해했다. 게다가 사람들은 앉아서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의자를 요구했다. 그래서 슐츠는 고객의 니즈에 맞도록 차츰 매장을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음악을 바꾸고, 의자를 갖다 놓았다. 심지어는 무지방 커피까지도 그들의 메뉴에 등장하였다. 유럽식 스타일에 고객만족이라는 미국식 경영방식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이탈리안 스타일의 미국식 커피숍이 생겨 나게 되었다.

    1987년 슐츠는 스타벅스의 경영진들로부터 스타벅스를 인수하지 않겠냐는 전화를 받게 된다. 슐츠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타벅스의 시애틀 점포들과 원두처리공장, 그리고 상호를 400만 달러에 사들였다. 곧 그는 자신의 집념이 담긴 ‘일 지오르날레’ 상호를 스타벅스로 개명하여 제2의 창업을 하게 된다.

    슐츠는 이 스타벅스를 통해서 미국인들에게 유럽 스타일의 고급문화를 전하게 되었다. 대중문화에 익숙해 있던 미국 소비자들에게 스타벅스는 세련된 만남의 장소, 고급스러움, 안락함, 대화, 독창적인 커피 음료 등을 제공하는 새로운 커피 문화 그 자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를 슐츠는 ‘스타벅스 경험(Starbuck Experience)’라고 부른다. 그는 “스타벅스는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판다”고 말한다.물론 스타벅스는 최고 품질의 커피를 만든다. 인공 향을 넣지 않고 프랜차이즈로 운영하지도 않는다. 커피가 쉽게 상하지 않는 최신 포장 기술을 개발해 자신의 고급 원두 커피를 해외로 수출한다.

    그러나 스타벅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 존중의 철학이다. 어떤 기업경영 가치보다도 `인간`은 그 위에 있다. 처음 슐츠는 종업원들과 회사 발전전략을 논의할 때 `위대한 회사(great company)`를 만들자고 약속했다. 인간 정신을 존중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게 슐츠와 종업원들이 공유하는 위대한 회사의 의미다. 스타벅스가 어떤 미국 기업들보다 이직률이 낮고 존경 받는 기업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혁신적이고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 종업원들에게 스며 들어 있는 스타벅스의 정신이다. 스타벅스는 예스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연공서열도 없다. 휴대용 종이컵이나 스타벅스만의 음악 CD 같은 튀는 아이디어는 언제나 환영이다. 그런 종업원들에게 스타벅스는 `브라보` 상을 준다.

    하워드 슐츠가 75센트짜리 미국식 커피를 3달러짜리 유럽식 커피로 재창조하는 첫번째 혁신에 성공했다면 스타벅스의 직원들은 인간존중, 자선, 사회적 신뢰, 자긍심과 같은 두번째 혁신에 성공했다. 연간 스타벅스에서 팔리는 커피 약 4000억잔과 한달 평균 18번씩 스타벅스를 찾는 전세계의 고객들은 이러한 혁신의 브랜드에 대한 사회적 존경을 상징한다. 항상 위대한 회사는 존경스러운 법이다.

  • 일관성을 지키며 변화에 성공한 월마트(Wal M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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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포츈 500 기업들 중 1위,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들 중 2위, 2002년 한해 2천450억 달러(한화 약 294조)의 매출, 종업원수 140만명. 이 것이 세계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에 대한 소개다. 매출액은 우리나라 1년 예산인 112조5천억원의 2배를 훨씬 넘고 매주 월마트에 들러 쇼핑하는 인구가 전세계 4~5천만명에 이른다니 우리나라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이들은 어떻게 성공했으며 왜 성공할 수 밖에 없었을까?

    1962년 우리에게는 클린턴 대통령의 고향으로 알려진 미국 아칸소에 샘 월튼이라는 한 40대 잡화상이 할인점을 하나 열었다. 그 이름은 월마트(Wal Mart). 당시에는 이미 K마트, 울코, 타깃 같은 대형 할인점들이 대도시에서 성업 중이었다. 이후 30년이 채 안되어 월마트는 이들 선두 주자들을 밀어내고 세계최대의 유통업체로 뛰어 오른다.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핵심철학은 지킨다

    월마트 1호점에 최초 내걸린 문구는 “우리는 항상 싸게 팝니다(We sell for less, always)”와 “고객의 만족을 보장합니다”였다. 이들 철학은 언제나 가장 낮은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물품을 공급한다는 창업자 샘 월튼의 신념이었다.

    이후 월마트는 ‘5년 이내에 아칸소주에서 수익성이 가장 높은 회사가 된다(1965)’ ‘4년 이내에 10억 달러짜리 회사가 된다(1977)’ ‘2000년까지 점포 수를 2배로 늘리고 제곱 피트당 매출액을 60% 증대 시킨다(1990)’ 등과 같은 구체적 비전을 제시해 구성원들의 열정을 이끌어냈다.

