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ld columns

초기에 여러 매체에 실었던 칼럼을 모았습니다. 환경은 달라졌지만 위기관리의 원칙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정부 및 공공기관 PR 컨설팅에 대하여…

    요즘에는 경기때문에 사기업들의 입질(?)이 뜸한 반면 공기업 또는 정부기관들의 홍보컨설팅 의뢰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왠만해서는 경기를 타지 않는 곳이 바로 그쪽이라서 그런지 일이 꽤 쏠쏠합니다.

    우리나라 PR 회사들 중에서 정부 및 공공기관을 오랫동안 하거나 전문적으로 해본 곳들이 그리 많거나 다양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내심 정부 및 공공기관쪽 클라이언트를 하나라도 가지고 싶어서 노력하시는 곳도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쪽은 일종의 ‘텃세’가 있어서 한번도 그쪽일에 대한 경험이 없으면 경쟁비딩 같은 곳에 끼일수 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단어 그대로 텃세라고 부르기에는 약간 부적절합니다. 국민의 세금을 쓰는 공무원들은 절대로 ‘자격이 검증되지 않았거나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회사’를 선택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주관적인 자격을 몇가지 객관적인 판단기준으로 검증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최근 3년간에 정부 및 국가투자기관등을 위해 PR 컨설팅을 제공한 경험이 있는 회사’ ‘회사 설립 3년 이상, 직원수 30명 이상’ ‘전문성을 인정할 수 있는 컨설턴트가 최하 X명 이상”등등의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이게 객관적인지 어떤지는 저도 잘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공무원들의 노력이라는 측면에서는 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오늘 정부 및 공공기관의 PR 컨설팅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PR (그들에게는 홍보)에 대한 마인드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몇년간 정부 및 공공기관 일을 좀 하다가 보니 일반 사기업들과는 약간 다른 면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다른 AE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몇가지 그들의 특징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단에서는 표현상 존칭 어미를 생략합니다.)

    1. 프로그램에 무지무지 집착한다. 크리에이티브한… (그들의 용어로는 ‘쌈팍한’)

    사실 PR컨설팅을 한다고 뜯고 들어가 보면 정부기관이나 공공기관은 거의 모든 프로그램을 해보거나 기획해 보았던 곳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주로 하는 프로그램들은 공청회, 세미나, 설명회, 홍보대사, 광고, 홈페이지, XX의 날 기념식, XX 축제 등등 다양하다. 자신들이 생각하지 못한 ‘그 어떤 프로그램’을 위해 컨설팅 펌을 찾는데 이게 아주 곤욕이다. 그 이전에 다양한 프로그램들에 대한 효과측정을 해보자거나 또는 더 품질을 제고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자고 하면 상당히 싫어한다. 항상 something new를 찾는건 왜일까?

    2. 프로페셔널 피(Professional Fee)에 대한 이해를 하지 않는다.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다)

    정부 및 공공기관에서는 예산을 엄격하게 통제 받는다. 사기업 처럼 줄수 있는 만큼 주는 것이 아니라 줘야 하는 금액이 있다. 아무리 고급 인력이라도 월 백몇십만원의 연구원 월급에서 적당히 챙겨가라는 의미다. 경제기획원에서 매년 그 급여기준을 상향하는데 실제 프로페셔널 피 수준에 비교하면 세발의 피다. 그래서 프로페셔널 피(血)다.

    3. 마감이 목숨만큼 중요하다

    마감은 컨설팅 펌에게 천형이다. 일단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 마감에 쫓긴다. 근데 그쪽 마감이 참 문제다. 한달만에 또는 몇주만에 결과물을 원한다. 후닥닥이다. 마감만 어느정도 칼같이 맞추어 주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물론 담당자에 따라 다르지만. 암튼 이 마감이 예산과 함께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4. 항상 실행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보고를 염두에 둔다

    마감이 중요한 것도 보고때문이다. 수천만원짜리 컨설팅 보고서에 제시된 프로그램들 일단 보고가 우선이다. 그 중 실행은 해도 되고 안해도 그리 큰 문제는 없다는 투다, 보고 후에 큰 칭찬을 들으면 만사 오케이다. 그동안의 섭섭한 관계도 시원하게 해결된다. 술도사고 덕담도 많이 듣는다. 따라서 보고받는 분들의 의중을 담는 일도 컨설팅 펌과 담당자에게는 큰 작업이다.

    5. 제일 두려운건 마감, 두번째는 감사 (Thanks가 아니라 Audit이란 의미의 감사다)

    감사 때문에 보고서류와 일지등이 두꺼워진다. 어떤 PR 회사분은 이 자료입증 부분만 없으면 이쪽 일 할 맛 나겠다고 한다. 처음으로 이쪽일을 하는 AE들은 이 부분에서 낯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러나 경험이 생기면 상당히 완만하게 준비가 된다. 꼼꼼해야 한다. 우선은.

    6. 자료를 충분히 공유하지 못한다

    자료라는 게 일반기업도 그렇지만 체계화되어 정리되어 있지 못하다. 지난 기획안 같은 것들과 다양한 홍보물들을 제공하는데 사실 심도있는 분석을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게 문제다. 자료가 있으면 왜 컨설팅 받는냐는 소리를 하는 담당자를 보면서 슬플때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이쪽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기업들도 그런 곳이 안그런 곳보다 많다. 한국인의 문제인 듯.

    7. 예산 활용에 대한 마인드가 부족하다

    우리 부처에 할당된 올해 홍보 예산이 한 1억이 되거든요. 근데 뭐 이거 호오 비디오 한편 찍으니 한 6-7천만원 날라가더라구요. 나머지 가지고 브로슈 좀 찍고 하니 홍보비용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염두해 주세요…. 참 심난하다. 일반 사기업에서 홍보실이 홍보비디오 하나 브로슈어 하나 만들고 일념 사업을 마무리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적은 예산을 항상 탓한다. 그러나 저비용 고효율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 그들을 만날때 마다 자주한다.

    8. 파견근무를 매우 선호한다

    ‘일단 와서 이해를 하세요’ 한다. 그러나 파견근무를 하면 그 때부터는 원 오브 뎀이다. 갖가지 보고서 및 자료 정리를 하다가 보면 큰 그림을 보아야 할 컨설턴트가 알바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나마 임원급들을 사정이 낫다. 각종 회의에 참석해서 의견을 말해야 하는 부담은 있지만 말이다.

    9. 하급기관으로 갈수록 일이 복잡하다

    계약업무만해도 그렇다. 간단히 말해 공단급은 잘 못 걸리면 한달 내내 계약 업무만 한다. 청와대는 15분 걸린다. 진짜다.

    10. 다된 컨설팅 보고서도 간단히 수정하거나 사장되곤 한다

    시기업이나 공공기업이나 ‘정치’의 수준이 있다. 컨설팅 리포트가 실무자들인 우리들에게는 큰 의미와 땀이 담겨 있지만 윗선에서는 하나의 행위일 때가 매우 많다. 일고 버리는 메트로나 포커스 같은 존재의미일 때도 있다. 힘들여 만든 컨설팅 리포트가 잘 활용되고 보약이 되려면 일단 윗분의 의중 + 그 의중을 100% 파악한 담당자 + 담당자의 지시를 올바로 따르는 컨설턴트 + 그 위에 전문성을 조미료로 뿌릴 수 있는 시니어 컨설턴트들이 모여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모자르면 메트로 신세다.

    너무 나쁜 쪽 특징들만(꼭 그렇지는 않지만..) 나열한 것 같아서 좋은 특징들도 열거해 보겠습니다.

    1. 국가사업에 대한 ‘공공적, 공익적’ 시각이 충분히 강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국민들에게 중요한 일인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개인의 처신이나 업무의 목적성에 대한 규정이 이루어 진다. 이런 맛에 같이 일을 해도 일 할 맛이 난다. 나랏일이라는 것에 대한 매력이라고 할까.

