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얼마 전 클라이언트와 식사하던 중 홍보팀장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희도 위기관리 매뉴얼을 만들어 관리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위기가 발생하면 매뉴얼을 따르기 보다는, 어떻게든 관련 담당자들이 모여서 대응하게 되더군요.” 이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흔히 말하듯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상황이 떠올라, 그런 현실적인 모습에 일견 공감이 갔다.
예전 글에서도 몇 번 강조했지만, 위기관리 매뉴얼은 없어도 문제고 있어도 문제인 계륵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매뉴얼을 ‘보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위기관리 매뉴얼도 없이 대응했다”거나 “우리는 왜 매뉴얼조차 없었나?” 같은 사후 비판이 이어진다. 여기서 ‘보유’라는 표현에 주목하기 바란다. ‘보유’가 곧 ‘활용’이나 ‘참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계륵으로서의 위기관리 매뉴얼
반면, 매뉴얼을 보유한 상황에서 위기가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 많은 사람은 “매뉴얼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거나 “매뉴얼이 낡아서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는 매뉴얼을 그대로 따랐다면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을 수도 있는데, 비판자들은 마치 매뉴얼대로만 움직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한다.
실무자 입장에서는 한 번 만든 매뉴얼을 계속 업데이트하는 것도 고역이다. 사내 직제 개편은 수시로 일어나고, 위기관리 팀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뀐다. 새로 온 인력들은 매뉴얼을 이해하지 못할 뿐 더러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홍보실은 물론 다른 유관 부서를 통틀어 매뉴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없다. 관리 책임이 있는 홍보 임원도 점차 매뉴얼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실무 담당자가 업데이트 업무를 맡아보지만, 몇 개월 지나 다시 들쳐보면 마치 고서적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매뉴얼은 생명력을 잃는다. 그래서 위기관리 매뉴얼의 유효 기간은 제작 후 딱 6개월뿐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위기관리 매뉴얼을 보여주세요”
클라이언트사에 이런 요청을 할 때가 있다. 컨설턴트들이 매뉴얼 교정이나 개선 작업을 하기 전 기존 자료를 분석하기 위해서다. 이럴 때 아주 당당하게 매뉴얼을 내놓으며 자신감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여러 이유를 대며 해당 매뉴얼이 별 쓸모 없었음을 강조할 뿐이다. 기존 매뉴얼을 신속하게 전달해 주는 경우는 담당자조차 평소에 그 매뉴얼을 전혀 들여다보지 않은 경우다.
“사실 쓸모는 없는데, 윗분들이 보고를 원하셔서”
홍보실뿐 아니라 다른 위기관리 부서에서도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할지에 대해서는 늘 의문을 품는다. ‘어차피 실무선에서 대응 가능한데 매뉴얼이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는 부서도 있다. 단지 매뉴얼이 윗분들에게 “우리도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위기 시 매뉴얼에 따라 신속히 대응할 수 있다”는 식의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도구로 쓰인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핵심은 구성원 대부분이 매뉴얼의 실효성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기관리 매뉴얼이 잘 되어 있는 곳은 어디인가?”
다른 기업도 상황이 이토록 불만족스러운지 묻는 질문이다. 혹은 어딘가에 ‘진짜 매뉴얼’이 존재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 같다. 수많은 기업의 매뉴얼을 접해본 경험으로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매뉴얼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여 전 조직이 즉각 활용할 수 있게 관리하는 조직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비슷한 고민과 번뇌를 겪으며, 일단 ‘보유’하는 데 의미를 둔다.
“홍보실만이라도 커뮤니케이션 매뉴얼을 가지는 건 어떨까?”
모든 매뉴얼은 수명이 짧고 현실을 즉각 반영하지 못한다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매뉴얼에 제시된 시나리오 그대로 상황이 벌어질 확률은 희박하며, 설령 그렇다 해도 매뉴얼 문구를 그대로 복사해서 소통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다. 상황별로 할 일(Do)과 하지 말아야 할 일(Don’t)을 정리하자는 의견도 나오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홍보 업무 매뉴얼과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에는 답이 궁해진다. 모든 상황을 예측해 메시지와 근거를 완벽히 갖추겠다는 생각은 대개 실패로 끝난다.
“위기관리팀 차원에서 계속 정리하고 있다”
사내 위기관리팀 구성원들이 스스로 할 일과 대응 방식을 정리하려고 노력한다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토론을 거쳐 현실적인 프로세스를 만든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리한 프로세스가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생각과 다르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간의 논의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누구 마음대로 이렇게 책임과 역할을 나누었나?”