    1992년 샘 월튼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후계를 이은 데이비드 글라스는 모든 부문에서 ‘철저한 원가절감을 통한 최저가 상품 공급’이라는 샘 월튼의 경영철학을 ‘그대로’ 계승해 발전시켰다. 이렇듯 우리는 월마트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그들만의 핵심 철학만은 ‘일관되게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객을 향한 철학 – 고객은 항상 옳다!

    월마트가 가진 독특한 또 하나의 철학은 ‘고객은 항상 옳다(Customer is always right)’는 믿음이다. 샘 월튼은 “항상 고객들에게 신뢰를 주어야 하며, 고객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고객은 우리에게 와 물건을 살 것이다”라며 직원들에게 고객제일주의를 강조했다.

    월마트에는 크리에이터로 불리는 독특한 안내 직원들이 있다. 이들은 해당 지역 출신의 아줌마 아저씨들로 구성되어 있고 월마트에 들어오는 고객들에게 미소로 반기며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크리에이터의 존재는 고객들에게 기분 좋은 쇼핑과 점포에 대한 친근감을 제공한다.

    또 월마트는 직원들의 웃옷에 모두 ‘만약 미소 짓지 않으면 1달러를 가져가세요’란 문구가 적인 명찰을 달게 한다. 고객을 만나 미소 짓지 않는 직원에게 고객은 언제든지 1달러를 요구할 수 있다. 이 1달러를 일명 ‘스마일 1달러’라고 부른다. 스마일 1달러는 매장 판촉 직원에서 매니저 까지 예외가 없다.

    이밖에도 월마트는 고객이 10발짝 이내에 있다면 고객의 눈을 응시하고 반기며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말을 걸도록 교육 시키는 ‘10 발자국 룰’, 회사에 들어온 요청은 국내외에서 들어온 것을 막론하고 요청 당일 해가 지기 전까지 해결한다는 ‘Sundown Rule’등을 실천하고 있다. 이렇듯 월마트에서는 고객제일주의라는 기본원칙을 지키기 위해 조직의 모든 시스템과 제도들이 유기적으로 연계 운영되고 있다.

    행복하게 일하는 회사 월마트

    구성원에게 최고의 대우를 하되 최고의 성과를 요구 한다는 게 월마트 샘 월튼의 이념이었다. 최고의 자부심을 가진 종업원이 최고의 고객만족과 효율적 매장운영을 이루어 내는 법이다. 따라서 월마트는 직원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작업환경 개선에 힘쓰고, 의료비 지원은 물론 목표 이상의 실적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공정하게 이윤을 분배함으로써 매년 가장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최고 경영자가 직접 커피를 타 마시고, 최고 경영자와 경영진은 4평 남짓한 작고 검소한 사무실을 사용하며, 잦은 현장방문을 통해 구성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킨다. 또한 전 직원이 서로를 ‘고객에게 봉사한다’는 공통 목적을 갖는다는 뜻에서 ‘동료(associate)’라 부른다. 회장을 비롯한 모든 종업원이 월마트 심벌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일하는 평등주의도 재미있다.

    자발적 서비스 정신 고취를 위해 회사측에서는 직원들의 사기진작에도 힘쓴다. 특히 하루 업무 개시 직전에 매장의 전직원이 함께 모여 월마트 구호(Wal Mart Cheers)를 외치는데 이를 통해 직원들은 월마트에 대한 소속감과 주인 의식 및 자부심을 느끼고 이를 고객 서비스 향상으로 이어나간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월마트 구호는 샘 월튼이 70년대 한국 방문 당시 우리나라 중소제조업체 직원들이 작업전 회사 구호를 외치는 장면을 보고 미국에 건너가 자사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메이드 인 코리아’ 방식이다.

    현재 월마트는 미국내에서만 3,000여개가 넘는 촘촘한 점포망을 구비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멕시코 587개, 영국 256개 등 한국을 포함한 9개 국가에 1,227개 점포를 운영중이다. 샘 월튼은 생전 늘 “한때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항상 변화의 최전선에 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일관된 철학을 기반으로 한 끊임없는 변화 노력은 언제나 보답을 받게 마련이다. 성공적 혁신은 일관성과 변화의 오묘한 칵테일로 비유될 수 있겠다.

  • 나이키(Nike): 홈런을 위해 ‘저스트 두 잇 (Just Do It)’!

    홈런을 위해 ‘저스트 두 잇 (Just Do It)’! – 나이키(Nike)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창립 29주년의 나이키는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1위의 스포츠용품 업체다. 브랜드 가치만 해도 세계 10위권에 드는 초일류기업 중 하나다. 과감한 디자인과 혁신적 기능을 무기로 소비자들을 사로 잡아온 이 회사의 매출액은 100억 달러 (한화 12조원). 나이키의 창립자 필 나이트(Phil Knight)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잔말 말고 그냥 해보라니까 (Just Do It)!”