    2. 상하관계는 물론 중장기적인 시대 흐름에 대한 정확한 시각을 가진 인재들이 꽤 있다

    앞서도 예를 들었지만 윗선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중장기적인 시대흐름을 꿰뚫고 있는 인재들은 이쪽이나 사기업쪽이나 다 성공하는 법이다. 인제들과 함께 일을 하면 일이 즐겁다. 그들의 승진 소식이나 영전 소식을 들으면 더 좋다.

    3. 매우 솔직하다 그리고 절실하다

    사기업에 비해 차라리 인간적으로 솔직한 분들이 많다. 이전에 부모님이 공무원이신 가정은 딸이 시집가더래도 꽤 존중을 받았다고 하던데… 인간미가 있는 분들이 많다. 또 박식하지만 자신의 전문성 부족을 솔직히 말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이게 쉬운게 아닌데도 그런 분들이 많다. 되레 존경스럽다.

    4. 심플하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많다. 잘 되겠지요 하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배려해 주는 분들도 많다. 항상 무엇이든 잘 된다 하는 습성이 몸에 밴 것 같은 분들을 보면 부럽다.

    5.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접근을 선호한다

    일반적으로 그쪽의 분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익숙하고 이를 선호한다. 사기업들이 종종 히트를 치는 감성적인 접근으로 PR을 제안하면 별로 탐탁하지 않은 표정이 된다. 그래서 일단 이성적인 방식과 감성저인 방식들을 섞어서 제안을 해야 한다. 근데 감성적인 방식이 크리에이티브하다는 소리는 많이 듣는다. 실행은 않되지만..

    6. 관계를 중시하면서 신뢰를 강조한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했던가. 일단 자신들과 일을 해본 적이 있는 회사에게는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자주 자문을 구해오기도 하고, 임원진들에게 회의 참석 (물론 자문비 지불)을 초청하기도 한다. 자신들과 업무이해가 편한 브래인 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일을 잘 못했던 회사에게는 절대 전화 안한다.

    7. 열심히 일한다

    여름에 과천청사나 광화문 종합청사에서 한두시간 회의를 하면 일반기업 사람들은 일난다. 더위를 먹던가 졸던가 한다. 국민의 세금을 아끼려는 노력을 이해는 하지만 공무원들의 생산성과 업무효율성도 생각을 해야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래도 그들은 넥타이를 풀고 열심히 일한다.

    8.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프라이드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멋지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일에 대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다. 일반 사기업에서 일부 실무자들이 얄팍하게 느끼는 우월의식이 아니다. 평생의 일로서 자신의 일을 받아 들이고 이에 대해 인생을 투자한 후 간직하는 ‘깊은 프라이드’를 그들에게서는 느낄수 있다. 업무를 진행하면서 그들의 프라이드를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 자주 일어난다.

    9. 풍류를 아는 친구들이 꽤 있다

    일만하는 일벌레만은 아니다. 컨설팅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끝나고를 잘 챙겨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컨설팅 펌측에서는 혹시 ‘접대’에 대한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요즘에는 일방적인 접대는 없어진 듯 하다. 네가 밥사고 내가 술산다 식의 매칭 플레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인 부담 보다도 사람과 사람이 어떤 일을 같이 함에 있어서 동질감과 협력정신을 일으킨다는 데에는 모두 이견이 없다. 더구나 풍류를 함께 나눌수 있으면 이는 일 이전에 인생에 대한 이슈다.

    10. 스케일이 크다

    수조원, 수천억, 2000만명, 894만명 등등 담당업무의 스케일이 크다. 그 해당 업무가 미치는 영향력도 전국적이고 전국민적이다. 때때로 업무가 십여년을 바라보는 중장기 업무도 있다. 지금 30대 중반의 사무관이 10년후에도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컨설팅 펌으로서는 답답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존재하는 한 이런 스케일의 일들이 잘 되어 나가야 모두가 행복하다는 생각에 그 해당 실무자와 컨설턴트들은 밤을 지새운다.

    이상이다. 앞으로도 종종 정부 및 공공기관들의 이야기를 나눌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2개 부처로 부터 4통의 전화와 2통의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역시 열심히 일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지금 이시간이 일의 마감과 시작이 연결되는 태풍의 눈 같은 시간이라서 글을 쓰는 거다.) 그들 처럼 나도 열심히 일한다.

  • “우리의 피는 자주색이다!” – 페덱스(Fed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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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피는 빨간색이 아니라 자주색이다!” – 페덱스

    정용민

    세계 210여개국을 대상으로 항공기 640여대와 4만 5천여대의 화물 차량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기업. 2002년도에는 매출 220억불(한화 약 28조원)을 기록. 계열사를 합쳐 직원만 19만명. 어느 대형 항공사이야기인가 하겠지만 이는 한 화물배달업체의 이야기다. 이름은 페덱스(Fedex).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라는 지방 도시에서 태어난 이 ‘배달회사’는 참으로 재미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직원만족 경영 때문에 직원들은 자신들의 피가 페덱스 로고의 색깔인 ‘자주색’인줄 안다니 말이다.

    전날 밤에 미국 LA에서 맡긴 소포를 태평양을 건너 바로 다음날 오전 한국 서울의 사무실에서 받을 수 있는 꿈같은 이야기를 페덱스는 매일 만들어 낸다. 고객이 자신이 발송한 화물이 현재 어디 있는지를 추적할 수 있게도 해준다. 만약  배달에 착오가 생기면 고객에게 요금을 돌려주는 웃기는(?) 회사도 페덱스다.

    각지에서 걸려오는 고객들의 전화를 2초 안에 받기 위해서 미국에만 16개 콜센터에 3500명이 대기시킨다. 비행기 고장 등 비상상황에 대비해 미국 전역에 24시간 비행기를 6대씩이나 덩그런히 비상 대기시킨다. 한가하게 대기만 하는 것만은 아니다. 몇 년 전 9·11테러가 발생하자 24시간 만에 위험을 무릅쓰고 수백톤에 이르는 구급약 등을 현장에 배달해 칭찬도 들었다.

    97년 여름, 경쟁사인 UPS의 직원들이 장기파업에 돌입해 급한 화물들이 구름같이 페덱스로 몰려들었다. 이때 페덱스의 직원들은 ‘나의 피는 자주색(페덱스사의 로고 색깔)’이라며 매일 밤늦게까지 자발적으로 우편물을 분류했다. ‘다음날까지 무조건 배달’이라는 페덱스와 고객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고객을 신(神)같이 받들어 모시는 회사. 그렇다고 직원들만 애꿎게 희생하는 회사도 아닌 곳. 고객도 직원도 회사도 함께 상생(win-win)하는 모습.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 다 이유가 있다.

    페덱스에서는 파트타임직원도 CEO가 될 수 있다고?

    1976년 데이비드 브론젝이라는 이름의 한 청년은 최하위급 배달직원(쿠리어)으로 페덱스에 첫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는 24년 후인 2000년, 페덱스 그룹의 계열사인 페덱스 익스프레스의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같은 회사의 데이브 레브홀츠 부사장은 6만명의 임직원을 지휘하는 페덱스의 핵심인재. 그러나 그도 76년에는 페덱스 사업장에서 트럭을 세차하고 비행기에 짐을 싣던 파트타임 직원이었다. 페덱스 고위 임원들 중에는 쿠리어 출신이 무척 많기 때문에 이들의 성공담은 페덱스에서는 별 이야깃 거리도 되지 못한다.

    한번 페덱스 맨은 영원한 페덱스 맨?

    페덱스에서 한국의 상무정도의 직급 경영진은 약 3백50명. 이 중 85%는 내부에서 승진했다. 중간관리자들까지 합치면 외부 채용 비율은 겨우 3~7% 정도다. 금융, IT 등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직종이 아니면 페덱스 맨이 우선이다.