새 매뉴얼을 보고 유관 부서들이 가장 흔히 내놓는 피드백이다. 예를 들어 매뉴얼에 ‘위기 시 특정 공간을 확보하고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내용이 있고, 설치 책임을 총무팀으로 지정했다고 가정해 보자. ‘소집 명령 하달 후 1~3시간 내에 모든 설비를 갖춰야 한다’는 구절을 본 총무팀장의 반응은 과연 어떠할까?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산은? 누가? 어떻게? 이런 질문들이 이어진다.
“위기관리 매뉴얼 가져와 봐!”
위기가 발생해 대응 회의가 시작되었다. 어떤 임원은 매뉴얼을 팔에 끼고 회의에 참석한다는데, 그렇게 회의실에 들어갔다고 치자. 이때 회장님께서 매뉴얼을 보자고 하신다. 수백 페이지 분량의 매뉴얼과 부록을 쌓아 놓으면 “이 중 어떤 게 매뉴얼인가?”, “어디부터 봐야 하지?”, “지금 상황은 어디에 적혀 있나?” 같은 질문이 쏟아진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심각한 것이다. 위기 발생 후에야 매뉴얼을 읽기 시작하는 것은, 비행기가 추락하는 중에 기장이 매뉴얼을 처음 펼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관리 매뉴얼을 안 만든다”
평상시에는 이 주장이 상당히 세련되어 보인다. 형식보다 실질적인 역량에 집중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응 훈련을 하고 사례를 공유하며 역량 강화에 힘쓰는 모습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런 멋진 모습도 위기가 터지는 순간 사라지곤 한다. 준비한 대로 잘 움직여도 누군가 “매뉴얼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움직이는 건가?”라고 한마디 던지면 분위기는 급변한다.
“매뉴얼을 핵심만 담아 간단하게 만들면 어떨까?”
일본 모 대형 백화점 매뉴얼은 A4 3장이라거나, 미국 대기업 CEO는 연락처 위주의 핵심 페이지를 품고 다닌다는 식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매뉴얼이 굳이 수천 페이지일 필요가 있을까? 모든 변수를 담는 게 가능할까? 부서별 역할을 간단히 명기하는 형태 등 다양한 실무적 논의가 계속된다. 그러나 문제는 의사결정자 회의에서 발생한다. “이렇게 대충 만든 매뉴얼로 위기관리가 되나?”라는 피드백이 나오면 핵심만 담았다는 해명도 무색해진다.
“그럼 대체 어쩌라는 건가?”
이 질문은 매뉴얼 관련 회의에서 가장 많이 나온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대기업 것을 베껴도, 전문가들이 수개월 고생해서 만들어도 말은 끊이지 않는다. 사내에서 만든 것은 전문가 검증을 받아오라 하고, 두껍게 만들면 누가 보느냐고 하며, 얇게 만들면 부실하다고 한다. 예전 것을 유지하면 낡았다고 하고, 업데이트를 하려 하면 새로 만드는 게 낫다는 의견이 나온다.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묘안은 없다. 어떤 홍보 임원은 농담조로 “홍보실이 위기관리를 전담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했다. 뜨거운 감자를 계속 쥐고 있어 봐야 득 될 게 없다는 뜻이다.
자사에 맞는 매뉴얼이 최고
어렵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면, 반드시 ‘자사에 맞는’ 매뉴얼을 만들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사에 맞는다는 것은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의도와 의지에 기반한다는 의미다. 그들에게 맞는 매뉴얼이 좋은 매뉴얼이다.
또한 한 번에 완성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핵심 버전을 먼저 만들고, 피드백을 통해 점진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계속이라는 단어가 핵심이다.
알려져야 사랑받는다
그와 함께 중요한 것은 제작과 업데이트 과정에서 위기관리팀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내부 커뮤니케이션을 이어가는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외국 속담이 있다. 매뉴얼의 내용을 구성원에게 알리고, 이해시키고, 피드백을 받아 개선하는 노력이 쌓일 때 비로소 그 매뉴얼은 조직 내에서 사랑받고 생명력을 얻게 된다.
현재 자사의 매뉴얼에 문제가 느껴진다면, 이러한 기본적인 노력이 생략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결국 위기관리 매뉴얼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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