    필 나이트는 항상 “남을 앞서기 위해서는 모범적 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세상이 수용하는 기존의 형식을 따르면 한 번도 세상을 앞설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과 문명의 틀을 넘어서라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하고 힘든 주문이다.

    필 나이트는 대학 시절 중거리 달리기 선수였다. 그러나 성적은 중간에 지나지 않았다. 졸업 후 그는 프로 선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선수 시절 신발에 대한 관심이 그를 신발업계에 뛰어들게 했다.

    1964년 500달러(한화 60만원)의 자본금으로 ‘블루 리본 스포츠 (Blue Ribbon Sports)’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신발 회사를 설립했다. 포트랜드 외곽에 차린 이 회사는 벽만 있는 허름한 매장이었다. 최초의 상표명은 ‘타이거’였다. 주말마다 그는 초록색 소형 트럭을 손수 몰고 전국의 신발업자를 찾아 다니며 신발을 팔았다.

    당시 아디다스 판매 사원들의 비웃음을 받으며 그는 첫 해에 겨우 1,300켤레를 팔았다. 년간 판매 8천 달러에 이익은 250달러(한화 30만원)였다. 그러나 15년 후 1980년 나이키는 아디다스를 제치고 미국 내 판매 1위를 차지했다. 30년이 채 못된 1993년에는 1억 켤레 판매를 돌파했다.

    1971년 필 나이트는 포틀랜드에서 광고를 전공하던 대학생 캐롤린에게 신발 옆 부분에 들어갈 로고 디자인을 부탁했다. 그녀는 그에게 스워시 (Swoosh, 현재의 나이키 로고, ‘휙’이라는 뜻)를 만들어 주고 35달러를 받았다. ‘V’자를 부드럽게 뉘어놓은 듯한 나이키의 로고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날개를 상징한다.

    남과는 뭔가 다른 것을 찾아야 성공한다

    미국의 1970년대는 신발의 혁명 시기였다. 나이키는 이 호기를 “뭔가 다른 방식”을 통해 장악 했다. 필은 신발 광고를 했다. 그는 당시 테니스 선수 죤 맥켄로를 스폰서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그는 심판에게 욕설을 퍼부어 늘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나이키는 80년대 당시 최고의 농구선수 매직 죤슨과 래리 버드 대신 노쓰 캐롤라이나 대학의 신인 마이클 조던과 계약했다.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만을 위한 신발을 디자인했고 그것을 ‘에어 조던(Air Jordan)’이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NBA에서 검정색 농구화가 허용되지 않았지만 ‘에어 죠던’은 검은 색과 빨강이었다. 마이클은 한 게임당 1000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그러나 벌금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신었다. 필 나이트는 소비자들의 관심과 논쟁이 벌금보다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연히 수많은 소비자들이 나이키 매장에서 에어 조던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80년대 말 나이키의 매출은 연간 8억 7천만 달러에서 40억 달러로 5배나 급격히 뛰어 올랐다. 필 나이트는 나이키 운동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파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이키 운동화를 와서 사도록 만든 것이다. 뉴욕의 전문직 여성들이 출근길에 양장에 나이키 조깅화 차림으로 달리다가 사무실에 도착해 하이힐로 바꾸어 신는 문화를 정착시킨 것도 나이키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마이클 존슨이 신었던 ‘황금신발’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메리언 존슨이 입었던‘Swift Suit (속도복)’는 나이키의 스포츠 과학의 승리였다. 나이키는 단순한 스타 마케팅을 넘어 스포츠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비전까지 제시해준다. 최근에는 골프 천재이자 최초의 흑인 골퍼인 타이거 우즈를 통해 나이키는 계속 ‘뭔가 다른 방식’으로 운동화에 인격을 불어넣고 있다.

    나이키의 상대는 소니, 닌텐도 그리고 애플?

    이제 나이키는 경쟁상대로 아디다스, 리복 같은 동종업체를 꼽지 않는다. 소니, 닌텐도, 애플 등이 자신들의 경쟁상대라고 한다. 나이키 소비자들이 그들의 제품도 사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이들의 혁신을 지켜보고 나이키를 지켜본다. 만일 소니가 더 많은 기능에 더 작은 전자제품을 선보이면 나이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키는 고품질의 신발도 중요하지만, 자사의 제1경쟁력을 ‘혁신적 디자인의 제품을 시장에 가장 먼저 내놓는 것’으로 삼고 있다. 나이키는 거대한 혁신 즉 홈런 한방을 연이어 노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구/개발 쪽으로 엄청난 돈을 투자한다.