    인력개발을 위해서 간부급인 매니저는 물론 쿠리어 같은 하위 직급들도 지역본부별로 마련된 프로그램에 따라 끊임없이 교육을 받는다. 따라서 페덱스 인력의 3~5%는 매일 교육 중인 셈이다. 고객에게 잘 봉사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내부에서 커온 직원이며, 그런 직원에게 회사가 잘해줘야 이익도 많아진다는 것이 페덱스의 일관된 생각이다.

    하위직급에겐 훌륭한 직장, 상급자에게는 고달픈 시험장?

    직원 존중의 전통 때문에 페덱스는 미국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기업으로 꼽힌다. 페덱스는 미국 기업으로선 드물게 무해고 정책을 자랑한다. 업무 평가가 나쁜 직원이라도 냉정하게 내보내지 않는다. 대신 직무향상 계획(Performance Planning)을 통해 회생의 기회를 준다. 상급자는 어떻게 든 하급자를 끌고 가야 한다. 상급자가 리더쉽을 발휘하라는 이야기다.

    매년 한 차례 전직원을 대상으로 회사와 임원, 간부들을 평가한다. 이 조사에서 만약 2년 연속 기준 점수 이하를 받은 임원이나 간부는 스스로 군말 없이 짐을 싸야 한다. 그래서 하위 직급 직원들 중에는 리더십에 따른 책임을 지기 싫어 일부러 간부가 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대신 이러한 혹독한 리더십 수련을 거치고 페덱스의 임원을 지낸 인재는 리더십에 관한 한 다른 미국 기업에서도 능력을 인정 받기 때문에 스카우트의 표적이 된다

    페덱스의 경영진은 직원을 존중하고 공정하게 대우하여 회사에서 상실감과 슬픔을 느끼지 않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최고 경영자의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경영자는 직원들과 항상 친밀하게 접촉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것이 상하간 커뮤니케이션이 자유로운 현재의 기업문화를 낳게 했다.

    항상 기업들은 ‘고객만족’을 말한다. 어느 기업은 ‘고객만족’을 넘어 ‘고객감동’ ‘고객행복’, 심지어는 우스개 소리로 ‘고객기절’까지도 추구한다고 한다. 미국의 성공한 기업들은 곧 고객들을 만족시키고 감동시키는데 성공한 기업들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보면 항상 비슷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고객을 만족 시키기 위해 먼저 직원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직원이 자신의 일터와 업무 그리고 마음 편한 환경에 만족하도록 회사는 성심을 다한다. 행복한 직원들은 고객들을 행복하게 대하게 되고 자신이 무엇을 해서 자신의 고객을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행동에 옮기게 된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원리를 믿는 것 같다.

    페덱스는 이러한 측면에서 완벽하게 직원감동에 성공하여 고객감동을 이룬 기업이다. 일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310만개의 화물을 배달하면서도 항상 웃는 페덱스 직원들. 잘못 된 주소로 배달된 화물 하나를 가지고 직접 300km를 운전해가서 고객의 손에 쥐어준 한 페덱스 직원의 이야기 같은 것들이 그 증거다.
     

  • 커피를 갈아 금으로 만드는 기업- 스타벅스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성업하고 있는 세계적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Starbucks). 1987년 하워드 슐츠가 인수한 스타벅스는 당시 전국에 11개 점포와 종업원 100명을 두고 있었다. 16년이 지난 지금 스타벅스는 전세계 30개국 6300개 점포를 자랑한다. 종업원만 7만명이다. 700배 성장한 셈이다. 하워드 슐츠의 커피를 통한 혁신은 어떤 것이었을까? 여러분들도 스타벅스에 들어설 때 마다 커피 향에 섞여 있는 혁신의 향을 음미하길 바란다.

    스타벅스의 성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의 커피 문화를 알아야 한다. 맥스웰 스타일로 통하는 미국의 커피는 한마디로 싸고 부담 없는 음료다. 필자가 유학생활을 하던 90년대 뉴욕 한 동네의 조그마한 도넛가게에서 매일 사먹던 커피의 가격은 75센트. 우리나라돈 1000원가량의 단순한 먹거리였다. 미국인들은 그냥 허름한 가게에서 커피를 아무 생각 없이 사먹는 것이다.

    뉴욕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란 하워드 슐츠는 가난했지만 미식축구를 잘해 겨우 대학에 들어간다. 그러나 대학 시절 중반에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고학과 학자금 융자로 학교를 졸업한 뒤 제록스사 세일즈맨을 거쳐 스웨덴계 가정용품 회사에서 주방기기 판매로 능력을 인정 받아 부사장으로 승진한다.

    미국내 영업을 총괄 관리하던 중 시애틀의 한 소매상에서 커피 끓이는 용구를 다량 구입하는 데 눈길이 끌렸다. 어떤 회사인지 궁금해 알아본 것이 바로 스타벅스였다. 1971년에 시애틀에서 조그만 커피점으로 시작된 이 스타벅스를 하워드 슐츠는 1981년 처음 찾아 갔다. 고급원두커피에 매료된 그는 좋은 직장을 때려 치우고 이 스타벅스에서 마케팅 담당으로 이직한다.

    1983년 우연히 슐츠는 이탈리아의 고급 에스프레소 바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기존의 스타벅스를 고급 스타일의 원두커피 바로 변화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당연히 기존 경영진들이 그러한 변화를 좋아 할리가 없었다. “무사안일에 빠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면 내 인생은 끝”이라는 생각으로 스타벅스를 관둔 슐츠는 자기가 꿈꾸던 이태리 스타일 커피전문점 “일 지오르날레”를 연다.

    일 지오르날레에서 슐츠는 정통 이탈리안 커피숍의 느낌을 재현하고자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매장에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틀어 놓았고, 종업원은 나비넥타이를 매도록 하였다. 서서 즐길 수 있는 바(Bar)만 준비되어 있을 뿐, 의자는 없었다. 슐츠는 커피의 향을 해칠 수 있는 무지방 커피를 제공하지 않았다. 메뉴 또한 모두 이탈리아 말로 쓰여져 있었다. 실내장식도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이탈리아식으로 꾸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이와 같은 이탈리안 커피숍의 분위기가 시애틀에서는 잘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고객들은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오페라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고, 종업원마저 나비넥타이를 불편해했다. 게다가 사람들은 앉아서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의자를 요구했다. 그래서 슐츠는 고객의 니즈에 맞도록 차츰 매장을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음악을 바꾸고, 의자를 갖다 놓았다. 심지어는 무지방 커피까지도 그들의 메뉴에 등장하였다. 유럽식 스타일에 고객만족이라는 미국식 경영방식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이탈리안 스타일의 미국식 커피숍이 생겨 나게 되었다.

    1987년 슐츠는 스타벅스의 경영진들로부터 스타벅스를 인수하지 않겠냐는 전화를 받게 된다. 슐츠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타벅스의 시애틀 점포들과 원두처리공장, 그리고 상호를 400만 달러에 사들였다. 곧 그는 자신의 집념이 담긴 ‘일 지오르날레’ 상호를 스타벅스로 개명하여 제2의 창업을 하게 된다.

    슐츠는 이 스타벅스를 통해서 미국인들에게 유럽 스타일의 고급문화를 전하게 되었다. 대중문화에 익숙해 있던 미국 소비자들에게 스타벅스는 세련된 만남의 장소, 고급스러움, 안락함, 대화, 독창적인 커피 음료 등을 제공하는 새로운 커피 문화 그 자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를 슐츠는 ‘스타벅스 경험(Starbuck Experience)’라고 부른다. 그는 “스타벅스는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판다”고 말한다.물론 스타벅스는 최고 품질의 커피를 만든다. 인공 향을 넣지 않고 프랜차이즈로 운영하지도 않는다. 커피가 쉽게 상하지 않는 최신 포장 기술을 개발해 자신의 고급 원두 커피를 해외로 수출한다.