    나이키는 현재 신발과 의류용품 분야 등에서 동종 업계 최다수의 디자이너를 확보하고 있고 최대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창업 30여 년 만에 나이키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필 나이트 회장을 비롯한 나이키 전 구성원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창의성을 존중하는 기업문화를 가꾸어온 때문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새로 찾아 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은 더 어렵다. 혁신은 남이 하지 않았고 하기도 싫어하는 일을 과감히 해내는 것이다. 혁신은 그래서 어렵다고 한다. 혁신은 나이키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창의성’을 먹고 자란다. 창의성 개발을 위해 오늘 자신의 책상 앞에 나이키가 우리에게 준 교훈을 써 붙여보자. 저스트 두 잇 (Just Do It)!. “잔말 말고 한번 해보라니까!” 성공할 꺼라 믿기만 하면 된다. 어려워 보이지만 간단하다.

  • 롤리타 렘피카: 프랑스 시장을 무너뜨린 한국의 트로이 목마

    글로벌 마케팅의 세계를 가다

    3회: 한국 태평양 롤리타 렘피카 향수

    프랑스 시장을 무너뜨린 한국의 트로이 목마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세계 27위, 53살 짜리 한국의 화장품 회사가 화장품의 나라 프랑스에서 큰 사건을 냈다. 프랑스인이 이끄는 프랑스식 회사를 만들어 프랑스식 향수를 팔아 프랑스 시장을 삼켜버린 것이다. 그 누구도 유명향수 ‘롤리타 렘피카’를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프랑스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보낸 ‘트로이의 목마’로 보지 않았던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1945년 설립된 화장품 회사 태평양은 1990년 프랑스에 PBS라는 현지법인을 세워 ‘리리코스’라는 기초화장품을 생산했었지만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프랑스에서는 기초화장품보다 향수나 색조화장품이 인기라는 점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은 이 실패의 교훈을 통해 한국 화장품 시장의2-3% 정도인 향수시장이 프랑스에서는 32%나 된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고 이 시장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태평양은 야심찬 ‘현지화’ 전략을 세웠다. 프랑스 향수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자본만 제공할 뿐 기획, 디자인, 제조 및 판매를 모두 프랑스 현지인들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1995년 설립된 프랑스 현지회사 PCP(PACIFIC CREATION PARFUMS)에는 한국인 파견직원 2명을 제외한 150명이 모두 현지 채용인들로 채워졌다.

    프랑스의, 프랑스에 의한, 프랑스를 위한 향수

    특히 태평양은 당시 크리스찬 디오르 이사인 카트린 도팡을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로 영입했다. 그녀는 지난 74년 이브생로랑에 입사해 유니레버, 이브로세 등에서 근무한 화장품 업계의 전설적인 영업통이었다.

    그녀는 소비자들에게 낯선 새로운 브랜드를 만드는 대신 유명 디자이너와 손잡고 그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브랜드로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을 택했다. 당시 ‘롤리타 렘피카’는 주목 받는 신예 디자이너로 그녀의 작품들은 동화를 연상시키는 순수함과 사로잡힐 듯한 관능미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마침내 1997년 4월 PCP는 유명 디자이너 롤리타 렘피카와 라이센싱 계약을 맺고 ‘Made in Paris’ 향수 ‘롤리타 렘피카’를 선보이게 된다. 향 (Firmenich) 과 용기 디자인 (Alain de Mourgues), 패키지(Autajon) 광고 (Saatchi & Saatchi)등도 모두 롤리타 렘피카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현지 전문가들의 작품이었다.

    샤넬 No.5의 10년이 롤리타 렘피카에게는 2년?

    명품들이 즐비해 새 브랜드가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는 고급 향수 시장 프랑스에서 여성적이고 환상적인 향과 용기 디자인을 내세운 롤리타 렘피카는 출시 8개월 만에 시장 점유율 1%로 프랑스 고급 향수시장10위권에 진입한다.

    200여개 브랜드의 향수가 경쟁하는 프랑스에서 샤넬No. 5의 점유율이 3.6%인 점을 감안하면 롤리타 렘피카의 성공은 기적이었다. 이후 롤리타 렘피카는 샤넬 No.5가 10년을 투자해 얻은 결실을 단 2년 만에 달성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2002년에는 프랑스 시장 시장점유율 2.7%로 샤넬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세계 500개 고급 향수 브랜드 중 9위 브랜드 롤리타 렘피카

    롤리타 렘피카는 지난 수년간 프랑스와 미국의 향수 재단들이 선정하는 최우수 여성 향수, 최우수 남성 향수 및 최우수 용기 디자인상을 휩쓸었다. 또한 유럽 주요국은 물론 미국. 중동. 중남미. 일본.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 약 80여 개국에서 세계적 향수 브랜드로 명품 대우를 받고 있다.

    프랑스는 화장품에 관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확보하고 있어 세계적 화장품 회사들이 최고의 인프라를 바탕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프랑스에서의 성공은 곧 글로벌 경쟁에서의 성공을 의미하기에 태평양의 글로벌 브랜드 전략은 성공적으로 평가 받는다.