    그러나 스타벅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 존중의 철학이다. 어떤 기업경영 가치보다도 `인간`은 그 위에 있다. 처음 슐츠는 종업원들과 회사 발전전략을 논의할 때 `위대한 회사(great company)`를 만들자고 약속했다. 인간 정신을 존중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게 슐츠와 종업원들이 공유하는 위대한 회사의 의미다. 스타벅스가 어떤 미국 기업들보다 이직률이 낮고 존경 받는 기업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혁신적이고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 종업원들에게 스며 들어 있는 스타벅스의 정신이다. 스타벅스는 예스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연공서열도 없다. 휴대용 종이컵이나 스타벅스만의 음악 CD 같은 튀는 아이디어는 언제나 환영이다. 그런 종업원들에게 스타벅스는 `브라보` 상을 준다.

    하워드 슐츠가 75센트짜리 미국식 커피를 3달러짜리 유럽식 커피로 재창조하는 첫번째 혁신에 성공했다면 스타벅스의 직원들은 인간존중, 자선, 사회적 신뢰, 자긍심과 같은 두번째 혁신에 성공했다. 연간 스타벅스에서 팔리는 커피 약 4000억잔과 한달 평균 18번씩 스타벅스를 찾는 전세계의 고객들은 이러한 혁신의 브랜드에 대한 사회적 존경을 상징한다. 항상 위대한 회사는 존경스러운 법이다.

  • Vision in PR agency

    오늘자 모 경제지에서 FH Korea의 General Manager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게되었습니다. 12-15년쯤의 PR경력에 Agency 경험이 많다면 좋겠다는 자격요건이 보이는군요. 곰곰히 그 광고를 보면서 우리 agent들의 비전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회사만해도 주변을 둘러 보면 “이다음에 대행사 사장을 한번 해 보아야지..”하는 AE는 거의 없다는 걸 느낍니다. 물론 마음속 깊이에서 자리를 ‘노리는(?)’ AE가 있을찌는 모르지만 암튼 밖으로 내어 놓고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 하는 AE는 없습니다. ^^

    우리 선배 AE들이 가졌던 agency에서의 비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우리 후배 AE들이 가지고 있는 Agency에서의 비전이란 무엇일까?
    참으로 궁금합니다.

    예전 기업협회모임에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백발이 되어서도 클라이언트 앞에서 멋지게 PT를 하는 것이 꿈이자 비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약간 유치하긴 하지만….그렇습니다. 감히 해외의 선배님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에드워드 버네이즈, 현재의 해롤드 버슨, 다니엘 에델만 등등) 처럼 타이틀 그대로 Senior Consultant를 꿈꿉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선배 AE들께서는 “이자식 아직도 꿈꾸고 있구나…”하실 수도 있겠지요. 맞습니다.

    사실 저도 최근 들어서는 “백발 PT가 과연 나에게 가능할까?”에 대해 자꾸 의구심이 들때가 많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상대적으로 박봉인 이 업계에서 커가는 자식을 바라보면서 내 좋은 일만 할 수 있을까? 40이 넘으면 agency업계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 지 뻔히 알면서 견뎌 낼 수 있을까? agency를 심부름 센터 수준으로 여기는 클라이언트들을 몇개나 더 겪어야 한해가 갈까? 빛의 속도로 변해가는 시장경쟁 속에서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는 agency속 변화에서 언제까지 유유자적(?) 할 것인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다 뱉어내고 이젠 말라버린 지적 자산을 언제까지 불모지로 방치할 것인가?….

    선배님들은 이미 이들 중 하나 또는 두개 이상의 회의와 현실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라는 이야기는 여기저기 agency를 떠나시는 선배 또는 후배님들의 “출사표”가 되었지요.

    업계에는 “그래도 agency가 좋다”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인하우스에 가 계셔도 agency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시며 좋은 조언을 해주시는 분들도 물론 많으십니다. 그러고 보면 그분들도 사실은 “정말로 절이 싫어 떠난 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적인 생각을 하다가 보면 문득 “만약에….” 라는 가정을 연이어 해보게 됩니다. 만약에 내가 내 나름대로의 애정을 가지고 이 agency업계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백발이 되었다고 치자.

    나와 내 팀이 정성을 다해 만든 프리젠테이션자료를 가지고 밤을 세워 PT연습을 한 후 인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인하우스에 내 옛날 동료가 우연히 담당 책임자 (CCO)로 있다고 치자.

    그 사람 왈 “아니 자네, 아직도 agency에 있나. 어지간히 능력도 없는 사람일쎄. 그래 요즘 살기는 어떻구? 그 나이가 되서도 직접 PT하러 다녀? 쯧쯧”한다면……..심난하겠지요.

    이렇게 사회적 인식까지 안도와 준다면 agency에서 큰 비전을 찾기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울까요…

    우리 업계도 태어난지 이제는 20년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업계를 거쳐간 수많은 선배 AE분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아주 초기 AE분들로 부터 최근 agency를 떠나신 AE분들께서는 우리 업계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말그대로 그저 한순간 업계에 ‘몸을 담근 것’으로 젊은 그 시기를 기억하시나요 아니면 ‘내 일생 가장 멋진 시기 중 하나’로 기억을 하시나요. 오늘 지금에는 자신이 일하셨던 업계에 대해 어떤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요…

    지금은 인하우스의 홍보책임자로 가있는 선배 AE가 얼마전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음…예전에는 agency premium이라는 게 사실 존재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 premium은 없어졌어. 지금 AE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불행한 이야기지..”라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에 크게 반론을 제기할수가 없었습니다. 돌아오면서 “그게 왜 일까….누구의 잘못일까?” 생각했습니다.

    요즘 책 중에 “바보들은 항상 남의 탓만 한다”인가 라는 제목이 있더군요. 제 스스로가 “그 바보”인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드는 생각 우리 agency AE들이 혹시 “굿모닝 시티 피해자들”과 같은 처지는 아닌지….

    agency에서 눈부시지는 않아도 clear한 비전을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AE여러분들 화이팅!

  • “좋은 제품을 싼 값에 팔기 위한” 혁신 – 델 컴퓨터

    (Dell Computer)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소프트웨어 업계의 황제”라면 델컴퓨터의 마이클 델은 ‘하드웨어 업계의 황제’다. PC가 좋아 중고 PC를 고쳐 시장에 내다 팔던 대학생이 20년이 지난 지금 매출 354억 달러 (한화 약 42조원), 순익 21억 달러 (한화 약 2조 5천억원)의 거대 기업의 주인이 되었다. “좋은 제품을 싼 값에 판다”는 간단한 원리로 성공했다. 이 원리 속에 숨겨진 혁신의 모습들을 찾아보자.

    1965년 생 마이클 델. 혁신의 신화는 마이클 델의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한다. 델은 학생 시절 자신의 컴퓨터 “애플II”의 속안을 들여다 보는 게 취미였다. 치과의사 아버지와 금융회사의 브로커 어머니 밑에서 유복하게 자란 델은 텍사스 대학에 입학할 때도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의대에 들어갔다.

    학과 공부엔 영 관심이 없던 델은 주로 컴퓨터를 뜯고 고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낡은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던 델은 문득 뇌리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중고 IBM PC를 사들여 업그레이드한 후 인근 사업체를 직접 방문해 되파는 것이다. 마침내 델은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이기 위해 2학년 진급을 포기했다. 단돈 1천 달러로 사업을 시작한지 불과 한 달 만에 그는 자그마치 18만 달러어치 PC를 팔아치웠다.

    첫번째 혁신- 좋은 제품을 싸게 판다!

    델은 경쟁사 제품들 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뛰어난 성능의 PC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었다. 델은 곧 낡은 기계들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대신, 컴퓨터 전체에 들어가는 부품을 싸게 사서 이를 직접 조립해 기존 경쟁사 제품들보다 싼 가격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좋은 제품을 싸게 판다는 마이클 델의 철학은 소비자를 위한 것으로 곧 델컴퓨터의 기업철학이 되었다.