    만약 태평양이 고집 세게 한국적 제품과 브랜드로 프랑스 시장에 계속 도전했다면 어땠을까? 성공적 결과를 위해서는 국적도 과도한 자존심도 실리를 위해 과감하게 포기하는 야심찬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생한 교훈을 태평양과 롤리타 렘피카는 제공하고 있다.

  • 산골 종이공장에서 세계 휴대전화 거인으로 – 노키아(Nok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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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휴대전화 시장 1위, 전세계 휴대전화 시장 35% 점유 기업, 유럽 증시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기업, 92년부터 7년간 주가가 291배 뛴 기업, 이 기업이 바로 핀란드의 노키아다. 산림국 핀란드를 일으킨 IT (정보통신) 기업 노키아의 생생한 성공담을 구경하자.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산타 클로스의 고향이라는 북유럽 핀란드는 전 국토의 70%가 삼림이다. 일년 중 반이 겨울인 이 나라가 가진 자원은 아이러니 하게도 울창한 나무들뿐이다. 노키아는 이런 조국의 IT산업을 이끌어 담박에 핀란드를 세계 정보통신 산업의 메카로 만들어 놓았다.

    올해로 138살을 맞는 회사 노키아가 처음부터 통신 관련 사업을 했던 것은 아니다. 91년 경제 불황 전까지 노키아는 고무, 케이블, 텔레비전, 컴퓨터, 알루미늄, 펄프 및 종이, 발전, 부동산, 통신을 취급하는 9개 계열사를 거느린 잡동사니 회사였다. 당시 노키아도 그룹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었다.

    80년대 말 노키아는 독일에서 컴퓨터, 컬러 TV로 막대한 손실을 보았고, 당시 사장이 자살할 정도로 어려웠다. 더욱이 소련의 붕괴는 안정적 수출 상품이었던 노키아의 경공업 제품을 창고에 쌓이게 하였고 국내 경기 침체로 90년대 초 적자액은 무려 2억 달러(한화 2500억)에 달했다.

    경쟁력 없는 사업은 버려라!

    이런 위기에서 노키아를 구출해낸 것은 요르마 오릴라(Jorma Ollila) 회장을 비롯한 노키아 이사회의 최고경영자들이었다. 92년 오릴라는 취임과 동시에 업계에서 1위를 할 가능성이 없는 사업들을 과감히 정리했다. 그는 “장차 죽느냐 사느냐의 승부를 걸 수 있는 분야는 전자통신분야뿐”이라며 휴대전화 하나에만 전념키 위해 8개 계열사를 몽땅 처분했다. 다소 모험적이었지만 당시 경영진은 무선통신시대가 다가올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것이다.

    사실 노키아는 81년부터 휴대전화를 만들기 시작했었다. 핀란드는 산악지대가 많고 인구가 분산되어 있는 휴대전화 시장으로는 최적지였지만 당시 잘 나가던 경공업과 가전제품 사업에 매달린 노키아에게는 부수적 사업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키아는 GSM(유럽 등지에서 통하는 비동기 방식) 휴대전화가 처음 출시되기 9년전인 82년부터 GSM 표준 기술 개발에 착수해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휴대전화를 노키아의 핵심사업으로 결정하게 된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핵심역량은 지킨다!

    현재도 노키아의 전체 직원 6만명 중 3분의 1이 연구 개발(R&D)에 종사하고 있다. 제품 주기가 짧은 통신산업에서 성공하려면 ‘신속한 제품개발’과 ‘대량생산을 통한 원가 경쟁력 확보’가 핵심이라 믿기 때문이다.

    또한 지멘스 등 경쟁사가 부품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데 반해 노키아는 필요한 부품을 필요한 만큼 외부에서 사들인다. 노키아의 표어인 커넥팅 피플(connecting people)에는 자신이 가장 잘 하는 핵심 부문을 빼고는 모두 다른 기업에 맡긴다는 뜻이 들어 있다.

    연구활동도 다른 곳이 더 잘 할 것 같으면 그곳에 맡기고, 심지어 경쟁업체와도 같이 연구 활동을 하면서 노키아는 경쟁력을 유지한다. 이러한 노키아의 경쟁력 때문에 2001년 세계 3대 휴대전화 회사인 스웨덴의 에릭슨은 “노키아 등 질 좋고 값싼 제품을 공급하는 경쟁사에 밀려 휴대전화 생산을 완전 중단한다”고 발표할 정도다.

    기업 전략을 사내 모두가 공유한다!

    통신업으로 급격히 사업을 전환하면서도 노키아 직원들은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노키아는 늘 비전과 전략을 종업원들한테 공유해왔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부터 매년 전세계 간부들이 일반 직원들과 함께 회사의 비전과 전략을 토론하는 “노키아 웨이(Nokia Way)”가 그 방식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노키아는 가벼운 조직과 신속한 의사결정을 덤으로 얻었다.