    두 번째 혁신 -직접 주문 받아 팔고 고쳐준다!

    최초 직접방문 판매에서 우편주문판매로 사업을 확대한 델은 94년 인터넷 웹사이트 www.dell.com를 만들었고, 이어 96년에는 여기에 전자상거래 기능을 부가했다. 미국 전자상거래의 시작은 이때 부터였다. 현재 이 웹사이트를 통해 온라인으로 판매되는 컴퓨터는 하루 4천만 달러어치에 이른다. 매출의 40%. 기술지원의 40%, 주문 문의의 70%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진다.

    우수한 부품들을 값싸게 구입해 월등한 성능의 PC를 만들고 거기에다 불필요한 유통 비용을 없앤 결과 델의 컴퓨터는 최근 경쟁사 제품들보다 약 40%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다.

    세 번째 혁신 – 고객이 원하는 PC를 만들어 빨리 판다!

    고객이 델의 웹사이트에서 원하는 성능의 부품을 골라 PC를 주문하면 생산라인에서는 몇 시간 안에 주문된 컴퓨터의 조립이 시작된다. 이세상 하나 뿐인 나만의 PC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것도 생산 4시간을 포함 해 주문에서 선적까지가 36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고객이 주문을 한 순간 델-부품회사-배달회사가 순식간에 네트워크로 연결돼 마치 하나의 회사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직접판매와 부품 업체들과의 협력만으로 컴퓨터업계의 거인들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처음에는 무모하게 보였다. 그러나 직접판매로 중간상인이 챙겼던 돈이 소비자와 델에게로 돌아가고, 완제품과 부품의 재고량을 대폭 줄여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되면서 델은 ‘가격 대비 성능이 가장 우수한 컴퓨터를 판매하는 회사’라는 평을 얻었다.

    네 번째 혁신 – 고객만족을 통해 주주들을 만족시킨다!

    이러한 성공 속에서도 마이클 델은 고객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한시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는 고객의 의견을 듣는 정기적 회의에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한다. 고객과 직접 관계를 맺으면서 얻은 정보가 회사의 성공적인 전략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는 마이클 델은 지금도 자기 시간의 40%를 고객과 만나는 데 쓰고 있다.

    최근 델 컴퓨터 주총에서 마이클 델은 앞에 나와 델의 주식 성과와 코카콜라, 컴팩, 인텔,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식 성과를 비교한 한 장의 슬라이드를 주주들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델 주식의 그래프가 다른 기업들보다 두 배나 높이 치솟아 있었다. 델이 엄청난 수익으로 이 기업들을 능가했다는 의미다. 델은 주주들을 바라보며 “자, 이것으로 우리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수갈채가 계속 이어졌다.

    다섯번째 혁신 – 소비자들을 위한 연구개발만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델컴퓨터가 경쟁사에 비해 연구개발 투자비율이 낮다는 지적을 한다. 이에 대해 델은 “매년 열리는 컴덱스 (세계 최대의 컴퓨터 인터넷 관련 박람회)에 가봐라. 이미 쏟아져 나오는 기술들도 상품화 하지 못하는 게 태반이다” 따라서 “기술을 위한 기술은 필요 없다. 델은 오직 소비자들을 위한 개발만을 한다”고 당당히 대답한다.

    그래도 델은 매년 5억달러 (한화 약 6000억원)가량을 R&D에 투자하고 있다. 연구인력도 3000명에 이른다. 경쟁업체보다 투자금액이 적다고 해서 연구개발을 소홀히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델의 연구개발은 ‘제품의 질은 높이고 가격과 비용을 줄이는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다.

    올해로 38살이 된 마이클 델이 이끄는 델컴퓨터는 전세계적인 PC 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99년 이후 만 4년 만인 올해 매출이 2배로 늘어나게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PC를 좋아함에 만 그치지 않고 마이클 델은 자신과 같은 소비자를 위해 혁신적 사고를 거듭했고 그 결과로 바로 오늘날의 성공이 있게 되었다. 기업에게 있어서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한다’는 자세와 이를 위한 끊임없는 혁신적 사고가 얼마나 제대로 보답을 받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델컴퓨터의 사례다. 이게 혁신의 멋이다.

  • Best or Different -이탈리아 베네통(Benetton)

    이탈리아 베네통(Benetton)

    최고가 되라 아니면 차별화 (Best or Different)하라!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1955년 이탈리아 시골의 한 스웨터 가게로 시작된 ‘베네통’은 그리 변한 것은 없다. 약간(?)의 변화라면 세계 각국에 8000여 개의 가게들을 통해 옷을 팔게 되었다는 것과 한 시즌에 5000개의 디자인에 280만 종의 옷들을 시장에 내 놓고 있다는 점 뿐이다. 옷보다 이슈를 먼저 파는 베네통의 “최고가 되라 아니면 차별화하라(Best or Different)”전략을 살펴보자.

    거대 글로벌 패션기업 베네통의 출발은 다른 기업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하다. 1955년 이탈리아 폰자노 지방의 한 가난한 집. 부친이 돌아가셔 생계가 어려워진 당시 스무 살 장남 루치아노 베네통은 막내의 자전거와 자신의 아코디언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옷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1res Jolie라는 브랜드로 판매된 스웨터는 루치아노의 여동생 줄리아나의 멋진 뜨개질 솜씨와 화려하고 대담한 색상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대담한 색상과 독특한 디자인의 스웨터로 성공한 것을 계기로 1964년에는 이탈리아의 벨루노 지방에 첫 판매점과 1965년 첫 번째 생산공장을 열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프랑스로부터 시슬리 상표를 인수해 1975년 베네통은 이탈리아에만 200여 개의 판매점을 가진 큰 의류회사가 되었다.

    일단 차별화하자!

    1980년대 초 베네통의 문제는 의류업계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사실 고유의 이미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브랜드 고유의 이미지는 글로벌 마케팅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자산이다. 베네통은 최고가 되라 아니면 차별화하라(Best or Different)는 전략을 기반으로 당시 세계 최고들과 맞서 철저하게 스스로를 차별화하기로 결심한다.

    1982년 베네통과 패션 사진 작가 올리베이로 토스카니는 베네통의 ‘차별화 전략”을 기반으로 한 베네통만의 독특한 광고를 만들어냈다. 그 유명한 광고 ‘United Colors of Benetton’의 탄생이었다.

    광고를 통한 베네통의 메시지는 “인종과 문화를 넘어선 인류의 화합”이었다. 하지만 이 광고들은 종종 언론에 보도될 만큼 금기의 영역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평가는 물론 여러 나라에서 논쟁을 야기시켰다.

    신부와 수녀의 키스, 탯줄을 자르지 않은 갓 태어난 아기, 지면 가득히 정렬된 콘돔, 전쟁 참전 용사의 묘지, 가족에 둘러싸여 에이즈(AIDS)로 죽어가는 환자의 모습, 발가벗은 임산부 등이 주요 주제였다. 베네통은 표나는 상품광고보다는 단순히 광고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베네통만의 다큐식 광고를 개발했다.

    전쟁, 출생, 죽음, 폭력이 의류회사 베네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물론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왜 베네통은 엄청난 비난을 받으면서 이런 주제들을 자신들의 메시지로 활용하는 것일까?

    사진작가 토스카니는 “베네통은 가장 적은 예산으로 브랜드를 알리는 회사다.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베네통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스웨터를 생산해냅니다’라는 식의 광고는 이미지로서 충분하지가 않다”고 설명한다. 베네통의 광고는 철저히 ‘차별화’를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제는 그만, 최고가 되었다!

    차별화 된 광고 덕으로 베네통은 세계 120여 개국 8000개 점포에서 연 간 2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거대 패션 그룹이 되었다.