    매력적인 조직문화를 만든다!

    노키아는 금전적 인센티브 외에도 직원들에게 젊은 나이에 경력을 쌓고 책임 있는 일을 담당하면서 일을 즐기고 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현재의 노키아 경영진은 90년대 초반 매우 젊은 나이에 중책을 맡았던 이들이다.

    노키아는 직원을 해고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다른 회사들은 실수를 한 직원을 내보내지만, 노키아는 그 자리에서 실수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그 직원을 함부로 해고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노키아는 90년대 초 사업부서를 매각하는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직원들의 이해를 최대한 반영했다. 소비자가전 부문 등을 매각할 때에도 고용 안정이 계약서에 명시되도록 직원 입장에서 협상했다.

    브랜드가 전부다! (Brand is everything)

    이외에도 전문가들은 노키아의 마케팅과 브랜딩을 성공요인으로 꼽는다. 노키아는 휴대전화 업체 중 가장 먼저 고객 차별화 전략을 도입하여 각각의 고객에 맞는 제품으로 마케팅 활동을 전개했다. 노키아는 성능이 비슷한 제품이 넘쳐 나는 휴대전화 시장에서의 성패는 브랜드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노키아는 미국계 다국적 기업이 브랜드 마케팅 시장을 휩쓸고 있는 가운데, 2002년 인터브랜드의 글로벌 브랜드 자산가치 평가에서 유럽계 브랜드로는 유일하게 6위를 차지했다.

    많은 기업들 중 노키아는 정말 ‘모범생’ 같은 성공신화를 자랑한다. 어느 한 구석 모난 데가 없이 정확하고 깔끔한 변화와 혁신 사례다. 최근 노키아는 10년 전 자신이 그랬듯이 무선통신분야에 다시 한번 새로운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노리다 한번에 낚아채 듯이 노키아는 오늘도 무선통신을 노린다. 혁신은 그만큼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강한 자는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다.

  • 일본 맥주 아사히를 살린 역발상 경영

    (경방 사보 원고-3)

    일본 맥주 아사히를 살린 역발상 경영

    1986년 일본의 맥주 브랜드 ‘아사히(Asahi)’는 창사이래 최악의 경영상태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아사히’는 일본최고의 우량기업으로 변신했다. ‘슈퍼 드라이’라는 병기를 앞세워 업계의 선두 주자 ‘기린(Kirin)’의 목을 조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드라마 같은 ‘혁신’의 이야기에는 한 명의 ‘이상한’ 사장이 등장한다.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히구치 히로따로우 사장. 그는 만년 은행 직원이었다. 1986년 아사히의 주거래 은행인 주우은행(住友銀行) 부행장인 늙스구레 한 이 은행원이 아사히의 사장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사히 전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경험도 없는 사람이 무슨 경영을?” “맥주에 대해 알기나 한데?” “은행 출신이라 우리 모두 거리에 내 모는 것 아니야?” 여러 이야기들이 분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히구치 사장이라는 사람은 정말 이상했다. 그는 사장 취임 즉시 라이벌 맥주 회사들을 방문해서 경영진들에게 아사히의 결점에 대해 지적해 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업계 1위인 기린 맥주의 회장은 “좋은 원재료를 써야 한다”고 방문한 아사히의 히구치 사장에게 따끔한 일침을 주었다. 삿뽀로 회장은 히구치 사장에게 “상점에는 오래된 아사히 제품 재고뿐이다. 신선한 상품들로 싹 교체해라”고 비아냥 거렸다. 히구치 사장은 고개를 끄떡이며 그들의 험담을 그의 수첩에 자세히 적었다.

    그 이후 히구치 사장은 아직 낯설기 만한 자신의 아사히 맥주 공장을 방문 했다. 현장 책임자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우리 공장은 원가절감을 통해 회사 이익 실현에 공헌하고 있습니다”라고 브리핑을 하는 것을 들었다. 당시 그의 표정은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충격을 받은 것 같이 보였다.

    또한 그는 직접 가장 불평이 잦은 고객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한 고객은 “맥주를 마실 때 입안에서 좋은 향기가 나야 하고, 목에서는 시원한 느낌을 나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까다로운 요구를 해댔다. “맥주에서 향기가?” 영업 담당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히구치 사장에게 그냥 무시 하시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그냥 고객의 소리에 고개를 끄떡이고 있을 뿐이었다.

    젊은 사원들을 불러 놓고 히구치 사장은 ‘색다른 맛의 맥주’를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특이한 맛은 항상 실패한다’라는 징크스가 있던 일본 식품 음료 업계에 히구치 사장의 이러한 지시는 그를 아마추어로 비춰지게 했다.

    아사히 맥주 공장에 장애인 직원들이 속속 입사를 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직원들은 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불황에 직원이 더 늘어나다니… 그것도 장애인 직원들이 상품 제조라인에서 자신들과 함께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뿐 아니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열심히 일하면 급료는 삿뽀로 맥주 이상주고, 보너스는 산토리 이상으로 주겠다”고 공표했다. 직원들은 대부분 이 때 환호성을 질러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아사히의 대회의실에서 히구치 사장은 마케팅 담당자들을 불러 놓고 “광고비를 향후 3년간 3배로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 이 불황에…광고비를 3배씩이나?” 임원들의 입에서는 “올 것이 왔다”라는 탄식이 흘러 나왔다.

    대신 히구치 사장은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정말 큰일 났다” “매우 어렵다”등의 부정적인 말을 쓰지 말고 대신 “힘내자” “훌륭한 회사를 만들어 보자”라는 말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직원들은 그 당부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히구치 사장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전례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라는 마이너스 발상 대신에 “전례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다”라는 플러스 발상을 기반으로 한 것 이었다.

    먼저 좋은 재료를 쓰기 위해 독일 뮌헨에서 재배되는 최고 품질의 ‘아로마 호프’를 사들였다. 3개월 이상 된 ‘아사히’ 제품들을 상점에서 모두 회수해서 새 제품으로 바꿨다. 원가를 아껴 인정 받으려던 공장 책임자에게는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려고만 노력해라. 원가 걱정은 내가 한다”고 지시했다.

    까다로운 고객의 요청에 따라 마침내 젊은 ‘아사히’ 직원들이 그 맛을 찾아 냈다. 이 맥주는 ‘슈퍼드라이(SuperDry)’로 이름 붙여졌다. 이 새로운 맥주는 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장에서 장애인 직원들과 일반 직원들은 행복하게 일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급여통장에는 약속에 따른 보너스가 두둑하게 채워졌다.

    TV에서는 ‘아사히 슈퍼드라이’ 광고가 쉴새 없이 흘러 나왔다. 물론 직원들은 “정말 어렵다” 같은 부정적인 이야기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직원들은 이 마술 같은 경험에 놀랐다.

    업계를 주도하던 기린 맥주도 놀랐다. 단지 “좋은 재료를 쓰라”고 비아냥 거렸을 뿐인데, 눈깜짝할 사이에 그 비아냥은 시장의 판세를 아사히로 기울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1989년에 기린은 ‘이찌방 시보리’라는 경쟁 제품을 내놓았지만, 아사히의 ‘슈퍼 드라이’에게는 벌써 2년이나 늦었다.

    이렇듯 ‘이상한’ 사장 한명이 아사히를 살렸다. 히구치 사장이 재임한 6년간 아사히의 매출은 3.1배, 경상이익은 5.3배, 시장점유율은 2.4배 성장했다. 그의 퇴임 이후에도 아사히는 승승장구하며 1995년에는 어려웠던 1986년보다 14배가 넘는 영업이익을 계속해서 거둬 들였다. ‘슈퍼드라이’는 우리나라 맥주에도 브랜드화 되어 출시되었고, 조선맥주가 ‘하이트’라는 제품으로 OB맥주를 추월하는 유사사례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 것이 모두 ‘이상한’ 사장의 ‘이상한’ 발상에 의한 엄청난 힘, 바로 혁신의 힘이었다.

  • 제너널 일렉트릭 (GE)의 초일류 혁신

    120여년의 기업 역사.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 종업원 31만명, 매출 1300억 달러 (약 156조원), 순이익 140억 달러 (약 16조 8천억원)에 달하는 초일류기업의 대명사, 제너럴 일렉트릭(GE)은 어떻게 혁신에 성공했을까. 단순히 성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화려한 초일류 혁신의 내면을 잠깐 둘러보자.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제너럴 일렉트릭이라는 이름보다 우리에게는 차리리 GE라는 명칭이 더 익숙한 것 같다. 흔히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GE는 “전구, 냉장고, 모터” 등으로 한정 되 있지만, GE는 금융, 산업용제품, 엔진, 발전시스템, 플라스틱소재, 가전제품, 기술제품 및 서비스, 심지어는 방송사(NBC) 까지 총 8개 사업분야에 11개의 대규모 자회사를 거느린 초대형 ‘다각화(多角化)’ 기업이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잭 웰치(Jack Welch) 전(前) 회장은 GE의 혁신을 이끈 마술사로 통한다. 혁신에 성공한 조직들에게는 항상 나름대로의 특징적인 면들이 존재하듯이 GE 혁신 성공의 비결 또한 크게 세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n 선택과 집중 전략 : “1등 아니면 2등이다. 그 이외 사업에서는 모두 손뗀다”

    n 통합전략: “대기업만의 장점을 살려서 모두 함께 성장하자”

    n 조직문화전략: “중소기업의 장점을 받아들여 조직과 기업 문화를 새롭게 바꾸자”

    1995년 GE의 연간회계보고서에서 당시 회장 잭 웰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만들려는 회사 GE의 모습은 ‘변종(變種)’이다. 즉, 풍부한 자원을 가진 대기업의 몸통 위에 중소기업의 뇌와 정신을 가진 그런 회사이다” ‘중소기업의 뇌’라는 것을 잭 웰치는 ‘항상 배우고자 목말라 하고, 행동 지향적인 모습’으로 곧 잘 표현했다.