    최근 루치아노 베네통은 60대 후반인 자신이 직접 나체로 나서 “난 여전히 양모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광고를 끝으로 지금까지의 ‘차별화’ 전략을 마감하는 듯 하다. 지난 4월 영입 된 베네통의 신임 CEO 실바노 카사노에 의하면 베네통은 앞으로 튀는 광고를 자제할 예정이란다. 그는 이제 튀는 광고로 시장에서 반감을 조성할 필요가 없다며 전세계 사람들이 편안하게 공유할 수 있는 광고로 다가서겠다고 한다.

    이제 베네통에게는 차별화(Different)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이야기다. 이는 곧 최고(Best)가 되었다는 의미다. 글로벌 시장에서 아직도 ‘튀는’ 광고와 마케팅으로 최고를 향해 달리고 있는 후발 주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부러운 모습이다. 최고로서 그들의 여유로움과 관대함이 말이다.

  • 일관성을 지키며 변화에 성공한 월마트(Wal M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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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포츈 500 기업들 중 1위,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들 중 2위, 2002년 한해 2천450억 달러(한화 약 294조)의 매출, 종업원수 140만명. 이 것이 세계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에 대한 소개다. 매출액은 우리나라 1년 예산인 112조5천억원의 2배를 훨씬 넘고 매주 월마트에 들러 쇼핑하는 인구가 전세계 4~5천만명에 이른다니 우리나라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이들은 어떻게 성공했으며 왜 성공할 수 밖에 없었을까?

    1962년 우리에게는 클린턴 대통령의 고향으로 알려진 미국 아칸소에 샘 월튼이라는 한 40대 잡화상이 할인점을 하나 열었다. 그 이름은 월마트(Wal Mart). 당시에는 이미 K마트, 울코, 타깃 같은 대형 할인점들이 대도시에서 성업 중이었다. 이후 30년이 채 안되어 월마트는 이들 선두 주자들을 밀어내고 세계최대의 유통업체로 뛰어 오른다.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핵심철학은 지킨다

    월마트 1호점에 최초 내걸린 문구는 “우리는 항상 싸게 팝니다(We sell for less, always)”와 “고객의 만족을 보장합니다”였다. 이들 철학은 언제나 가장 낮은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물품을 공급한다는 창업자 샘 월튼의 신념이었다.

    이후 월마트는 ‘5년 이내에 아칸소주에서 수익성이 가장 높은 회사가 된다(1965)’ ‘4년 이내에 10억 달러짜리 회사가 된다(1977)’ ‘2000년까지 점포 수를 2배로 늘리고 제곱 피트당 매출액을 60% 증대 시킨다(1990)’ 등과 같은 구체적 비전을 제시해 구성원들의 열정을 이끌어냈다.

    1992년 샘 월튼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후계를 이은 데이비드 글라스는 모든 부문에서 ‘철저한 원가절감을 통한 최저가 상품 공급’이라는 샘 월튼의 경영철학을 ‘그대로’ 계승해 발전시켰다. 이렇듯 우리는 월마트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그들만의 핵심 철학만은 ‘일관되게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객을 향한 철학 – 고객은 항상 옳다!

    월마트가 가진 독특한 또 하나의 철학은 ‘고객은 항상 옳다(Customer is always right)’는 믿음이다. 샘 월튼은 “항상 고객들에게 신뢰를 주어야 하며, 고객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고객은 우리에게 와 물건을 살 것이다”라며 직원들에게 고객제일주의를 강조했다.

    월마트에는 크리에이터로 불리는 독특한 안내 직원들이 있다. 이들은 해당 지역 출신의 아줌마 아저씨들로 구성되어 있고 월마트에 들어오는 고객들에게 미소로 반기며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크리에이터의 존재는 고객들에게 기분 좋은 쇼핑과 점포에 대한 친근감을 제공한다.

    또 월마트는 직원들의 웃옷에 모두 ‘만약 미소 짓지 않으면 1달러를 가져가세요’란 문구가 적인 명찰을 달게 한다. 고객을 만나 미소 짓지 않는 직원에게 고객은 언제든지 1달러를 요구할 수 있다. 이 1달러를 일명 ‘스마일 1달러’라고 부른다. 스마일 1달러는 매장 판촉 직원에서 매니저 까지 예외가 없다.

    이밖에도 월마트는 고객이 10발짝 이내에 있다면 고객의 눈을 응시하고 반기며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말을 걸도록 교육 시키는 ‘10 발자국 룰’, 회사에 들어온 요청은 국내외에서 들어온 것을 막론하고 요청 당일 해가 지기 전까지 해결한다는 ‘Sundown Rule’등을 실천하고 있다. 이렇듯 월마트에서는 고객제일주의라는 기본원칙을 지키기 위해 조직의 모든 시스템과 제도들이 유기적으로 연계 운영되고 있다.

    행복하게 일하는 회사 월마트

    구성원에게 최고의 대우를 하되 최고의 성과를 요구 한다는 게 월마트 샘 월튼의 이념이었다. 최고의 자부심을 가진 종업원이 최고의 고객만족과 효율적 매장운영을 이루어 내는 법이다. 따라서 월마트는 직원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작업환경 개선에 힘쓰고, 의료비 지원은 물론 목표 이상의 실적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공정하게 이윤을 분배함으로써 매년 가장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최고 경영자가 직접 커피를 타 마시고, 최고 경영자와 경영진은 4평 남짓한 작고 검소한 사무실을 사용하며, 잦은 현장방문을 통해 구성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킨다. 또한 전 직원이 서로를 ‘고객에게 봉사한다’는 공통 목적을 갖는다는 뜻에서 ‘동료(associate)’라 부른다. 회장을 비롯한 모든 종업원이 월마트 심벌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일하는 평등주의도 재미있다.

    자발적 서비스 정신 고취를 위해 회사측에서는 직원들의 사기진작에도 힘쓴다. 특히 하루 업무 개시 직전에 매장의 전직원이 함께 모여 월마트 구호(Wal Mart Cheers)를 외치는데 이를 통해 직원들은 월마트에 대한 소속감과 주인 의식 및 자부심을 느끼고 이를 고객 서비스 향상으로 이어나간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월마트 구호는 샘 월튼이 70년대 한국 방문 당시 우리나라 중소제조업체 직원들이 작업전 회사 구호를 외치는 장면을 보고 미국에 건너가 자사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메이드 인 코리아’ 방식이다.

    현재 월마트는 미국내에서만 3,000여개가 넘는 촘촘한 점포망을 구비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멕시코 587개, 영국 256개 등 한국을 포함한 9개 국가에 1,227개 점포를 운영중이다. 샘 월튼은 생전 늘 “한때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항상 변화의 최전선에 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일관된 철학을 기반으로 한 끊임없는 변화 노력은 언제나 보답을 받게 마련이다. 성공적 혁신은 일관성과 변화의 오묘한 칵테일로 비유될 수 있겠다.

  • 나이키(Nike): 홈런을 위해 ‘저스트 두 잇 (Just Do It)’!

    홈런을 위해 ‘저스트 두 잇 (Just Do It)’! – 나이키(Nike)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창립 29주년의 나이키는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1위의 스포츠용품 업체다. 브랜드 가치만 해도 세계 10위권에 드는 초일류기업 중 하나다. 과감한 디자인과 혁신적 기능을 무기로 소비자들을 사로 잡아온 이 회사의 매출액은 100억 달러 (한화 12조원). 나이키의 창립자 필 나이트(Phil Knight)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잔말 말고 그냥 해보라니까 (Just Do It)!”

    필 나이트는 항상 “남을 앞서기 위해서는 모범적 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세상이 수용하는 기존의 형식을 따르면 한 번도 세상을 앞설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과 문명의 틀을 넘어서라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하고 힘든 주문이다.

    필 나이트는 대학 시절 중거리 달리기 선수였다. 그러나 성적은 중간에 지나지 않았다. 졸업 후 그는 프로 선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선수 시절 신발에 대한 관심이 그를 신발업계에 뛰어들게 했다.

    1964년 500달러(한화 60만원)의 자본금으로 ‘블루 리본 스포츠 (Blue Ribbon Sports)’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신발 회사를 설립했다. 포트랜드 외곽에 차린 이 회사는 벽만 있는 허름한 매장이었다. 최초의 상표명은 ‘타이거’였다. 주말마다 그는 초록색 소형 트럭을 손수 몰고 전국의 신발업자를 찾아 다니며 신발을 팔았다.

    당시 아디다스 판매 사원들의 비웃음을 받으며 그는 첫 해에 겨우 1,300켤레를 팔았다. 년간 판매 8천 달러에 이익은 250달러(한화 30만원)였다. 그러나 15년 후 1980년 나이키는 아디다스를 제치고 미국 내 판매 1위를 차지했다. 30년이 채 못된 1993년에는 1억 켤레 판매를 돌파했다.

    1971년 필 나이트는 포틀랜드에서 광고를 전공하던 대학생 캐롤린에게 신발 옆 부분에 들어갈 로고 디자인을 부탁했다. 그녀는 그에게 스워시 (Swoosh, 현재의 나이키 로고, ‘휙’이라는 뜻)를 만들어 주고 35달러를 받았다. ‘V’자를 부드럽게 뉘어놓은 듯한 나이키의 로고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날개를 상징한다.

    남과는 뭔가 다른 것을 찾아야 성공한다

    미국의 1970년대는 신발의 혁명 시기였다. 나이키는 이 호기를 “뭔가 다른 방식”을 통해 장악 했다. 필은 신발 광고를 했다. 그는 당시 테니스 선수 죤 맥켄로를 스폰서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그는 심판에게 욕설을 퍼부어 늘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나이키는 80년대 당시 최고의 농구선수 매직 죤슨과 래리 버드 대신 노쓰 캐롤라이나 대학의 신인 마이클 조던과 계약했다.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만을 위한 신발을 디자인했고 그것을 ‘에어 조던(Air Jordan)’이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NBA에서 검정색 농구화가 허용되지 않았지만 ‘에어 죠던’은 검은 색과 빨강이었다. 마이클은 한 게임당 1000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그러나 벌금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신었다. 필 나이트는 소비자들의 관심과 논쟁이 벌금보다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연히 수많은 소비자들이 나이키 매장에서 에어 조던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80년대 말 나이키의 매출은 연간 8억 7천만 달러에서 40억 달러로 5배나 급격히 뛰어 올랐다. 필 나이트는 나이키 운동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파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이키 운동화를 와서 사도록 만든 것이다. 뉴욕의 전문직 여성들이 출근길에 양장에 나이키 조깅화 차림으로 달리다가 사무실에 도착해 하이힐로 바꾸어 신는 문화를 정착시킨 것도 나이키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마이클 존슨이 신었던 ‘황금신발’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메리언 존슨이 입었던‘Swift Suit (속도복)’는 나이키의 스포츠 과학의 승리였다. 나이키는 단순한 스타 마케팅을 넘어 스포츠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비전까지 제시해준다. 최근에는 골프 천재이자 최초의 흑인 골퍼인 타이거 우즈를 통해 나이키는 계속 ‘뭔가 다른 방식’으로 운동화에 인격을 불어넣고 있다.

    나이키의 상대는 소니, 닌텐도 그리고 애플?

    이제 나이키는 경쟁상대로 아디다스, 리복 같은 동종업체를 꼽지 않는다. 소니, 닌텐도, 애플 등이 자신들의 경쟁상대라고 한다. 나이키 소비자들이 그들의 제품도 사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이들의 혁신을 지켜보고 나이키를 지켜본다. 만일 소니가 더 많은 기능에 더 작은 전자제품을 선보이면 나이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키는 고품질의 신발도 중요하지만, 자사의 제1경쟁력을 ‘혁신적 디자인의 제품을 시장에 가장 먼저 내놓는 것’으로 삼고 있다. 나이키는 거대한 혁신 즉 홈런 한방을 연이어 노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구/개발 쪽으로 엄청난 돈을 투자한다.

    나이키는 현재 신발과 의류용품 분야 등에서 동종 업계 최다수의 디자이너를 확보하고 있고 최대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창업 30여 년 만에 나이키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필 나이트 회장을 비롯한 나이키 전 구성원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창의성을 존중하는 기업문화를 가꾸어온 때문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새로 찾아 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은 더 어렵다. 혁신은 남이 하지 않았고 하기도 싫어하는 일을 과감히 해내는 것이다. 혁신은 그래서 어렵다고 한다. 혁신은 나이키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창의성’을 먹고 자란다. 창의성 개발을 위해 오늘 자신의 책상 앞에 나이키가 우리에게 준 교훈을 써 붙여보자. 저스트 두 잇 (Just Do It)!. “잔말 말고 한번 해보라니까!” 성공할 꺼라 믿기만 하면 된다. 어려워 보이지만 간단하다.

  • 롤리타 렘피카: 프랑스 시장을 무너뜨린 한국의 트로이 목마

    글로벌 마케팅의 세계를 가다

    3회: 한국 태평양 롤리타 렘피카 향수

    프랑스 시장을 무너뜨린 한국의 트로이 목마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세계 27위, 53살 짜리 한국의 화장품 회사가 화장품의 나라 프랑스에서 큰 사건을 냈다. 프랑스인이 이끄는 프랑스식 회사를 만들어 프랑스식 향수를 팔아 프랑스 시장을 삼켜버린 것이다. 그 누구도 유명향수 ‘롤리타 렘피카’를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프랑스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보낸 ‘트로이의 목마’로 보지 않았던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1945년 설립된 화장품 회사 태평양은 1990년 프랑스에 PBS라는 현지법인을 세워 ‘리리코스’라는 기초화장품을 생산했었지만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프랑스에서는 기초화장품보다 향수나 색조화장품이 인기라는 점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은 이 실패의 교훈을 통해 한국 화장품 시장의2-3% 정도인 향수시장이 프랑스에서는 32%나 된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고 이 시장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태평양은 야심찬 ‘현지화’ 전략을 세웠다. 프랑스 향수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자본만 제공할 뿐 기획, 디자인, 제조 및 판매를 모두 프랑스 현지인들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1995년 설립된 프랑스 현지회사 PCP(PACIFIC CREATION PARFUMS)에는 한국인 파견직원 2명을 제외한 150명이 모두 현지 채용인들로 채워졌다.

    프랑스의, 프랑스에 의한, 프랑스를 위한 향수

    특히 태평양은 당시 크리스찬 디오르 이사인 카트린 도팡을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로 영입했다. 그녀는 지난 74년 이브생로랑에 입사해 유니레버, 이브로세 등에서 근무한 화장품 업계의 전설적인 영업통이었다.

    그녀는 소비자들에게 낯선 새로운 브랜드를 만드는 대신 유명 디자이너와 손잡고 그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브랜드로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을 택했다. 당시 ‘롤리타 렘피카’는 주목 받는 신예 디자이너로 그녀의 작품들은 동화를 연상시키는 순수함과 사로잡힐 듯한 관능미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마침내 1997년 4월 PCP는 유명 디자이너 롤리타 렘피카와 라이센싱 계약을 맺고 ‘Made in Paris’ 향수 ‘롤리타 렘피카’를 선보이게 된다. 향 (Firmenich) 과 용기 디자인 (Alain de Mourgues), 패키지(Autajon) 광고 (Saatchi & Saatchi)등도 모두 롤리타 렘피카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현지 전문가들의 작품이었다.

    샤넬 No.5의 10년이 롤리타 렘피카에게는 2년?

    명품들이 즐비해 새 브랜드가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는 고급 향수 시장 프랑스에서 여성적이고 환상적인 향과 용기 디자인을 내세운 롤리타 렘피카는 출시 8개월 만에 시장 점유율 1%로 프랑스 고급 향수시장10위권에 진입한다.