    잭 웰치는 ‘선택과 집중’을 통한 혁신을 실행하기 위해 기존 300여 개 이상이던 상품별 사업단위를 단 12개 사업부로 대폭 줄였다. 그 결과 11개 사업부 중 9개 사업부가 포츈 500대 기업 순위에 오르는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고 사업을 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96년까지 GE는 232개의 사업부문을 매각하면서 338개의 새로운 사업을 사들였다. 이 또한 ‘사서 키운다’는 혁신의 방법이다. “야구에서도 타자가 방망이를 많이 휘두르는 것이 중요하다. GE가 사들인 기업이 모두 잘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중 70%만 잘되면 괜찮은 것 아닌가? 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 안타가 나온다”고 잭 웰치는 생각했다.

    통합전략을 통한 혁신은 지주회사 GE를 중심으로 함께 성장하는 대기업의 신화를 창조했다. 잭 웰치는 ‘GE의 11개 사업 부문 중 그 어느 하나라도 독립시킬 경우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GE는 다른 대규모 복합 기업들과 달리 사업전체가 단순 합보다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GE는 경영자원과 정보들을 모두 공유해서 대기업만이 보유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과시했다.

    조직문화전략을 통한 혁신에 있어서 먼저 GE는 조직구조를 평평하게(Flat) 다시 짰다. 대기업의 질병인 관료주의, 느린 의사결정, 쓸모없는 통제, 증가하는 간접비등을 단숨에 몰아냈다. “계층이 많은 조직은 추운 겨울에 스웨터를 여러 벌 겹쳐 입은 사람과 같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환경변화에 둔감하고 느릴 수 밖에 없다”고 잭 웰치는 말했다. 이 새 조직은 GE의 말단 사원들도 회장을 만나면 “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또한 GE는 스피드(Speed), 단순성(Simplicity), 자기확신(Self-confidence)으로 대별되는 3S개념을 전사적으로 공유했다. 업무처리의 속력은 단순함에서 나오고 단순하게 일을 만든다는 것은 강한 자기확신이 밑 바침 된다는 뜻이다.

    GE의 3S개념은 워크 아웃이라는 또 하나의 실천양식으로 더욱 확산되었는데 이는 잭 웰치를 포함한 전 사원들이 걸어 다니며 의견을 나누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서류를 작성하고 결재를 받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리기 보다는 걸어 다니면서 의견을 나누고 간단히 의사결정을 하는 셈이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무경계(boundaryless)를 지향한다는 뜻도 있다.

    GE는 또한 그 유명한 6시그마 경영을 통해 성공했다. 잭 웰치는 “GE가 생산하는 모든 제품, 서비스의 품질은 물론 수주, 설계, 생산, 판매 등 경영 프로세스의 품질까지 무결점 수준으로 달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완제품 100만개 당 불량건수를 약 3~4개 수준이하로 유지한다는 의미다.

    이상 GE의 사례에서 우리는 모든 혁신의 부분들이 더 큰 합을 이루는 역사를 목격했다. 이러한 혁신의 역사에 있어서 잭 웰치라는 인물이 빠질 수는 없다. 한 때 사정없이 인원을 감축할 당시 “도살자”로도 불렸던 그는 이러한 부담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더 나은 미래를 묵묵히 준비하는 뚝심이 있었다.

    그 결과 자칫 대기업 병에 빠져 모든 직원들을 한꺼번에 거리로 내몰 수 밖에 없었던 늙은 GE를 더 많은 직원들을 뽑아 더 나은 업무환경을 제공하는 새로운 GE로 다시 환생 시켰다.

    혁신에는 항상 ‘큰 리더’가 필요하다. 조직을 위해 수년 또는 수십 년 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이를 향해 오늘을 준비하는 모습이 바로 큰 리더의 모습이다.

    전체 조직의 차원에서는 ‘큰 리더’와 닮은 ‘작은 리더’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효과적인 혁신의 실행이 가능하다. 전직원이 큰 리더를 닮아 모두 함께 미래를 준비하는 환경은 더더욱 이상적이다.

    이 글을 읽고 각자 자신을 들여다보자. 내 안에 ‘리더’의 모습이 얼마나 있는지, ‘작은 리더’ 답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지, 내 주변에는 누가 또 다른 ‘작은 리더들’인지. 주변을 둘러 보고 오늘도 행복하게 하루 일을 시작하면 좋겠다. 내일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