    200여개 브랜드의 향수가 경쟁하는 프랑스에서 샤넬No. 5의 점유율이 3.6%인 점을 감안하면 롤리타 렘피카의 성공은 기적이었다. 이후 롤리타 렘피카는 샤넬 No.5가 10년을 투자해 얻은 결실을 단 2년 만에 달성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2002년에는 프랑스 시장 시장점유율 2.7%로 샤넬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세계 500개 고급 향수 브랜드 중 9위 브랜드 롤리타 렘피카

    롤리타 렘피카는 지난 수년간 프랑스와 미국의 향수 재단들이 선정하는 최우수 여성 향수, 최우수 남성 향수 및 최우수 용기 디자인상을 휩쓸었다. 또한 유럽 주요국은 물론 미국. 중동. 중남미. 일본.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 약 80여 개국에서 세계적 향수 브랜드로 명품 대우를 받고 있다.

    프랑스는 화장품에 관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확보하고 있어 세계적 화장품 회사들이 최고의 인프라를 바탕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프랑스에서의 성공은 곧 글로벌 경쟁에서의 성공을 의미하기에 태평양의 글로벌 브랜드 전략은 성공적으로 평가 받는다.

    만약 태평양이 고집 세게 한국적 제품과 브랜드로 프랑스 시장에 계속 도전했다면 어땠을까? 성공적 결과를 위해서는 국적도 과도한 자존심도 실리를 위해 과감하게 포기하는 야심찬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생한 교훈을 태평양과 롤리타 렘피카는 제공하고 있다.

  • 산골 종이공장에서 세계 휴대전화 거인으로 – 노키아(Nok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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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휴대전화 시장 1위, 전세계 휴대전화 시장 35% 점유 기업, 유럽 증시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기업, 92년부터 7년간 주가가 291배 뛴 기업, 이 기업이 바로 핀란드의 노키아다. 산림국 핀란드를 일으킨 IT (정보통신) 기업 노키아의 생생한 성공담을 구경하자.

    정용민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부장)

    산타 클로스의 고향이라는 북유럽 핀란드는 전 국토의 70%가 삼림이다. 일년 중 반이 겨울인 이 나라가 가진 자원은 아이러니 하게도 울창한 나무들뿐이다. 노키아는 이런 조국의 IT산업을 이끌어 담박에 핀란드를 세계 정보통신 산업의 메카로 만들어 놓았다.

    올해로 138살을 맞는 회사 노키아가 처음부터 통신 관련 사업을 했던 것은 아니다. 91년 경제 불황 전까지 노키아는 고무, 케이블, 텔레비전, 컴퓨터, 알루미늄, 펄프 및 종이, 발전, 부동산, 통신을 취급하는 9개 계열사를 거느린 잡동사니 회사였다. 당시 노키아도 그룹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었다.

    80년대 말 노키아는 독일에서 컴퓨터, 컬러 TV로 막대한 손실을 보았고, 당시 사장이 자살할 정도로 어려웠다. 더욱이 소련의 붕괴는 안정적 수출 상품이었던 노키아의 경공업 제품을 창고에 쌓이게 하였고 국내 경기 침체로 90년대 초 적자액은 무려 2억 달러(한화 2500억)에 달했다.

    경쟁력 없는 사업은 버려라!

    이런 위기에서 노키아를 구출해낸 것은 요르마 오릴라(Jorma Ollila) 회장을 비롯한 노키아 이사회의 최고경영자들이었다. 92년 오릴라는 취임과 동시에 업계에서 1위를 할 가능성이 없는 사업들을 과감히 정리했다. 그는 “장차 죽느냐 사느냐의 승부를 걸 수 있는 분야는 전자통신분야뿐”이라며 휴대전화 하나에만 전념키 위해 8개 계열사를 몽땅 처분했다. 다소 모험적이었지만 당시 경영진은 무선통신시대가 다가올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것이다.

    사실 노키아는 81년부터 휴대전화를 만들기 시작했었다. 핀란드는 산악지대가 많고 인구가 분산되어 있는 휴대전화 시장으로는 최적지였지만 당시 잘 나가던 경공업과 가전제품 사업에 매달린 노키아에게는 부수적 사업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키아는 GSM(유럽 등지에서 통하는 비동기 방식) 휴대전화가 처음 출시되기 9년전인 82년부터 GSM 표준 기술 개발에 착수해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휴대전화를 노키아의 핵심사업으로 결정하게 된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핵심역량은 지킨다!

    현재도 노키아의 전체 직원 6만명 중 3분의 1이 연구 개발(R&D)에 종사하고 있다. 제품 주기가 짧은 통신산업에서 성공하려면 ‘신속한 제품개발’과 ‘대량생산을 통한 원가 경쟁력 확보’가 핵심이라 믿기 때문이다.

    또한 지멘스 등 경쟁사가 부품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데 반해 노키아는 필요한 부품을 필요한 만큼 외부에서 사들인다. 노키아의 표어인 커넥팅 피플(connecting people)에는 자신이 가장 잘 하는 핵심 부문을 빼고는 모두 다른 기업에 맡긴다는 뜻이 들어 있다.

    연구활동도 다른 곳이 더 잘 할 것 같으면 그곳에 맡기고, 심지어 경쟁업체와도 같이 연구 활동을 하면서 노키아는 경쟁력을 유지한다. 이러한 노키아의 경쟁력 때문에 2001년 세계 3대 휴대전화 회사인 스웨덴의 에릭슨은 “노키아 등 질 좋고 값싼 제품을 공급하는 경쟁사에 밀려 휴대전화 생산을 완전 중단한다”고 발표할 정도다.

    기업 전략을 사내 모두가 공유한다!

    통신업으로 급격히 사업을 전환하면서도 노키아 직원들은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노키아는 늘 비전과 전략을 종업원들한테 공유해왔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부터 매년 전세계 간부들이 일반 직원들과 함께 회사의 비전과 전략을 토론하는 “노키아 웨이(Nokia Way)”가 그 방식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노키아는 가벼운 조직과 신속한 의사결정을 덤으로 얻었다.

    매력적인 조직문화를 만든다!

    노키아는 금전적 인센티브 외에도 직원들에게 젊은 나이에 경력을 쌓고 책임 있는 일을 담당하면서 일을 즐기고 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현재의 노키아 경영진은 90년대 초반 매우 젊은 나이에 중책을 맡았던 이들이다.

    노키아는 직원을 해고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다른 회사들은 실수를 한 직원을 내보내지만, 노키아는 그 자리에서 실수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그 직원을 함부로 해고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노키아는 90년대 초 사업부서를 매각하는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직원들의 이해를 최대한 반영했다. 소비자가전 부문 등을 매각할 때에도 고용 안정이 계약서에 명시되도록 직원 입장에서 협상했다.

    브랜드가 전부다! (Brand is everything)

    이외에도 전문가들은 노키아의 마케팅과 브랜딩을 성공요인으로 꼽는다. 노키아는 휴대전화 업체 중 가장 먼저 고객 차별화 전략을 도입하여 각각의 고객에 맞는 제품으로 마케팅 활동을 전개했다. 노키아는 성능이 비슷한 제품이 넘쳐 나는 휴대전화 시장에서의 성패는 브랜드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노키아는 미국계 다국적 기업이 브랜드 마케팅 시장을 휩쓸고 있는 가운데, 2002년 인터브랜드의 글로벌 브랜드 자산가치 평가에서 유럽계 브랜드로는 유일하게 6위를 차지했다.

    많은 기업들 중 노키아는 정말 ‘모범생’ 같은 성공신화를 자랑한다. 어느 한 구석 모난 데가 없이 정확하고 깔끔한 변화와 혁신 사례다. 최근 노키아는 10년 전 자신이 그랬듯이 무선통신분야에 다시 한번 새로운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노리다 한번에 낚아채 듯이 노키아는 오늘도 무선통신을 노린다. 혁신은 그만큼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강한 자는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